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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시화집
가네코 미스즈 지음, 조안빈 그림, 오하나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제목: 내가 쓸쓸할 때 (가네코 미스즈 시화집)
옮긴이: 오하나
그린이: 조안빈
펴낸 곳: 창비
♬ 이웃집 살구 ♬
꽃은 죄다 보였습니다.
비 오는 날도, 달밤도, 있었습니다.
떨어지면 팔랑팔랑 담장 넘어서
목욕물 위에도 떴습니다.
잎 그늘 쪼그만 열매일 적엔
새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익어서 새빨갛게 될 무렵은
언제나 올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건
살구 두 알이었습니다. ♬♬
아이처럼 순수하고 톡 건들면 은은한 들꽃 향기가 풍길 것 같은 시집을 만났다. 1923년, 스무 살 가네코 미스즈는 잡지에 시를 발표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젊은 동요 시인 중 거성'으로 손꼽히며 193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0편의 시를 남겼다. 여기까지가 책날개에서 알 수 있는 시인의 삶이었다.
한국어로 번역하고 예쁜 그림 옷을 입혀 출간한 시화집. 젊은 시인 가네코는 언덕 위에서 우연히 보게 된 별똥별처럼 내 가슴에 반짝 들어왔다. 동요로도 불린다는 그녀의 시는 아이가 콩콩 발자국을 찍으며 나아가듯 행과 연에 리듬이 실려 있다. 한없이 아늑하고 맑디맑은 고운 시어를 연둣빛 풀꽃이 피어나는 벌판, 높고 푸른 하늘이란 종이에 오종종하게 늘어놓은 시인, 가네코. 그녀가 담담하게 전하는 시에서 때로는 누가 내 심장을 움켜쥔 듯 묵직한 욱신거림과 이른 새벽 호수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고즈넉한 쓸쓸함이 느껴진다. 문장을 과하게 꾸미려는 욕심 없이 그저 소박하고 편안하여 한참을 다시 보고 낮은 목소리로 읽어보게 되는 그런 시. 그렇게 가네코의 시는 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시에서 느껴지는 감성과 마음이 예뻐서 가네코 시인은 곱디고운 인생을 살았을 것만 같았는데 '옮긴이의 말'에서 슬프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부가 강요한 정략결혼, 방탕한 남편과의 불화, 생활고, 건강 악화, 남편의 창작 활동과 편지 쓰기 금지 등... 젊은 나이에 온갖 불행과 고초를 겪던 가네코는 결국 향년 27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행복하게 시집을 다 읽고 나서 시인의 아픈 인생을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아픔이 있었구나. 이렇게 순수하고 예쁜 시를 남겼건만 정작 당신 속은 남모를 고통으로 문드러졌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하염없이 슬프고 서러웠다. 가네코의 삶을 마주한 후 다시 읽어본 시집은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행복은 더 크게 슬픔은 더 깊게, 잔잔하게 흐르던 모든 감성이 더욱 진하게 배어 나오더라. 어쩌면 모르고 살았을 우리 두 사람은 『내가 쓸쓸할 때』라는 시화집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손을 마주 잡았다. 가네코에게 부디 평온한 천국에서 이제는 편히 쉬기를.... 88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당신의 시는 사랑받고 있노라고 그러니 당신은 충분히 행복해도 된다고 전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