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사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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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행사

글쓴이: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옮긴이: 승주연

펴낸 곳: 은행나무

 

 

 

 오로라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무지갯빛 도형. 그 속에 흐릿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한 남자의 그림자. 체형만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는 그 모습에서 짙은 슬픔을 느낀 건 비단 나뿐일까? '러시아의 움베르토 에코'라고 불린다는 작가 예브게니 보돌라스킨의 대표작, 『비행사』.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으로 가장 많이 접했던 러시아 문학이기에, 약간의 걱정이 앞섰다. '어려우면 어떻게 하지...', '잘 안 읽히면 어쩌지...' 하지만 책의 첫 장을 펴든 순간 이 모든 것이 쓸데없는 걱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첫 장부터 무언가에 홀린 듯 깊이 빠져든 이야기. 그렇게 나는 60여 년의 시간을 날아 주인공 인노켄티와 함께 세상을 마주했다.

 

 

 

 꿈이었을까? 머릿속에 사진처럼 박힌 몇몇 순간을 떠올리며 인노켄티는 머리가 흔들렸다. 이곳은 어디인가? 실눈을 뜬 채로 맞이한 낯선 남자는 자신을 주치의 가이거라고 소개한다. 인노켄티는 기억 상실에 걸린 환자일까? 현재 그에게 주어진 확실한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주치의 가이거, 간호사 발렌티나와 소통하며 이곳이 병원이라는 걸 알게 됐을 뿐. 가이거는 억지로 기억을 불러내거나, 너무 많은 사실을 받아들이면 위험할 수 있다며 인노켄티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라고 권한다. 그는 매일 떠오른 기억의 조각을 일기에 적으며 과거의 기억을 차츰 되찾는다. 술 취한 선원들에게 살해된 아버지, 평생의 사랑이었던 아나스타샤와의 행복했던 추억, 자레츠키라는 남자의 사망으로 겪게 된 고초,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냉동 인간이 되기까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담담하게 지난 세월을 하나씩 꺼내는 인노켄티를 보며 감정 세포에 문제가 생겼나 싶다가도, 어느 날 문득 외마디 비명처럼 일기에 내뱉은 그의 고통스러운 절규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인노켄티 혼자 일기를 적던 1부에 이어 2부에서는 주치의 가이거와 아나스타샤의 손녀이자 이젠 인노켄티의 연인이 된 나스챠가 그와 함께 일기를 적는다. 각자 따로 적는 일기지만 교차하며 이어지는 그들의 마음과 상황이 한 사람의 서술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묘미를 선사한다.

 

 

 


 

 

 

"늙는 거 안 무서워요?"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노년은 두렵지 않아요... 죽음이 두렵죠. 존재하지 않는 게 두렵죠."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비행사』 p107 중에서...

 

 

 

 그저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사랑하는 사람 하나 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면... 대체 어떤 마음일까?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이어지는 인노켄티의 이야기엔 짙은 고독과 외로움이 깔려있다. 그가 꽁꽁 얼어있던 사이에 할머니도 어머니도 전부 죽었다. 비행사가 창공을 가르듯 60여 년의 세월을 날아 깨어난 그에게 임종을 앞둔 아나스타샤마저 없었다면 이 이야기는 그저 가슴 아픈 비극으로 끝나버렸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다 읽은 후에야 '존재의 본질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은유'라는 문구가 어떤 의미임을 실감했다. 훅 밀려드는 뭉클함에 코끝이 찡해지는 부분이 꽤 많았고, 그때마다 나는 사력을 다해 인노켄티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를 응원했다. 삶이 이어지는 한, 우리는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기에! 한 사람의 특별한 인생을 통해 러시아의 지난 역사를 아우르고, 생명과 존재에 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특별한 소설. 오랜 가뭄 끝에 촉촉하게 내린 단비를 순식간에 빨아들이듯, 나는 그의 인생을 온 마음을 다해 받아들였다.

 

은행나무 서포터즈로 도서를 지원받아

뭉클한 마음으로 읽고 조심스레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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