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리 스탬퍼 지음, 박다솜 옮김 / 윌북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자식에게 책 사주는 게 낙이셨던 엄마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책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새까맣고 두꺼운 40권의 백과사전 전집이 내 책장에 꽂혀있었다. (그렇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 시절엔 백과사전 전집을 사는 집들이 꽤 있었다.) 전래동화 전집과 그리스 로마 신화 등등, 원래 있던 책을 밀어내고 마치 예전부터 자기 자리라는 듯 떡하니 버티고 있는 백과사전의 뻔뻔한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잠시 얼얼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학교 내내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던 그 사전, 사실 딸내미 공부 잘하라고 선물해주신 엄마의 바람만큼 그 사전을 잘 활용하진 못했지만 나름 즐겁게 읽긴 했다. 그래, 그때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대체 사전은 누가 만드는 걸까?"


 이렇게 갑자기 어린 시절의 추억 보따리를 푼 이유는 바로 이 책을 만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제작사인 "메리엄 웹스터"에서 20년째 사전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는 저자가 단어와의 지독한 사랑을 풀어낸 책인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책 소개 글만 읽었을 때는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직접 읽어보니 날 것 그대로인 그녀의 이야기는 뭔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 막혔다. 책이 재미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뭔가 엄청난 자신감과 카리스마 그리고 사람을 의식의 흐름대로 날려버리는 대단한 힘을 지녔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저자가 만들어내는 사전은 미국인들의 국어사전, 즉 우리에게는 영영 사전인 것 같다. 단어와 놀고 씨름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지만, 사전 제작에 20년이라는 세월을 고스란히 바친 저자가 풀어놓는 사전 제작 과정은 과연 이 직업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지, 원래부터 사전을 제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단어를 풀어내야 하는 직업인만큼 직원 대부분이 영어 전공자일 거라 예상했지만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사전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그녀의 이야기에 과연 저자가 숨은 쉬며 이야기하는 걸까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나의 흥미를 끈 것은 문법 이야기였다. 아이들에게 영문법을 가르치고 있는 내가 단어의 품사별 사용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던 순간이 종종 있었는데 저자와 동료들 역시 같은 문제를 겪고 있었다. 전치사라고 믿었던 단어가 결국은 부사가 될 수도 있고 이제는 정말 사용 안 할 거라 믿었던 단어가 다시 유행하며 사전에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 대체 단어의 주된 사용과 문법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좋은' 문법의 규칙들이 실제 사용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면 대체 출처가 어딜까?
대개는 저 옛날 죽은 백인 남자들의 개인적인 불호가 법문화된 것뿐이다.

그렇다, 영어는 결국 사람이 쓰고 퍼트리고 전달하는 언어이니 시대마다 그 시절의 저명한 인사나 유행의 선두주자가 말을 갈고닦은 모양이다. 국어도 역시 비슷한 변화 과정을 겪고 있으니 결국 언어는 다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아 그 부분이 조금 아쉬웠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이 저자는 인생 자체가 사전 제작인 인물이므로 지금 읽는 이야기가 저자의 직장생활이자 사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싶었다.


지금까지 내 일을 가장 잘 요약한 사람은 내 딸의 친구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하자,
그 애는 입을 떡 벌리고 말했다.
"세상에 맙소사. 제가 살면서 들은 제일 재미없는 일이네요"
그러나 그 일이 천국의 직업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맙소사, 어떻게 이렇게 살지?',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네.', '세상에 이런 직업도 있군.'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사전 제작은 가슴 뛰는 멋진 직업이며 꼭 해보고 싶은 일일 수도 있다.

 조금은 어려울 수 있는 이 책은 언어 자체로의 영어가 궁금한 사람, 영어 전공자, 사전 제작에 관심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극한 직업'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자그마치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단어와 지독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저자의 뚝심에 경의를 표하고, 더불어 이 책을 옮기신 번역가 박다솜 님께도 고생하셨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워낙 방대하고 심도 있는 이야기라 이걸 어떻게 다 번역하셨는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의 저자, 코리 스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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