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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톨
와타야 리사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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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와타야 리사의 작품은 잘 읽힌다. 재미있다. 너저분한 인생을 너저분하게 나열해 놓지도 않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어려운 철학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짓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쉽고 깔끔한 문장으로 이야기한다. 쉽고 깔끔한 문장으로 쉬운 얘기를 하면서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어려운 주제를 능수능란하게 담아내는 것이다.

그녀는 그런 작가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묵직한 주제를 다룰 줄 아는 작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들...  이야기들... 일상을 그대로 담은 듯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가 드라마처럼 이어진다. 이야기들 속에서 자연스레 주제가 떠오른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소설의 핵심이 무엇이는지 곧장 파악된다. 그녀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빛나고 아름다운 별들을 하나 하나 따라가다가 문득 그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별자리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는 것과 같다.  

그녀는 그런 작가다. 세공되고 다듬어진 보석 같은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작가다.  압축될수록 더욱 생기로운 빛을 발하는 보석 같은 문장들. 그녀의 문장을 읽다보면 가히 탄복을 내지를 수 밖에 없다. 열 일곱 살 소녀가 구사하는 문장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열 일곱 살 소녀이기 때문에 구사할 수 있는 문장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열 일곱이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것들을 작품 속에 충실히 반영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인스톨 이라는 작품은 와타야 리사가 아니라면 누구도 완성시킬 수 없는 작품일 것이다. 그녀만이 다룰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런 작가가 국내에도 있었으면 싶다. 고장난 컴퓨터를 인스톨하여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준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낡은 사고를 깨뜨리고 새로운 문학관으로 인스톨 된 새로운 작가가 국내에도 나타나 줬으면 좋겠다.

 너무 짧은 이야기라 내용에 대한 언급은 피하겠다. 읽기를 원한다면 그저 읽어보길 바란다. 다만 첫 문장을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 문장까지 한 번에 읽힐 것이라는 것만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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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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챈들러를 왜 하드보일드의 음유시인이라 부르는지 알고 싶으면 빅슬립을 읽어 보아라. 많이 읽을 필요도 없다. 서점으로 가서 맨 앞의 열 페이지 정도만 읽으면 된다. 그 열 페이지에서 충분히 챈들러 특유의 문체와 그 놀라운 직유법과 리얼리즘이 흠뻑 배어 있는 묘사에 탄복할 것이다. 또 주인공 필립말로의 매력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열 페이지가 아니라 350페이가 넘는 긴 문장들을 모두 읽고 싶어 질 것이다.

챈들러의 소설은 코난도일로 대표되는 본격추리소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흔히 떠올리는 탐정의 이미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냥용 모자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셜록 홈즈, 그리고 또 하나는 중절모를 깊이 눌러 쓰고, 트랜치 코트의 깃을 높이 세운 채, 한 손에 권총을 든 남자. 후자의 남자가 바로 챈들러가 탄생시킨 필립 말로다. 이 후 말로의 이미지는 다른 여러 추리소설에서도 등장하며 미국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느와르의 이미지로 각인된다.

빅슬립은 닷새동안 일어나는 이이기다. 그러나 그 닷새는 말로가 느끼는 바대로 독자에게도 일 년처럼 길게 느껴진다. 그 사이에 수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말로의 생명도 여러 차례 위협을 받는다. 그리고 최후에는 추악한 진실이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진실에 당도하게 되지만 셜록 홈즈나 포와로의 소설처럼 통쾌하거나 환호를 내지를 만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마치 바닥 장판을 뜯어 내어 그 안에 벌레들이 잔뜩 죽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다시 장판을 덮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많은 이야기들이 결국은 추악한 인간상과 비열한 도시의 진실을 보여주고, 그것이 그저 일상적인 일에 불과하다는 또 다른 진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귀결된다.

빅슬립이라는 제목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이 제목에 대한 의미는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진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가장 비정하고 냉소적인 주인공. 필립 말로를 알게 된다는 것 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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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kirim 2005-02-10 16:33   좋아요 0 | URL
학교도서관에 본 기억이 나는데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좋은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서운 밤
임영태 지음 / 문이당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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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의 소설에는 강인한 흡인력이 있다. 나는 그것을 그의 전작이자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를 읽으며 이미 느낀 바가 있다. 
그의 소설에는 변두리의 3류 인생들이 출현하여 너저분하고 칙칙한 인생담을 소주와 함께 풀어 놓는다. 그 이야기들이 한편으론 슬프고, 한편으론 우스꽝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무서운 것이다. 

임영태의 첫 소설집 '무서운 밤'에 실린 9편의 단편들은 모두 하나의 줄에 엮인 비릿한 생선들처럼 무언가 질척하게 통하는 것이 있다. 
너무도 잘 읽힌다. 
그리고 반전이 있다(!) 반전.... 
우리네 일상에도 반전이 있는 것일까? 
반전이라는 표현보다 황당무계함, 어처구니 없음, 뜬금없음 이라는 말이 더 좋을 것 같다. 추리소설의 반전처럼 통쾌하거나 감탄을 내지를 수 있을 만큼 멋들어진 그런 반전은 아닌 것이다, 
우리네 일상의 반전이란 것은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고, 우울하고, 어쩌면 반쯤은 예상되었으나, 그래도 막상 당하고 보면, 또 어찌 이럴 수가 있나, 하는 한탄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생의 아픔과 허무함을 적나라하게 들춰버리는 그런 무서운 반전인 것이다. 
임영태의 소설들에는 그런 반전들이 꼭 들어있다. 그래서 다 읽는 순간, 다시 한 번 읽은 내용을 생각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니 인생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일상은 돌아보게 만든다. 

그렇지, 우리네 일상이 그랬었지... 뭔가 대단한 것은 없었지... 이정도였지.... 그래. 이것이 일상이었지.... 삶이었지....

이런 반전과 변두리의 삶이 가장 잘 드러난 소설이 수록된 작품 가운데서 '포장마차'라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대신, 정말이지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기를. 포장마차에서는 결코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갑부 노인도, 귀인도, 첫사랑도, 은퇴하여 숨어 지내는 고독한 혁명가 따위도 거기엔 없다. 
하기야...... 아직은 모른다. 그런 건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기어이 포장마차로 들어간다. 그리고 소주를 한 병 깐다. 그리고 공상에 젖어든다. 무언가가 이루어 질 것이라는 기대에 젖어든다. 그리고 우울하고 우스꽝스런 반전이 펼쳐진다. 
슬픈 인생이다. 그리고 무서운 인생인 것이다. 
이러한 반전들이, 우울하고, 우스꽝스럽고, 한탄스런 반전들이 우리네 일상에서 길게 논의될 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라는 것이, 그저 무덤덤하게 지나가야할 또 하나의 일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무서운 것이다. 

'무서운 밤'
절박한 삶을 살아가는 변두리 인생들에게 권한다. 
아울러 그의 전작인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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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들의 미사
로렌스 블록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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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들의 미사는 솔직히 내용도 몰랐고, 이런 책이 있는 줄 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로렌스 블록의 작품을 검색해 보다가 알게 되었다. 로렌스 블록의 작품이, 그것도 장편이 국내에 출간되어 있다는 사실에 탄복을 금치 못했고, 즉각 책을 주문했다.
이 소설이 블록이 가장 애착을 가진다는 탐정 매트 시리즈 중의 하나라는 것과 92년 에드가 상 수상작이라는 것은 주문하고 난 다음에 알았다.
블록의 대표작인데다가, 최고 권위의 에드가 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이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다빈치 코드 이상으로 끌어올려 주었다.

소설은 마치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 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추리 소설로 분류되고 있지만 기존의 추리소설과는 확연한 차별성을 보인다. 탐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 탐정이라는 작자는 무면허에 알콜 중독자다. 전직 경찰이었던 지라 경찰 친구도 있지만 사람을 무자비하게 도살시켜 버리는 살인자도 친구다. 애인은 창녀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은 모두 특이하다.
탐정 개인의 성격을 따져 보자면 냉소로 일관했던 빅슬립의 필립 말로와도 좀 닮은 듯 하지만 매트는 말로처럼 혼자 행동하지 않는다. 혼자 다니는 일도 많지만 친구를 만나 식사를 같이 하고,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 소설의 최대 미덕은 끊이지 않고 첨예하게 이어지는 인물들의 대화 속에 있다. 대화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생동감이 넘친다. 때문에 시종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이 소설에 잡다한 묘사나 설명 같은 것은 거의 없다. 아멜리 노통의 소설처럼 90%가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대화 속에서 사건이 전개되고, 주제가 드러난다. 현대 사회의 추악한 이면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는 작가의 섬뜩한 칼날도 보인다.

스너프 필름이 소설의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한다. 추리 소설에 스너프 필름이라... 책에 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매트는 우연히 스너프 필름을 보게 되고, 그것을 제작한 살인마들을 쫓는다. 그러나 그가 의뢰 받은 일은 그것이 아니다. 지방 방송국 프로듀서의 아내가 살해되었는데, 그녀를 남편이 죽였는지 아닌지에 대한 조사를 의뢰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의뢰 받지 않은 일에 더 열의를 보이는 것이다. 악마들의 만행을 중단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어진다. 모든 사건들이 하나로 맞물린다. 그리고 라스트에는 대 반전이 펼쳐진다.
아, 더 이상 소설에 대해 소개하는 것은 위험하다. 스포일러가 발설될 수 있다.

추리, 스릴러, 혹은 호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그저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단, 책의 앞, 뒤표지에 실린 소개글 같은 것은 절대 읽지 말고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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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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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세번째 소설집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은희경의 모든 소설을 다 읽었다. 장편과, 소설집 모두를.

은희경은 한 때 정말 좋아했던 작가다.
특히 장편 '새의 선물'과 첫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에 실렸던 그녀의 초기 단편들을 좋아했다. 뭔가 사회에 반항적이고 삐딱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끝내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소설들이 좋았다. 새의 선물은 외딴 방과 함께 국내 성장 소설 가운데 최고의 수작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후로 은희경을 따라하는(그렇게 보이는) 작가들이 많이 등장했고, 그런 작품들이 난무했고, 심지어는 은희경 스스로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아우라에서 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은희경의 소설에 대한 느낌이 조금씩 시들해져 갔다. '그것은 꿈이였을까'와 '마이너리그'는 참 잘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소설이기도 했다. 실망은 안했지만 찬사를 보낼 수도 없는 소설들이었다.

상속에 실린 작품들 역시 그런 느낌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듯 했다.
잘 된 작품도 눈에 띄었다.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던 중편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 와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아내의 상자'는 확실히 수작이었다. 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기대감이 작용되어 더 꼼꼼히 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은희경 특유의 흡인력이 잘 느껴지는 소설들이라 재미있었다. 재미있게 잘 읽혔기에 좋은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표제작인 '상속'을 비롯하여 '딸기도둑', '내가 살았던 집' 등은 특이할 게 없었다. 물론 떨어지는 작품들도 아니었다. 그저 지극히 은희경스러운 소설들인 것이다.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 와 '태양의 서커스'도 그럭저럭 잘 읽혔지만 수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듯 했다. 은희경이라는 중견 작가가 쓴 소설치고는 평범한 정도였다.

이 책을 다 읽는데 9일이 걸렸다. 과거에 새의 선물을(400페이지에 육박하는 장편을) 이틀만에 다 읽었던 것에 비하면 이 신작 소설집에 그녀 특유의 흡인력과 감각이 얼마나 많이 사라졌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곧 그녀의 새로운 장편 소설 '비밀과 거짓말'이 출간된다고 한다.
나는 여전히 은희경의 팬이고, 그녀에 대한 기대감은 아직 두 손으로 쥐고도 남을만큼 넉넉히 남아 있다.
그녀가 새의 선물 같은, 혹은 그것을 뛰어 넘는 작품을 들고 나올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비밀과 거짓말이 그런 작품이 되어 주길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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