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곳에서
박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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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는 같은 곳에서

글쓴이: 박선우

펴낸 곳: 자음과모음 

 

 

 

 단편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뭔가 무르익으려 할 때 맥없이 끝나버리는 느낌이랄까? 긴 호흡으로 오래도록 음미하고 곱씹으며 결론을 향해 찬찬히 걸어가는 장편 소설을 좋아했더랬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짧은 이야기 속에 모든 걸 담아내야 하는 단편 소설이 더 쓰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괜찮은 단편 소설을 만나기가 어려웠는데, 요즘 작가님들 필력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이번에 읽은 박선우 작가의 단편 소설집 『우리는 같은 곳에서』는 탄탄한 구성은 물론 훔치고 싶은 문장이 가득하여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

 

 

 

'그 사람을 만난 날이 떠오른다.

...

그 기억의 편린들은 좀처럼 휘발되지 않을 것 같고, 어느덧 나의 일부로 스며든 듯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왜 어떤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찾아와 남은 생을 고스란히 들여도 소거할 수 없는 얼룩을 남기고 떠나버리는 것일까.

어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 p11

 

 

 첫 번째 이야기 <밤의 물고기들>의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부터 충격이었다. 이 작가 대체 뭐지? 일반적인 감성으로는 토해낼 수 없는 특유의 묵직함을 머금은 문장은 비의 계절인 여름밤에 더없이 아름다웠다. 약간의 쓸쓸함과 고즈넉함까지. 프리랜서 북디자이너이자 5년간 동거한 동성 애인과 결별하고 세계를 떠돌아 돌아온 한 남자와의 짧지만 강렬했던 술자리, <밤의 물고기들>. 18년지기 친구와 어이없이 틀어진 영지가 10년 가까이 친구로 지내는 옛 남친에게 도둑이 들었다고 연락한다. 그 연락에 아내와 함께 당장 달려온 남자. 이건 대체 무슨 상황? <우리는 같은 곳에서>. 69년 만에 기록적인 장마였던 그해 8월, 5년 전에 연락 두절로 헤어진 애인이 나타난 기적 같은 이야기. 근데 너 사람 맞니? <빛과 물방울의 색>. 이별 후 괴로운 여자의 일상이라고 할까? <느리게 추는 춤>. 두드러기 때문에 병원에 간 주인공이 5년이 지난 후에 도착한 옛 애인의 편지에 추억을 곱씹는 <그 가을의 열대야>. 말다툼 후 가출한 남동생을 찾아나선 누나. 남동생이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속 주인공을 찾아나섰다가 뭉클한 사연을 알게 되는 <고요한 열정>.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은수와 공항에 마중나온 남자 친구의 이야기 <소원한 사이>. 방학 중에 인턴으로 근무했던 출판사에서 만난 친구 지수와 8년 만에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추억을 되새긴 <휘는 빛>. 8가지 이야기가 마치 사이 좋은 친구처럼 도란도란 속삭이며 내 마음을 두드린다. 우리는 언젠가 꼭 만나기로 되어 있던 사이인 것처럼 가슴 깊이 스며드는 이야기.

 

 

 

 

 동성간의 연애담이 소설 곳곳에 등장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박선우 작가가 남긴 작가의 말을 읽고 깜짝 놀랐다. '끝으로 요즘 나를 가장 살아 있게 만들어주는 한 사람, 남자친구 J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와, 멋짐 폭발! 작가의 말에 이 한 문장을 싣기까지 얼마나 고심하고 망설였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사랑에 당당한 모습에 감동! 역시 박선우 작가는 좋은 의미로 참 특별하다. 아름답고 감성 가득한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속 깊은 옹달샘에 물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것처럼 잔잔한 감동이 온몸을 감싸는데, 그 느낌이란 정말 캬아! 종종 사용한 '기억의 편린'이란 단어마저 멋스러워 적어두었던 기분 좋은 시간. 앞으로도 좋은 글을 많이 써주시길! 꼭 챙겨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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