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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6일 - 유괴, 감금, 노예생활 그리고 8년 만에 되찾은 자유
나타샤 캄푸쉬 지음,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는내내 미간에는 저절로 내천자가 그려지고 입술은 씰룩거리게 되고, 가슴에선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티비에서 보아오던 유괴의 결말은 항상 죽음이었다. 범인의 심리라고 했다. 자기가 얻고 싶은것을 얻었지만 결코 그 아이를 살려서 보내주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여기 나타샤 캄푸쉬라는 어린소녀는 성인이 되어 자신의 발로 그곳을 걸어 나왔다. 지난해 오스트리아에서 출간되어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유괴, 감금, 노예생활의 피해자 나타샤 캄푸쉬의 자전에세이 [3096일]. 이 책 속에는 그녀가 보낸 암흑의 8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고통스러웠던 8년의 세월을 버텨내어 극적으로 탈출한 용기(아마도 그녀에겐 그 8년이 내내 사지였을터)도 대단하지만, 그 암울했던 세월을 다시 기억해내어 책을 썼다는 자체가 더 대단하고 엄청난 용기와 망각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10살의 나타샤가 등교하던 어느날 아침, 항상 엄마의 차를 타고 등교하던 나타샤는 엄마와의 트러블로 인해 인사도 없이 혼자 등교하게 된다. "무슨 일이야 있겠어?" 하며 집을 나왔지만, 막상 혼자걷는 거리는 두려운것 투성이였다. 어쩌면 그녀의 불안한 심리가 표정과 몸짓에 나타났으리라. 그길로 그녀는 범인의 하얀트럭에 태워져 범인의 집 지하에 갇히게 된다. 5평방미터 남짓한 좁고, 어둡고, 쾌쾌한 냄새가 나는 지하실에서 보낸 8년. 10살이면 너무나도 어린 나이인데, 18살 성인이 될때까지 나타샤는 청소년기를 그 지하실에서 보내게 된다. 결벽증과 자기망상, 우울증에 시달리던 범인과의 동거아닌 동거. 범인과의 생활에 맞추어지는 나타샤의 생활을 보며 책을 읽다가도 깜짝 놀란다. 그러다 그래, 아직 어린아이니까 충분히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만들었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범인의 태도도 달라졌지만, 유괴되고 첫 1,2년 정도는 범인조차도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걸 볼 수 있었다. 단지, 어린아이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어둠과 굶주림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가장 불행한 상태에서도 스스로를 맞출 수 있다.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에게서 여전히 사랑을 보고 곰팡이가 핀 집에서 보금자리를 발견한다.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지하방이었고 나의 연고자는 범인이었다. 나의 세상은 파괴되었고, 그는 내 세계가 되어 버린 그 악몽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젖먹이 갓난아기가 부모에게 의존하듯 그렇게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91쪽)
그때의 고통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랫도리를 발로 걷어차인 후 얼마나 오랫동안 아팠었는지, 성난 그가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쳐 목뼈가 삐끗했던 일도 기억한다. 무수히 흘린 피와 벗겨진 피부, 찢어진 상처, 어디 한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던 내 몸을 기억한다.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경험한 후엔 육체가 기억하고 있는 공포와 유사한 어떤 위협의 아주 작은 신호에도 순식간에 밀려드는 공포감은 통제가 불가능했다.(170쪽)
범인과의 생활만을 기억하는 그녀에게 다른세상이 보일리 없었다. 범인과 함께 몇번의 외출을 했지만, 그리고 그 외출이 탈출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였지만 그녀는 공포로 인해, 그리고 탈출이 실패했을 경우 그녀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핍박과 폭력으로 인해 탈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18살이 되고난 후 어느날, 범인이 통화중인 틈을 타 극적으로 탈출하게 된다. 그 후 범인이 자살을 했다는 경찰의 말을 듣고난 후에야 그녀는 말한다. "나는 자유다." 하지만 길었던 8년, 그녀의 청소년기를 앗아가 버린 그 암흑같은 시간들을 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실제로 그녀가 미디어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그 관심은 그녀를 위한 관심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이기적인 관심과 그녀를 향한 편견과 선입견이 그녀를 또 다른 암흑의 세계로 빠뜨리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과거를 잊기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저 지켜봐 주기만을 바랄뿐이다.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요즘 청소년들의 탈선이 대부분 평탄치 못한 가정생활의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타샤 역시 엄마와 아빠의 나빴던 관계로 인해 평탄치 못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날 그녀가 혼자 등교하지 않았다면 이 지옥같은 8년은 그녀에게 꿀같은 8년이 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