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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불 - 존재에서 기억으로
츠지 히토나리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츠지 히토나리 라는 작가를 알게 된건 '냉정과 열정사이' '사랑후에 오는 것들'이란 책을 통해서다. '사랑후에 오는 것들'이란 책은 우리나라의 공지영 작가와 공동 제작한 작품이었기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 작품 중에서도 난 '냉정과 열정사이'를 정말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한남자의 심리묘사를 책에 흠뻑 빠지도록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잔잔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잘 서술 했었던 책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 후론 츠지 히토나리 작가의 책을 읽어보진 못했다. 그 와중에 만난 책. 조금은 심오한 듯한 느낌의 <백불>이란 책을 처음 접했을땐 철학적이기도 하다고한 책소개에 혹여나 많은 생각을 해야하는 어려운 책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줍잖은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책은 철학적이면서도 너무나 쉽고, 잘읽혔으며 심지어 재미있기 까지, 그리고 한템포의 쉼표를 찍으며 내 삶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만드는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은 츠지 히토나리 작가의 온전한 상상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었다. 그의 외할아버지의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졌고 상당부분 사실적인 사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을 간단하게 정리 하자면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의 집안에서 태어나 전쟁중에는 철포개발을 했으며 전후에는 이런저런 농기구 발명가였던 '미노루'라는 주인공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일생을 잔잔하고도 속도감있게 써내려갔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쉼없이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질문과 숙제를 안겨주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데자뷰 현상' 즉, '기시감'을 남들보다 자주 느끼는 미노루. 그런 기시감을 느낄때마다, 미노루는 전생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사후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릴적엔 강물에 빠져죽은 형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으며 화장을 했던 다비가마에 갇혀 있을것 같아 몰래 가마를 열어보기도 했다. 잦은 기시감 속에서 미노루는 문득문득 흰부처를 보기도 했다. 자신에게 자주 보였기 때문일까. 후에 그는 흰부처, 즉, 백불을 제작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흰부처가 다시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잦아가는 의식의 틈 사이로 빛에 싸인 흰부처가 눈보라속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미노루는 반쯤 감은 눈꺼풀로 그 숭고한 모습을 바라 보았다. 극도로 쇠약해진 미노루는 두 번째 나타난 그 모습에 놀라지도 않았다. 부처의 눈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따뜻한 눈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모든것을 부처는 이미 알고 있었다. (134쪽)
아버지와 아들과 사랑하는 여인, 친구등의 죽음을 겪으며 미노루는 삶과 죽음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은 미노루에게 주어진 하나의 화두와도 같이 그의 삶에 붙어 다녔다. 천여구의 시체 뼈로 '골불' 제작을 하기에 이른 그는 죽음을 얼마 앞두고 서야 죽음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죽음이란 늘 곁에 있는 거란 생각이 듭니다. 살아 있는 것들 곁에 있는 것, 그것이 평온한 죽음일 것 같습니다. 길든 짧든 자기 삶이 다하는 곳에 죽음이란 입구가 있는것 같습니다." (39쪽) 작가의 할아버지는 모든 사람은 위도 아래도 없이 똑같이 평등하다고 생각했고 모두가 함께 극락정토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별 받다 죽은자나 박해를 받고 쫓겨난 자도 함께 하나의 불상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책 속 미노루역시 그러한 생각으로 골불제작에 온힘을 쏟은 것이리라. 미노루가 코흘리개 어릴적부터 평생을 마음에 담아 두기만 했던 여인과도 골불로 인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아니, 그녀와 하나가 되기위해 죽음에 이른것이 아니었을까. 사후의 세계가 궁금하긴 하지만 바쁘게 흘러가는 현세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하며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 깊이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자신의 삶에 대해 한번씩은 돌아보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뭔가 콕 찝어 말할 순 없지만 책을 읽는 내내 삶에 대한 왠지모를 숭고함이 느껴지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