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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 - 18세기 이탈리아 귀족 계층의 성과 사랑 그리고 여성
로베르토 비조키 지음, 임동현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고급스러운 자줏빛 표지와 멋지게 차려입은 귀족 남성의 모습에 괜스레 가슴이 설렌다. <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라는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이 귀족 남성의 신분은 '치치스베오'다. '18세기 이탈리아 귀족 계층의 성과 사랑 그리고 여성이라는 문구'에 마음을 뺏겨 이 책은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불타는 열정으로 544페이지의 두꺼운 벽돌책을 완독! 쉽진 않았지만 즐거웠던 치치스베오와의 시간을 떠올리며 마지막 장을
덮을 땐 맥주 한잔으로 자축까지 했다는... 자, 그럼 치치스베오의 세계로 다시 빠져보자.

'치치스베오는
누구였는가?'
치치스베오는
귀부인의 거의 모든 활동을 챙기고 돕는 시종기사였다. 18세기, 프랑스에 의해 이탈리아까지 퍼진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이전까지 사회생활
없이 집안에만 귀속됐던 여성의 자유가 허락된다. 여성에 대한 예의를 강조하고 환심을 사려는 태도인 '갈랑트리'가 성행하며 결혼한 여인에게 남편이
아닌 이성을 대동하는 일이 합법적으로 허용되며 치치스베오라는 신분이 탄생했는데, 치치스베오는 귀족 학교를 갓 졸업한 애송이 귀족 청년이 맡는
경우가 많았으나 나이 제한이 없어 중년의 치치스베오도 있었다고 한다.
'귀족 청년과 귀부인 그리고 남편에게 치치스베오란 어떤 의미였을까?'
치치스베오는 귀족
청년(주로 차남)이 귀족 사회의 어엿한 일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거치는 일종의 인턴 과정이었다. 따라서 치치스베오가 된 청년은 이미 귀족 사회에
익숙한 귀부인을 수행하며 그에 맞는 예법과 지식을 습득하고 일정한 비용도 지급받았다. 귀부인은 차를 마시거나 카드놀이 등의 사교 행사에 절대
홀로 참석할 수 없었는데, 남편이 늘 함께 대동할 순 없는 노릇이니 치치스베오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남편은 치치스베오를 아내의 보호자로
여겼으나 때론 질투와 의심으로 인해 불화가 일기도 한다. 치치스베오는 반드시 미혼 청년만 가능했던 것이 아니어서 남편 역시 다른 귀부인의
치치스베오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녀가 오랜 시간 붙어 있는데 불륜의 위험은 없었을까?'
시종기사 선택은 주로 가문
사이의 합의로 이루어져서 어느 정도의 믿음이 깔린 관계였다. 이는 성관계가 배제된 관습이었는데, 귀족이 스스로 통제를 잘했다기보다는 치치스베오가
성관계를 통해 실질적으로 얻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가 상상하는 그런 불륜 행위는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꾸 보면 당연히 정들고
마음을 열게 되는 법! 깊은 관계를 즐기는 치치스베오와 귀부인은 분명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귀부인이 출산한 아이가 그 집안의 혈통이 맞는지 의심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치치스베오는 왜 사라졌을까?'
18세기, 성적으로 방종한 시기를 지나 19세기에 '수줍은 미덕'을 강조하는 시대 변화에
따라 가정과 여인의 정절을 중요시하는 물결이 일며 새로운 성도덕과 가족 윤리가 확산하여 불화를 조장할 수 있는 치치스베오라는 존재는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다.

<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를 읽으며 사실 짜릿하고 아슬아슬한 귀부인과 귀족 청년의 불타는 사랑 이야기도 슬그머니 기대했지만, 작가의 의지는
확고했다. 성직자도 치치스베오였다는 부분에서 이런 구절이 등장하는데...
'분명한 것은 결혼한 여성이든 그렇지 않은 여성이든 성직자와 맺는 비밀스러운
관계가
이 책에서 다룰 관심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p147)'
이 얼마나 확고한
태도인가! 작가는 '치치스베오'라는 존재를 철저하게 학술적으로 분석하는데, 그 의도와 방향이 목차에서도
잘 나타난다.
◈ 목차 ◈
1. 치치스베오는 누구였는가?
2. 계몽주의 세계 안에서
3. 18세기 사회 안에서
4. 치치스베오의 지정학
5. 에로티카 (전혀 에로틱하지 않음 ㅜㅜ)
6. 금지된 치치스베오
혹시나 '에로티카'라는
제목에 혹했다면 부디 실망하시지 말기를, 담담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대략적인 상황만 설명되니 귀부인과 치치스베오의 뜨거운 관계는 오롯이 독자가
상상으로 떠올릴 몫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치치스베오라는 미지의 존재를 알아가는 즐거움! 사회적 배경과 사상에 부합하여 치치스베오라는 신분이 어떻게 탄생하고 유지되었는지 귀한
역사의 한 줄기를 훑어볼 수 있고 17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더 나아가 전반적인 유럽의 사상과 분위기가 변화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각종 사례와 문헌 기록을 통해 그 시절을 고증하고 관련 그림 자료도 실려 있어 보는 즐거움이 두 배! 다만 주석이 원문에 충실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그림 자료가 앞부분에 집합되어 찾아보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결혼한 여인에게 어떻게
합법적으로 다른 이성의 접근이 허용되었는지 글을 읽으며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이게 과연 이성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여자든 남자든 각자 서로만 바라봐야 탈이 없는 법이거늘 각자 다른, 그것도 어쩌면 매력적인 이성이 눈앞에 왔다
갔다 하면 일이 터지지 십상! 그러니 현대판 치치스베오가 나타난다면 나는 결사반대다. (물론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는 소설처럼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분명 상당한 가치와 나름의 흥미가 있으니 인문학 혹은 역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듯! 두꺼운 벽돌책을 다 읽었다는 성취감도 상당하니 꼭 도전해 보시길 바란다.
18세기와 19세기의
성도덕 관념을 대비하는 귀족 노부인과 손녀의 대화가 담긴 모파상의 <옛 시절> 인용구를 끝으로 치치스베오와 아쉬운 이별을 고해본다.
<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 440과 441페이지에 실린 내용으로 성도덕 관념의 시대적 변화를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