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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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레몬

글쓴이: 권여선

펴낸 곳: 창비

 

 표지에서 느껴지는 부들부들한 느낌이 좋다. 카메라 초점을 잘못 맞춘 듯 뿌옇게 찍힌 레몬이 선명한 검은색 표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어 마치 레몬이 두둥실 허공으로 떠오를 것만 같다. 1996년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는 권여선 작가. 오래도록 책을 읽다 7, 8년이라는 오랜 공백 후에 다시 책에 푹 빠져 살게 된 나에게 권여선 작가라는 이름 세 글자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책벌레 이웃님들의 열성적인 환호에 대단한 작가인가보다 했을 뿐. 그럼 왜 난 이 책 『레몬』을 읽기로 했을까?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책 뒤표지에 실린 짧지만 굵직한 네 줄의 글. 그저 그 글이면 이 책을 선택하기에 충분했다.


2002년, 언니가 살해됐다.

누군가 봄을 잃은 줄도 모르고 잃었듯이 나는

내 삶을 잃은 줄도 모르고 잃었다.

레몬, 레몬, 레몬, 복수의 주문이 시작되었다.


 한일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던 2002년, 미모의 여고생 해언이 살해된다. 집에서 입던 편한 차림으로 머리에 큰 상처를 입은 채 공원에서 발견된 사체엔 성폭행이나 다른 폭행의 흔적은 없었다. 해언의 죽음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의 삶 역시 가파르게 무너져 내린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에게 충격이었던 해언의 죽음. 그들의 너덜너덜 조각난 삶을 대변이라도 하듯 소설 역시 조각조각 시간의 파편을 더듬으며 어렵사리 이야기를 이어간다. 해언이 죽은 2002년, 2006년, 2010년, 2015년, 2017년 그리고 마지막 2019년. 소설은 해언의 동생인 다언, 해언의 동창이자 다언의 선배인 상희, 해언을 죽도록 미워하던 태림, 이렇게 세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묵묵히 언니를 죽인 살인범을 쫓는 다언, 우연히 만난 다언을 보고 옛 추억을 떠올리는 상희, 미친 사람처럼 해언이 죽은 사건 정황을 내뱉는 태림. 해언이 죽은 지 17년이 흘렀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해언은 여전히 살아 있다. 비밀이 많은 소설 『레몬』은 절대 모든 것을 쥐여주지 않고 해언을 죽인 범인이 누군지 오롯이 짐작하게 만든다. 사실 누가 죽였는지는 알겠지만 '어떻게'와 '왜'라는 범행 수법과 동기가 모호하기에 읽고 나서도 속이 후련하지 않아 마음 한구석이 어지간히 찜찜하더라는...


 권여선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이미 떠나버린 사람을 도저히 놓을 수 없는 남아 있는 이들의 삶. 무엇하나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은 상황 속에 누구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음을 꼬집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누구든 결국 죗값을 치르게 된다는 것? 곧 끊어질 듯 내리는 가랑비가 어느새 옷을 적셔 놓는 것처럼 남아 있는 이들의 삶은 복수와 슬픔 그리고 공허함으로 물든다. 과연 이 소설에서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죽은 해언도 복수한 다언도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상희도 모두 '우리'와 너무 닮아 가슴 아픈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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