-
-
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평점 :

제목: 패싱
글쓴이: 넬라 라슨
옮긴이: 서숙
펴낸 곳: 민음사
내가 갖지 못한 것에 관한 욕망, 혹은 거짓말 한 번이면 쉽게 얻을 수 있는 특권을 갈망한 적 있는가? 옳지 않지만, 애써 무시하고 넘어가기엔 너무 매력적인 그 욕망의 속삭임에 굴복한 한 여자의 이야기를 만났다. 『패싱_passing』. 조금 낯선 이 제목은 흑인이 백인 행세를 하는 일종의 사기 행각을 뜻한다. 1891년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넬라 라슨은 두 권의 소설을 연이어 출간하며 두각을 드러냈지만 안타까운 개인 사정으로 다음 작품을 출간하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고 한다. 이 책 『패싱』은 그녀의 두 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책이 출간된 1920년대는 패싱 인구가 급증했던 시기로, 경제적 지위가 향상된 흑인이 백인 문화를 접하며 선망의 눈길로 도약을 꿈꾸던 시기였다. 수많은 흑인 중, 백인과의 혼혈로 하얗게 태어난 흑인들은 백인 같은 삶이 아닌, 백인으로 살아가고자 했다. 하얀색에 관한 일그러진 욕망과 그 욕망이 초래하는 끔찍한 비극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주인공 아이린에게 날아든 편지로 슬픈 이야기가 시작된다. 발신자는 고향 친구였던 클레어. 아버지를 잃고 마을을 떠난 클레어를 우연히 마주친 건 2년 전, 시카고에서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방문하게 된 클레어의 집에서 아이린은 소름 끼치는 사실을 접한다. 클레어가 백인 행세를 하며 결혼한 남성 존은 흑인을 혐오하는 인종 차별주의자였다. 자신의 아내는 물론 방문한 친구들이 모두 흑인의 핏줄이란 걸 모른 채, 존은 요즘 아내가 얼굴이 까맣게 탔다며 천연덕스럽게 '검둥이'라 놀린다. 흑인이 'Black'이란 단어를 얼마나 치욕스럽게 여기는지 우리는 차마 다 헤아릴 수 없다. 황인인 우리가 'Yellow'라는 소리에 발끈하는 정도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골이 깊디깊은데...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후, 멀리하고 싶었던 클레어가 다시 아이린의 인생에 끼어든다. 아이린이 주관하여 할렘가에서 벌어지는 흑인 파티에 발을 들이고, 자신의 출신이 들킬 위험을 무릎 쓰며 자유분방한 삶을 즐긴다. 눈부시게 아름다워 여러 남성의 시선을 끈 클레어. 아이린은 문득 자신의 남편 브라이언의 미심쩍은 시선을 알아챈다. 클레어로 인해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망이 된 상황에서 아이린은 고통스럽게 절규하는데... 과연 그 결말은?

"너희는 내가 원했지만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들을 다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가진 것과 그 이상을 손에 넣기로 결심했지.
내가 느꼈던 것을 너 이해하겠니, 이해할 수 있니?"
『패싱』 p51 중에서...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를 이루는 패싱(백인 행세)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하얀색과 검은색 껍데기 중 무엇이든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면 과연 무엇을 고를까? 상당한 특권을 지니게 해줄 하얀색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껍데기가 내면의 정체성까지 바꿔줄 수는 없는 법. 감쪽같이 백인으로 살아가던 클레어의 영혼은 옛 친구들과 흑인 사회에 발을 들이며 뜨겁게 불타오른다.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을 만큼 그녀는 자신을 되찾고 싶다. 클레어의 그 욕망이 아이린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이 과정에서 인종 문제가 아닌 한 여성이 겪는 질투와 공포, 끝없는 고민과 보호 본능이 추악하게 일그러져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인생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이 사실을 간과했던 클레어의 최후는 가슴이 저릿했다. 그 모습을 바라봐야 했던 아이린의 모습도 그저 소설 속 인물이라고 냉정하게 대하기엔 너무 큰 연민을 자아내기에... 이런, 누가 그녀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출판계의 슈퍼스타 민음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몰입하며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