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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평점 :

제목: 토우의 집
글쓴이: 권여선
펴낸 곳: 자음과모음
권여선 작가와의 첫 만남은 소설 『레몬』이었다. 그 만남이 남긴 약간의 호감과 호기심 덕분이었을까? '권여선'이라는 석 자는 일단 마주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어로 내 가슴에 자리 잡았다. 그 후로도 몇 번의 만남이 이어졌고, 마침내 인생에서 오래도록 잊지 못할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2014년 봄부터 가을까지 계간 『자음과모음』에 연재된 작품이었다는 『토우의 집』. 7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나와 마주하게 된 이 소설은 어쩌면 우연이 아닌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써내려 가야 할까... 꿈틀거리는 긴 벌레처럼 보이는 마을 전경 때문에 삼벌레고개라고 불리는 마을. 아래, 중간, 윗동네의 빈부 격차가 뚜렷한 이 마을 중턱에 있는 우물집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물집 안주인인 순분은 동네 아낙들의 계주이자 낡은 집의 여러 방을 알차게 세 놓는 억척이다. 정은 있다지만, 드세고 남의 이야기로 입방아 찧기를 좋아하는 순분은 동네에는 꼭 한 명씩 있는 그런 말 많은 아줌마다. 그 집에 새댁네가 이사를 온다. 돈벌이가 시원찮은 남편과 영과 원이라는 두 딸을 둔 새댁은 한때 교직에 몸담았던 여인으로 단아한 지성인이다. 일곱 살 동갑내기인 은철과 원은 단번에 가까워진다. 동네 사람들의 비밀을 캐내는 스파이 놀이에 심취한 두 녀석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본명을 알아내어 벽돌 가루로 저주를 하는 깜찍한 못된 짓을 벌이기도 한다. 은철과 원의 시각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세상은 신선하고 새롭다.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 속에 그들의 삶은 조금씩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아주버님에게 생활비를 얻어 집으로 돌아오던 새댁과 둘째 딸 원. 원은 버스에서 멀미했는지 그날 먹은 모든 걸 토하고는 개운함을 느낀다. 난생처음 남에게 손을 벌린 새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속 끓는 엄마와 느긋한 딸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한다. 순분에게는 재앙이 닥친다. 금철이의 객기로 은철이는 크게 다쳐 다리를 절게 된다. 그런 은철이를 새댁과 원이 살뜰하게 보살피고 순분은 지난날 자신이 다른 이의 불행을 재미 삼아 입에 올린 죄로 가혹한 벌을 받았다며 후회한다. 여기서 끝이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새댁의 남편이 변고를 당하며 집안이 풍비박산한다. 어린아이들의 티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보아 즐겁고 유쾌했던 세상이 이젠 차마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참담하고 고통스럽게 일그러진다.
이 모든 일이 고작 1년 사이에 벌어졌다. 은철이와 원의 귀여운 스파이 놀이. 영을 좋아하는 금철이의 서툰 짝사랑. 다정하고 현명한 어머니였지만 남편을 잃고 무너져 버린 새댁. 철이 들어 집안일을 도맡고 동생 원을 잘 챙기게 된 영. 세 치 혀로 분란을 일으켜 뚜벅이할배를 죽게 한 통장 박가. 남편이 저지른 만행으로 고개도 못 들고 다니다가, 은철이가 불구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 온 동네에 욕을 하고 다닌 통장집 여자. 우물집에 닥친 어두운 기운을 견디다 못해 결국 그만두고 나가버린 난쟁이식모. 가만히 지켜본 마을 사람들의 1년은 행복했던 순간도 많았지만, 결말은 지독하게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권여선 작가는 이 작품을 두고 '긴긴 성장통과 함께 써 내려간 고통의 고백'이라고 했다. 그 고통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제삼자의 눈을 통해 그 고통을 완벽하게 그려내는 재주를 지닌 그녀. 투명하고 얇은 안전창을 사이에 두고 바라본 그들의 고통은 너무 생생하고 사실적이라 내 일인 듯 가슴이 아팠다. 권여선 작가의 의도가 이것이었다면, 성공했노라 전하고 싶다. 그녀가 전하려 했던 역사적 비극과 상처, 절절한 상실의 고통에 손끝이 아릴 정도로 깊이 공감했으니까. 『토우의 집』, 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