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파단자? 책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파탄'은 익숙한데, '파단'이라... 그 의미를 어렴풋이 유추할 순 있지만,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도록 검색해보자
파단 破斷재료가 파괴되거나 잘록하여져서 둘 이상의 부분으로 떨어져 나가는 일.
화제의 베스트셀러 <앨리스 죽이기>의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의 신작이라 상당히 기대가 컸던 <기억 파단자>. 이 소설은 두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니키치와 사람의 기억을 멋대로 조작하는 살인마, 키라. 우리의 주인공 니키치는 과연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이 살인마의 존재를 눈치챈 걸까? 낯선 방에서 눈을 뜬 니키치는 오로지 자신이 적은 노트에 의존하여 상황을 파악하고 또 파악하기를 반복한다. 수십 분 후면 기억이 싹둑 잘려나가기 때문에, 매번 새롭게 그 상황을 맞이하는 니키치도 답답해 죽을 노릇이지만 보고 있는 나는 더 속이 터진다. 니키치를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도 잠시, 곧 살인마 키라의 시점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이런 미친 자식, 정말 극악무도한 살인마다. 신체를 접촉하여 멋대로 상대의 기억을 조작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끌어간다. 그저 돈을 훔치고 폭행하는 정도로 끝났어도 괘씸할 지경인데, 키라라는 이 자식은 여성을 노리개처럼 희롱하며 끔찍하게 살해할 뿐 아니라, 부딪치거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별거 아닌 이유로 밥 먹듯이 살인을 반복한다. 그 잔인함과 당당함이 너무 거슬려서 키라만 등장하면 눈살을 찌푸리게 되더라. 다시 생각해도 참 나쁜 놈이다!
기억상실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도 살인마와 맞서 싸우는 의로운 니키치와 인정 없는 살인마 키라와의 대결은 사실 손에 땀을 쥘 만큼 흥미진진하지는 않지만(니키치의 기억이 자꾸 끊어지는 탓에...), 묘한 긴장감과 호기심으로 인해 어서 결말을 알고 싶어 쉬지 않고 책장을 넘기게 된다. 가독성이 탁월하여 424페이지라는 숫자가 무색할 만큼 빠르게 마지막 장에 도달하지만, 결말을 맞이한 순간 과연 올바른 트랙을 따라 이 질주를 끝마친 건지 불현듯 솟아오르는 의구심. 나는 니키치를 아니 이 상황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키라가 나쁜 놈인 건 확실한데... <기억 파단자>의 모호한 결말로 인해 책을 다 읽고 30분은 멍하게 있었던 것 같다. 열심히 달려왔건만, 대체 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소설에 앞서 다른 이야기가 또 있다는데, 그 책과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 이해가 되려나? 함께 읽은 다른 이웃님들과 이야기해봐도 결론이 나지 않는 상황. 으으... 답답하다. 그런데도 누군가 이 책을 읽어도 되겠냐 묻는다면 난 강력 추천이다. 비록 알쏭달쏭한 결말로 인해 니키치 만큼이나 내 머릿속도 복잡해졌지만, 키라를 쫓고 사건을 해결하는 니키치의 행보가 상당히 흥미롭고 신선하니 꼭 읽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 왠지 후속작도 나올듯한 분위기다. 니키치, 내가 꼭 진상을 알아낼 테니, 조금만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