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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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른 세계에서도

글쓴이: 이현석

펴낸 곳: 자음과모음

 

 

 

 굉장히 묵직한 단편집을 만났다. 단편 소설은 의례 통통 튀는 매력을 발산하며 재치있게 마무리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게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등 다양한 느낌을 주지만 장편 소설보다 깊이 생각할 거리는 적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현석 작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의 굵직한 8개의 단편이 실린 『다른 세계에서도』. 마지막 마침표를 눈에 담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차례를 살펴본다.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 다른 세계에서도, 라이파이, 부태복, 컨프론테이션, 눈빛이 없어, 너를 따라가면, 참'. 제목을 보니 각 작품에서 만났던 등장인물과 사연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아,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이 여운... 아무래도 며칠은 꼼짝없이 이 책을 떠올릴 것만 같다.

 

 

 

 8편 모두 수작이라, 어떤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이 글에 담을까 고민하다가 딱 3편만 골라보았다. '유나 씨가 정원에 내려가 산책을 하자고 제안한 것은 아버지인 이시진 씨의 연명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한 아침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 연명치료 포기라는 힘든 결정보다는 환자가 쓰러지기 전에 겪은 사연과 그로 인해 고통받았던 딸 유나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거기에 의사인 주인공 '나'의 소설 속 소설, 비정한 동기의 불편한 글 등 고작 17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인데도 상당히 탄탄하고 긴 여운을 남긴 작품이었다. '그해 성탄절 새벽을 나는 기억합니다'란 문장으로 시작하는 <다른 세계에서도>는 낙태죄 헌법 소원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회 집단과 산부인과 전공의이자 곧 조카를 갖게 될 정지수라는 여성의 한 시절이 담겨 있다. 임신한 상태에서 십 대 환자의 8주 된 태아를 중절하고 자신의 아이와 그 아이가 겹쳐 보여 괴로웠다는 한 의사의 고백이 메아리처럼 울려 심장에 파고들었던 소설이었다. '한쪽 문이 닫혀야 반대쪽 문이 열린다'란 문장으로 시작하는 <참>은 이현석 작가의 공모전 첫 당선작이라 읽기 전부터 기대했던 작품이다. 아동 성폭행범이었던 죄수의 미심쩍은 옥사. 이 죽음에 숨겨진 진실을 좇던 이진영 교수는 그 죄수를 억울한 일을 당한 인간으로 봐야 할지, 아동 성폭행범으로 봐야 할지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으며 무너져내린다.

 

 

 


 

 

 

'애증'은 함정과도 같아서 관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애초부터 필요 없던 감정임을 알게 된다.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 p15 중에서...

"옳다고 여기는 거랑 말해져야 하는 게 늘 같을 수는 없더라고"

<다른 세계에서도> p57 중에서...

 

 

 

 쉽지 않은 책이었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은 어려운 소설은 아니었으나, 그 깊이가 남달라 읽으면서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수없이 물음표가 떠올랐던 책. 이 책은 현실에서 겪는 다양한 문제와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은 뉴스에서 봤을 사회적 문제를 냉철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읽은 이로 하여금 생각하고 고민하며 괴로워하게 만든다.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이 옳다는 답을 쥐여주지 않고 스스로 고민하며 길을 찾으라 독촉한다. 아니, 물끄러미 바라보며 방치한다. 이현석 작가의 글을 견뎌내기엔 더없이 미약했던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 치며 그 선택을 미루고 또 미뤘던 것 같다. 한 번만 읽고 끝내기엔 아쉽고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다른 세계에서도』... 언젠가 반드시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될 거란 예감에 순간 가슴이 욱신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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