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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평점 :

책을 받자마자
눈에 띈 띠지의 강렬한 문구. 뭔가 굉장히 전투적인 느낌이라 호응보다는 약간의 거부감이 앞섰다. 이거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글은 아닐지 살짝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미 읽은 독자들의 평이 상당히 좋았고 아직 읽지 못한 관심 도서인 <섬에 있는 서점>을 쓴
작가의 신작이기에 기대가 컸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읽기 시작한 <비바, 제인>. 결론은 너무너무 좋았다. 어찌 보면 무겁고
풀어내기 힘든 주제를 추의 균형을 잘 잡아 거부감 없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풀어내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며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놀랐던 시간. 여성, 특히 기혼자에게 불편할 수도 있는 이 주제는 묘한 동질감을 끌어내며 주인공과 주변 사람을 응원하게 되는 마력이
있다.
다섯 개의 챕터로 이뤄진 <비바, 제인>. 레이철, 제인, 루비, 엠베스, 아비바.
이렇게 다섯 여인이 등장하는데 각자 화자가 되어 풀어내는 다섯 이야기가 다른 물줄기처럼 흘러가다 결국 한곳에 모여 큰 강을 이룬다. 일단 소설의
첫 장을 여는 레이철의 이야기부터 살짝 엿보자. 레이철은 의사 남편과 대학생이 된(이야기 시작 시점에서...) 딸을 둔 중년 여성이다. 교직에
오래 몸담고 있던 그녀는 교장으로 승진하여 이제 안락한 노후 생활만 남은 듯,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간다. 하지만, 그건 폭풍의 전조였을까?
하나뿐인 외동딸, 아비바가 중년의 하원 의원 레빈과 불륜 관계에 빠져들고 레이철은 그런 딸을 구해내려 발버둥 친다. 더 기가 막힐 노릇은 그
하원 의원 레빈이라는 놈은 예전에 같은 건물에 살았던 이웃! 결국, 레이철은 딸을 위해 레빈의 부인인 엠베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로 하고 사건을
일단락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레빈 의원과 아비바의 불륜 관계가 들통나고 세상은 레빈이 아닌 아비바에게 마녀 혹은
창녀라는 낙인을 찍어 죽도록 열을 올리며 지겹게도 아비바의 목을 죈다. 과연 아비바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하원 의원인 레빈과 선거 캠프 인턴이있던 아비바의 스캔들은 우리가 이미 경험했던 여러 성 추문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 책에서도 언급한 빌
클린턴과 르윈스키 사건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떠들썩한 여러 정치인과 여인의 공방전까지 굳이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사건들. <비바,
제인>이 이런 한낱 가십을 파헤치고 수다쟁이의 심심풀이 땅콩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면 아마 졸작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 소설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아비바가 오로지 가해자로만 낙인찍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려 해도 좌절해야만 했던 2차 가해에 관해 이야기한다. 클릭 한 번이면 모든
걸 알아낼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아비바에게 '잊힐 권리'란 그림의 떡. 모두 아비바를 손가락질하며 수군댄다. 한편, 부인인 엠베스의 용서를 받고
국민 앞에서 사과한 레빈은 10선 의원으로 거듭나며 승승장구하는데, 이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인가! 왜 사람들은 '저 여자가 먼저
유혹했어요'라는 말에 남자에게는 면죄부를 여자에게는 가시관을 씌우는지 모르겠다. 물론, 가정이 있는 남성과 관계를 맺은 아비바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분명 그 부분은 아비바의 잘못이지만, 그녀는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였고 이젠 그런 관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그런 아비바에게 돌을 던질 자는 과연 누구인가? "Everyone has a skeleton in the closet.",
누구나 옷장 속에 해골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즉,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는 뜻이다. 어쩌면 불륜을 저지르고도 뻔뻔한 레빈이나, 바보 같은 선택으로 그런 실수를
저지른 아비바보다 이러쿵저러쿵 남의 일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는 우리, 제삼자들이 더 추악한 가해자일 수 있다. 결국 이 사건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엠베스이니 모두 쉿 입 다물 것! 그리고 아비바도 이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이제 그만 불필요한 관심은 거두고 그 사람도 살게
해주자.
<비바, 제인>은 자칫 지나친 페미니즘으로 상대하거나 마녀사냥이 될 수 있는 이런 주제를
재밌고 흥미진진한 소설로 풀어내어, 아무렇지 않게 2차 가해를 저지르는 무심한 모든 이에게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권고하는 작품이다. 여러
여인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그들의 인생과 하나로 연결되는 사건 이야기는 독자가 잠시 딴생각할 겨를 없이 책에 푹 빠져들게 만들어 십여 년에 걸친
사건 전후를 순식간에 넘나들게 한다. 가독성이 좋아 금세 읽을 수 있는데, 원문이 좋은 건지 번역을 잘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궁금하다.
아마 원문과 번역 모두 훌륭한 게 아닐까 싶은! <비바, 제인>은 원서로 읽어 봐도 어렵지 않고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된다. <비바, 제인> 원서와 작가의 전작 <섬에 있는 서점>을 잊지 말고 꼭 챙겨 읽자. 깊어가는 가을 재밌는 소설을
읽고 싶거나 요즘 뉴스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못난 추문이 지겨운 분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