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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평점 :
박민규다. 박민규의 첫 소설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펠리컨을 타고 몇 억 광년 은하계를 비행하여 개복치 같은 지구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암수 구분이 없는 괴이한 몰골의 외계인 같은 그의 첫 소설은, 자신들이 발을 붙이고 사는 땅덩어리가 감히 개복치를 닮았다고는 짐작조차 못할 수수한 상상력의 지구인들이 보기에는, 어느 날 아침 지하철 역 벤치에서 양복차림으로 묵묵히 쉬고 있는 기린을 보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것, 이었을 것이다.
외계인보다 더 외계인 같은 외모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처음 작가의 사진을 보고 무언지 모를 무언가가 잘못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박민규라는 신예 작가는 2003년 여름, 나름대로 잘 정돈되어 있던 한국의 문단(文壇)을 향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던 원폭과도 같은 가공할 위력의 원, 투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는데 그 중 '투'에 해당하는 더 강력했던 펀치가 2003년 내내 문인들과 독자들의 입에 끊이지 않고 오르내렸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었다. 이 강펀치는 당시 문단과 도서계에 꽤나 큰 충격과 파장을 불러 일으켰으며 지금까지도 국내 문인들과 독자들은 그 휴유증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른 하나의 스트레이트, 즉 '투'보다 먼저 날렸지만 조금 약했던 '원'이 바로 오늘 소개 하고자 하는, 정녕 외계인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무지막지하고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무장된, 그냥 영웅도 아니고 바로 이 ‘지구’를 지킨다는 ‘영웅’들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
이름하여,
‘지구영웅전설’
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만화속의 영웅들이 대거 등장한다.
먼저 슈퍼맨,
그리고 배트맨,
으로 변신하기 전의 브루스 웨인,
로빈,
원더우먼,
아쿠아맨, 아쿠아맨, 아쿠아맨...
또 아쿠아맨,
그리고 특별출연 하는 헐크,
로 변하기 전의 브루스 배너 박사(이 자도 영웅인가? 소설을 읽어 보니 영웅이 맞더라...),
그리고 새로운 이름 바나나맨, 등등...
소설 속의 주인공은 포느로 잡지를 보다가 담임에게 들키고 얻어터진 후에, 부모님을 모셔 와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주인공은 자살을 결심한다. 평소부터 슈퍼맨을 동경해 왔었기에 슈퍼맨처럼 빨간 망토를 두르고 계모가 계단 청소부로 일하는 빌딩의 옥상에서 마치 슈퍼맨 놀이를 하다가 죽은 것처럼 위장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뛰어 내린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는다. 마침 대한민국 상공을 순찰 중이던 진짜 슈퍼맨에 의해 운명적으로 구출된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고, 주인공은 꿈에 그리던 슈퍼맨을 실제로 만난 것이다. 슈퍼맨 뿐만 아니라, 슈퍼맨을 따라 영웅들이 모여 사는 ‘정의의 본부’로 까지 가게 된 주인공은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 떨렸던 슈퍼특공대(80년대 초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만화영화)의 핵심 멤버들을 모두 만나게 된다.
영웅들은 정말로 영웅다운 모습으로 지구 곳곳으로 날아다니며 영웅이 해야 할 일들을 영웅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이에 탄복한 주인공은 자신도 영웅의 멤버가 되기를 갈망했고, 마침내 ‘바나나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새로운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영웅들의 실체가 하나씩, 하나씩 드러난다.
챕터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영웅들이 어떤 영웅적인 일들을 하는 지 (주로 바나나맨의 눈과 로빈의 입을 통하여)비밀스럽게 밝혀진다.
그 실체가 바로 소설의 주요 내용이 되고 주요 반전이 된다. 그러므로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이들을 위해 그 실체를 여기서 밝힐 수는 없다. 영웅들은 나름대로 역할을 분담하여 체계적이면서도 위력적이면서도 제법 합리적인 방법으로 지구의 평화를 지켜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절대적인 '힘'앞에서 우리의 바나나맨은 할 일이 없어진다. 고작해야 영웅들의 심부름이나 해 주면서 우스꽝스런 제스처만 꾸준히 연습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바나나맨이라는 영웅으로 재탄생되었듯 박민규라는 시인 지망생이자 전직 회사원이자, 전직 잡지사 편집장이자,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백수가 소설가로 재탄생해 주어서 감사하다. 그가 내지르는 문장들은 바나나맨의 제스쳐처럼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슈퍼맨 못지 않게 힘이 넘치고, 배트맨처럼 참 정의롭기도 하며, 비행하는 원더우먼처럼 유혹적이며, 아쿠아맨처럼 끝없이 분열되기도 하며, 헐크처럼 변화무쌍한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감사하다. 이런 문장, 이런 소설을 읽을 수 있게 해 주어서...
왜 슈퍼맨은 배트맨에게 대표의 자리를 넘겨주어야 했는지, 배트맨이 구사하는 마운틴이라는 기술은 무엇인지, 또 배트맨은 왜 배트맨 복장을 잘 입지 않는지, 왜 로빈은 배트맨을 싫어하는지, 원더우먼은 왜 투명 비행기를 타야만 하는지, 그리고 아쿠아맨은 왜 그리도 많은지, 또 브루스 배너 박사는 어떤 방법으로 협상을 원만히 타결짓는지 등등... 정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영웅들의 대단한 활약상과 그 실체가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읽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