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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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글쓴이: 어슐러 K. 르 귄

옮긴이: 이수현

펴낸 곳: 황금가지

 

 

 특정 장르를 대표하는 작가들은 의외로 타인에 의해 자신의 장르가 국한되는 걸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얼마 전 굉장히 재밌게 읽었던 《킨》의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도 사람들이 자기를 SF 작가라고 평하지만, 자신은 그저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SF 장르의 전설적인 작가 어슐러 K. 르 귄 역시 그러하다. 그녀가 2000년부터 2016년까지 쓴 강연용 글, 에세이, 서평, 서문과 더불어 1994년 여성 작가들만의 칩거처 '헤지브룩'에서 창작하며 보낸 특별한 일주일의 기록이 담긴 책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이 책을 읽으면 이런 열린 사고방식과 깊이 있는 정신세계를 가진 인물을 그저 SF 장르 작가로 규정하는 건 정말 어리석고 예의 없는 실수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싫은 책을 다룰 때만 아니면 서평 쓰기는 좋아한다.

서평을 읽을 때는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글이 최고지만

잘 쓰고 잘 맞는 악평도 귀하게 여긴다.

형편없는 책에 대한 죽여주는 평을 읽으면 죄책감 없이 즐겁다.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p12 서문 중에서...

 

 

 

 

 

 

 책의 시작을 여는 《강연과 에세이, 어쩌다 내놓은 조각 글들》은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꼿꼿하게 자신의 견해을 밝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이 시대의 원더우먼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슬그머니 동경심이 샘솟았다. 원치 않았던 임신이라면 당연히 낙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녀는 미혼모가 그 아이를 낳고 잃게 될 미래의 수많은 가능성과 행복을 논한다. 정말 되살려야 하는 건 앞으로 꾸릴 가정의 소중한 내 아이라는 외침이 절실한 메아리가 되어 오래도록 내 귀에 맴돌았다. 이런 민감한 문제에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다니, 정말 멋지다! 다양한 주제의 강연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그곳 한 자리에 자리 잡고 열심히 메모하며 강연을 듣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장르 중독자들은 책이 패스트푸드처럼 쉽기를 원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세상엔 많은 나쁜 책이 있지만, 나쁜 장르는 없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예술은 메시지 이상의 뭔가를 드러낸다니, 옳은 말씀이다. 대기업 자본의 유입으로 개성을 잃고 획일화되어 가는 출판 시장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어려운 독립 출판 시장의 상황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잠을 제대로 자라는 부분에서는 어젯밤 늙게까지 책 읽던 내게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났다.

 

 

 

 《책 서문과 작가들에 대한 글 모음》 그리고 다양한 서평도 평소 만나보기 힘든 특별한 글이었다. 이슬아 작가의 서평집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를 읽고 흘러넘치는 감성에 감탄하며 서평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놀랐던 기억이 새록새록. 어슐러 K. 르 귄 작가님의 서평은 대중문화를 꿰뚫는 냉철한 판단과 전문적인 지식이 잘 녹아 있어 촘촘하게 짜인 논문을 읽는 기분이었다. 방대한 지식과 그 깊이에 읽으면 읽을수록 놀라게 되는 그녀의 글. 훔치고 싶을 정도로 부러운 지성과 재능이다. 온갖 의무와 걱정을 벗어던지고 일주일 동안 오롯이 홀로 사색할 수 있었던 일주일의 기록은 눈부시게 반짝였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거닐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아, 나에게도 언젠가 그런 순간이 올까? 이 책을 읽은 것만으로 한 뼘 성장한 느낌이다. 앞으로 어떤 삶의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지 롤모델을 찾은 기분이랄까? 어슐러 K. 르 귄 작가님처럼 나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리고 멋진 작품을 써낼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찌릿찌릿한 자극에 온몸의 세포가 반짝 눈을 떴던 특별한 경험! 이 책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덕분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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