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레이첼이다.
물론 부모님이 지어주신 본명은 따로 있지만, 영어를 인생에 받아들인 순간부터 내 이름은 레이첼이었다. 나와 레이첼이란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입안에 감도는 '레이첼'이라는 그 발음이 달콤하게 톡 터지는 체리처럼, 때로는 쌉싸래하게 맴도는
쓴 커피처럼 점점 더 애착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알게 된 청천벽력 같은 소식! 우리나라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내 이름은 '레이첼'이 아닌
'레이철'로 표기해야 옳다는 것. 내 이름 내놓으라고 국립국어원에 쫓아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레이철'이라니. 무슨 철의
여인도 아니고. 내 이름 돌려달라! 아직도 '철'자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어쨌든 지금은 레이철일 수밖에 없음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다.
세상의 모든 레이첼 여러분 잘 있나요? 우리는 이제 레이철이랍니다. 이름으로 한풀이할 곳이 없어 딴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오늘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건 내가 만난 또 다른 레이철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추락한 이유>라는 데니스 루헤인의 신작을 통해 나와
이름이 같은, 심지어 나이도 비슷한 레이철을 만났다. 데니스 루헤인이 누구던가?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원작인 <살인자들의
섬>을 쓴 작가라고 하면 아마 얘기가 제일 빠를 것이다. 누군가 깊은 곳에 숨겨 둔 고통과 일말의 부끄러움까지 철저하게 꿰뚫는 심연의 눈을
가진 작가. 그가 전하는 레이철이라는 한 여인의 인생. 당신이라면 거부할 수 있을까?
특별히 관리하진 않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손톱 아래로 주름진 손가락과 조금 굵은 손마디가 이어진다. 그 손 뒤에 한 여인의 절망 가득한 눈망울이 깔려 있다. 모든 걸
포기한 듯 희망은 사치라고 말하는 얼굴. 하지만 지그시 바라보고 있노라니 여인의 눈은 간담이 서늘할 만큼 차갑고 경멸과 분노라는 감정마저
떠오른다. 맙소사, 레이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누군가에게 낚아채 깊고 깊은 구렁텅이로 추락하듯이 난 그렇게 표지 속 여인, 레이철의
인생으로 빠져들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엄마와 살며 늘 아빠를 그리워한 레이철. 워낙 어렸을 때 헤어진 터라, 기억에
남는 아빠와의 추억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나마 생각나는 거라곤 아빠의 이름이 '제임스'였다는 것 정도다. 아빠의 성을 끝내 알려주지 않은 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엄마를 원망하며 레이철은 사설 조사 기관에 아빠를 찾아달라고 의뢰하고 그때 브라이언을 처음 만난다. 너무나
정직했던 사설 조사 기관 직원 그리고 너무나 절박했던 의뢰인. 브라이언과 레이철의 만남은 이렇게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끝난
듯했다. 결국 아빠를 찾지 못하고, 일상에 전념한 레이철. 그녀는 언론사 기자로 이름을 날리며 더 큰 성공을 위해 자연재해와 폭동으로 아수라장이
된 아이티의 특파원으로 나서는데, 세바스찬과의 행복하지 않았던 결혼생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긴장된 나날, 아빠를 찾지 못했다는 실망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티에서 살해당한 여자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방송 도중 돌이킬 수 없는 공황 발작을 일으킨다. 레이철의
인생은 실패자라 낙인찍힌 채 그렇게 끝나버리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오래전에 만났던 브라이언과 재회하며 레이철은 공황 발작을 극복하고 새로운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이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끝이라면 너무 시시하지 않은가? 역시 작가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거부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모두를 빨아들인다. 이제 됐구나, 행복하구나 싶은 순간부터 진짜 이야기는 시작이다!

이 책을 읽으며 참 신기한 경험을 했다. 레이철의 감정과 상태에 따라 소설의 속도는 더디 흐르거나 빨리 흐르며 이야기에 집중할수록 심장이
널을 뛰더라. 아빠를 찾다 좌절하고 경력에 타격을 입은 레이철이 이혼 도장을 찍고 자포자기하는 순간은 시간이 너무나 더디 가서 이렇게 지겨운
제자리걸음이 있을까 싶었다. 제발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레이철만큼이나
나도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지! 그 순간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난 브라이언에게 반하고 마음을 내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레이철과
브라이언에겐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연결해준 가는 끈이 있었기에 사랑이란 운명은 더디 왔을 뿐 원래 정해져 있던 상황. 브라이언이라는 완벽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순간에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어쩌면...'이라는 석연치 않은 의심이 역시나 사실로 벌어지는 순간,
나는 '대체 왜!'라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왜 불행은 이미 방문한 곳에 또 찾아오는가! 하지만 우리의 레이철은 약하지 않았다.
<툼레이더>급 여전사는 아니지만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처럼 놀랄만한 액션을 선보인다. 마무리는 한국 영화
<도둑들>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비록 브라이언으로 인해 꼬일 대로 꼬여버렸지만, 레이철은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 멋진
한탕의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거듭난다. 불과 몇 문장 차이로 지옥과 천국을 오가게 하는 작가의 끊임없는 히든카드에 대체 이 소설의 끝은
어디일지 식은땀을 흘리며 책을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이긴 하지만, 그 안에 알알이 박힌 분노, 절정, 탐욕, 복수, 살인, 사기,
폭동, 공황 장애, 파탄 등의 요소를 생각하면 그저 단순히 범죄 소설이라 단정 지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골자는 사랑! 도서 띠지에
담긴 AP의 세 줄짜리 감상평이 정말 딱 들어맞는 소설이었다. 같은 인물일까 싶을 정도로 시시각각 변해가는 레이철의 모습을 보며, 내 안에는
과연 몇 명의 자아가 존재할지 궁금했던 시간. 다중인격이 아닌, 여러 감정에서 나타나는 자아 말이다. 줄다리기처럼 팽팽하게 펼쳐졌던
<우리가 추락한 이유>는 이제 끝났지만, 손끝까지 전해지던 그 깊은 절망과 분노, 놀람과 환희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내 가슴을
뛰게 할 것만 같다. 레이철, 가던 길 무사히 가고 있니? 부디 이번엔 진짜 행복을 찾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