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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일단, 오랜만에 정말 재밌게 본 책이다. 트렁크에 두 남녀가 나란히 앉아 무지개 뜬 하늘을 나는 표지는 뭔가 흥미로운 상상을 하게하는 그런 책이었다. 워낙에 평이 좋아 꼭 읽어 보고 싶은 책이었다. 이 책 전에 읽었던 조금은 무거웠던 책을 열흘정도 잡고 있어서 였는지, 하루만에 훌훌 읽어버린 이 책이 아쉽게 느껴지기 까지 했다. 단문으로 이루어진 문장이 많아 가독성도 좋았고, 중간중간 작가의 재치를 느끼게 하는 유머러스한 단어 선택도 이 책에 몰입하게 한 큰 이유중 하나였다.
나는 친절은 커녕 오히려 불친절한 판매 사원이었다. 나는 '고객님'이란 간지러운 말은 쓰지 않았다. 만약 꼭 써야 한다면 '님'을 빼고싶다. 고객! 이물건은 어떤가요? 고객! 당신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이 유모차입니다. -유모차판매원 그녀 온두-(page 24) 요 부분에서 얼마나 킥킥대고 웃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온두라는 여자아이(?)의 캐릭터가 내맘에 쏙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온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커져갔다.
이야기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잔인하게 구타를 당하고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름"이라는 남자와, 엄마, 아빠의 흉측하게 죽은 모습을 목격한 후 들피집이란 곳에서 사람같지 않게 살아온 여자 "온두"가 각자의 트렁크에서 만나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내용이다. 그들은 가슴속에 지닌 아픈 기억이 너무 커서, 그 아픔들을 이 넓은 세상에 풀어 낼수가 없어서 트렁크로 숨어 들었다. 름과 온두는 름이 만든 게임 '치킨차차차'를 하며 게임에 진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하나씩 이야기한다. 그 과거라는 것이 온통 암울하고, 아프고 힘든 것들이어서 소설속의 또 다른 소설을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아픔을 온두에게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름"과는 달리 온두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은폐하려고만 한다. 하지만 름의 가슴아프고 잔인했던 과거를 하나하나 알아 가면서 온두또한 서서히 그에게 마음을 열어 보인다. 그 큰 아픔을 그 어린 나이부터 겪어온 두 사람은 가슴속에 꽁꽁 숨겨 두었던 아픔과 진실들을 들춰 냄으로 인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서로 의지하게 된다.
내 머릿속을 빙빙 도는 어떠한 장면들이 있다. 장면들을 퍼즐처럼 맞춰 나가다 보면 완성된 과거의 그림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미송씨가 말한 대로 나는 가시두더지인지 모른다. 기억에 대한 과잉 방어를 하는 가시두더지 말이다. 그런데 그 뾰족한 가시는 누굴 향하고 있는 것일까. 외부 세계가 아닌, 바로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age 83)
아버지로 인해 자살한 름의 형. 그 형만을 제일 든든한 아들로 믿고 있었던 아버지는 형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지고, 죽음에 이르렀을때 름을 찾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을 보면서도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던 름..그의 가슴속 응어리가 얼마나 컷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언제가지나 트렁커로 살아 갈것만 같았던 름과 온두는 름이 아버지를 보내고 온날, 온두의 집 거실 카펫위에서 같이 잠이 든다. 그리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쫓으며 잠이 깬다... 이 하룻밤 으로 인해 그들의 트라우마를 이겨 냈기를 바래본다.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고 싶을때가 있다. 가끔 딸아이들도 좁고 사방이 막힌 공간을 쫓아 놀이를 할때가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만의 공간을 찾아 작은 몸을 우겨넣고 싶을때가 있다면 누군가와 내 속에 담긴 이야기를 모두 풀어 놓으라고 말하고 싶다. 름과 온두처럼 서로를 이해해 줄수있는 그런 친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