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사랑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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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최고 매력남을 다시 만날 수 있어 기뻤다. 레이몬드 챈들러의 두 번째 장편 소설 '안녕 내 사랑아'를 통해서였다. 말로는 여전히 냉소적이고 비정했으며, 여전히 멋있었다. 이 친구의 일과를 따라가다 보니 탐정이라는 직업이 참 부럽기까지 했다. 

안녕 내 사랑아는 전작인 빅 슬립보다 더 잘 읽혔고 더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아름답고 애처로운 소설이기도 했다.

이 소설에는 사랑 하나에 모든 것을 바칠 줄 아는 순정파가 등장한다. 쇠처럼 차갑고 단단한 가슴을 지닌 비정한 우리의 주인공 말로와는 대조적인 인물이다.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나 눈물이나 질질 짜고 과장되게 감정을 자극하는 그런 진부한 로맨스가 연출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죽어가고, 폭력이 난무하고, 음모와 배신이 도사리는 가운데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가 진행되고... 비정한 어둠 속에서 옛 사랑을 찾아 떠나는 한 남자가 있고, 그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남자가 있고, 살인자가 있다. 살인자를 쫓는 경찰이 있고, 거짓말을 하는 노파가 있고, 부패한 경찰도 있고, 베일에 가려진 어둠의 세력들이 있고, 다시 힘겹게 옛사랑과 대면하는 남자가 있고, 변해버린 여자가 있다. 그리고 차갑고 무서운 사랑이 있고, 애처롭고 나약한 인간들이 있다. 그렇게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렇게 범죄가 진행된다.

 

이번에도 책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는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역시 일 년은 지나버린듯 많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많은 이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다 읽고 나면 말로와 거구의 사내가 만났던 첫 장면이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진다. 잊혀진 사랑의 기억이 꿈 속의 실루엣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듯...

챈들러의 문장은 얼음 조각처럼 차갑고 단단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물이 되어 녹아버리듯 짙은 허무와 슬픔을 자아낸다. 사랑 이야기가 전면에 녹아 흐르는 이 소설에 두 말할 나위없이 어울리는 문장들이다.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고, 하나의 범죄가 끝나도, 혹은 하나의 생명이 사라져도...

부패하고 비정한 세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삶도 계속되고, 사랑도 계속되고 있다. 잊혀지고 상처받는 것은 삶도, 사랑도 아니다. 시간의 굴레에서 버둥거리는 인간들일 뿐이다.

말로는 마치 불멸의 철학자처럼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그는 비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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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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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분명 김영하의 장편 대표작이 되어도 무방할 것 같다. 전작인 나는 나를... 이나 아랑은... 을 압도하는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그것은 작가적 내공이 심오한 자만이 뿜어 낼 수 있는 기운인데, 김영하는 검은 꽃을 통해 마침내 그런 고수의 반열에 올라선 듯싶었다. 
10권 분량으로 써도 무방했을 방대한 내용을 김영하는 한 권에 담아 냈고, 나는 이 책을 8일만에 완독했다. 읽는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김영하에 대한 기존의 선입견을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불편한 마음으로 첫 장을 열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어깨는 너무도 가벼워 졌다. 이런 작품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다. 재미있게 본 영화를 두번, 세번 감상하듯. 아니, 재미라기 보다도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 재감상을 부른다. 검은 꽃도 그랬다.   

애초에 검은 꽃에 별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는 과연 동인 문학상을 수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하는 의문도 품었었다. 의문이 아니라 의심일 수도 있었다. 언뜻 책장을 넘겨 보아도 따옴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따라서 대화가 없는 재미없는 소설일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어쩌면 그럴 것이라고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김영하의 전작들에서 등장한 캐릭터들이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 캐릭터들을 만들어 낸 작가조차도 탐탁치 않았기에 이번 작품도 재미없기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이 소설은 그런 나의 예측을, 혹은 기대를 완전히 배반했다. 

매스컴의 극찬대로 검은 꽃은 과연 근자에 출간된 한국 소설 가운데서 보기 드문 수작이다. 우선 압축의 미가 대단했고, 서사의 힘이 강렬했다. 물론 김영하 특유의 (개인적으로)짜증나는 캐릭터들은 여전히 소설 군데군데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이야기에 있다. 변화무쌍한 태평양의 파도처럼 끝없이 다른 모습으로 끈질기에 이어지는 이야기의 힘이 바로 이 소설의 힘이며 미덕이다. 이 소설은 방대한 역사의 이야기이며, 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수난 이야기이며,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이고, 사랑 이야기이다. 

책을 다 읽은 다음에 맨 앞장을 펼쳐 다시 첫 페이지를 읽으니 무언가 아련하고 가슴저리는 감정이 밀려왔다. 여명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별을 바라볼 때, 그 별이 강렬하게 빛을 발했을 지난 밤을 생각할 때, 그 때 느껴지는 감정과도 비슷했다. 
 

* 소설 속 캐릭터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는 역시 주인공인 김이정이었다. 소설 초반에는 참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중, 후반으로 흐를수록 점점 애정이 가는 캐릭터였다. 후반으로 갈수록 그의 한마디 한마디, 동작 하나 하나에서 배어나는 짙은 허무와 곧 사그라질 것 같은 들뜬 열망들이 가련함과 연민을 느끼게 했으며, 운명처럼 겪게 될 비극을 예견케 해 주어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소설을 다 읽고 다시 앞부분을 읽어보니 처음 읽을 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정의 초반 행동들에서도 연민과 애정이 느껴졌다. 정말 묘한 매력을 지닌 주인공이었다. 반면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캐릭터는 여주인공인 이연수였다. 그녀는 김영하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짜증나는 캐릭터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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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반점 - 2005년 제2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학사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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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은 과연 최고의 단편 소설에게 주어지는 상인가?

과거 깊고 푸른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숨은 꽃, 하나코는 없다 등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정말 최고의 소설이구나, 라고 감탄을 하면서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작들을 읽었었다. 소설을 많이 읽던 시절이 아니었고,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때는 과연 그런 작품들이 최고의 단편 소설들인 것 같았다. 참 어찌 이리 신기하게도 최고의 작품을 정확히 뽑아 상을 주고 많은 독자들에게 소개를 해 주는가... 심사위원들이 대단해 보였고, 소설가가 위대하게 보였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이상 문학상 수상작을 읽지 않게 되었다.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던 시절부터였다. 포우와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요시모토 바나나와 하루키의 소설을 죄다 구입해서 읽고, 토머스 해리스와 스티븐 킹의 소설들을 탐독했으며, 엘러리 퀸과 애거스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들에 열광했었다.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 생쥐와 인간 같은 소설들을 읽으며 과연, 이것이 최고의 소설들이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았었다. 대부분 외국 소설들을 읽었지만 젊은 날의 초상, 난쏘공 같은 국내 걸작 소설들도 읽었고, 김승옥과 손창섭, 양귀자, 신경숙, 은희경의 소설들을 읽으면서도 물론 감탄하고 만족을 했었다. 아무튼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이상문학상 수상집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까지는 그래도 끝가지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이상문학상 수상작을 끝까지 다 읽지 못 했다. 몇 번 그러다 보니 아예 관심을 끊게 되었다. 재미가 없었다. 감동도 없었다. 의심이 들었다. 이것이 과연 오늘날 최고의 단편 소설이 맞는가? 싶었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그랬던 것인가? 책을 많이 읽지 않던 시절이라 무슨 소설이든 다 재미있고, 대단해 보였던 것일까? 그러나 그게 아니다. 아닌 것 같다. 과거의 이상문학상 수상작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숨은 꽃, 하나코는 없다 등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감탄을 금치 못하고, 또 과연, 최고였다. 

요컨데 과거의 명성을 따라가지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의 이상문학상 수상작들이... 

작년에 김훈의 화장을 읽으면서도, 언론과 비평가들이 너무 극성스럽게 칭찬을 해댔던 탓인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이게 그렇게 잘 된 소설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올해는 정말 오래간만에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돈을 주고 구입했고, 작정하고 거기에 실린 모든 소설들을 읽었다. 그리고, 역시... 몽고반점. 이것은 작년의 화장보다도 더 못 한것 같다... 형부와 처제의 불륜이다. 그러나 별로 충격적이지는 않다. 엇비슷한 설정을 이미 다른 장르, 다른 매체를 통해 여러 번 봐왔기 때문일까.... 심사위원들의 말처럼 읽히기는 잘 읽혔다. 설정이 설정이니 만큼... 그러나 그것말고는 심사위원들이 한 말에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순수로의 회귀, 예술적 승화... 예술은 보이지 않았다. 예술가의 고뇌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본능을 주체하지 못 하는 이해할수 없는(혹은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인간들만 보일 뿐이었다. 정말 소설 같고,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잘 읽혔지만 읽는 내내 불편하고 불쾌했다.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나, 싶었다. 몽고반점보다 한강의 자선 대표작인 아기부처가 훨씬 나았다. 내가 이상문학상 심사위원이고 한강에게 상을 줄 것 같았으면 아기부처로 일찌감치 주었을 것이다. 한강의 전작 중에서 내 여자의 열매 라는 작품도 몽고반점 보다는 좋았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이상문학상 심사위원이 아니라서 그런지 몽고반점의 어디를 보고 그토록 극찬을 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그저, 역시... 과거의 명성에는 못 미치는 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이상문학상에 대한 내 기대가 또 한번 꺾였다. 이제는 과거처럼 심사위원들이 대단하게 보이는 일 따위는 없다. 역시,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다행히, 마냥 아쉽지만은 않았다. 한 줄기 희망이 있었다. 박민규의 소설 때문이다. 이번 작품집에 실린 소설 가운데 가장 빛나는 소설은 대상 수상작인 몽고반점이 아니라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였다. 실망스러웠던 이 작품집에 별점을 네 개나 준 이유는 바로 박민규의 소설 때문이다. 그의 소설이 없었다면 나는 이 작품집을 사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민규는 작년에도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라는 작품으로 우수상에 이름을 올렸었다. 왜, 이 작가에게 상을 주지 않는지 알 수 없다. 물론 몇 년 후에는 분명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해진 수순처럼 우수상에 몇 번 더 이름을 올리고 마침내는 대상을 수상하게 될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강도 그런 과정을 거치고 대상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꼭 그래야만 하는가... 몇 년이 지나면 과연 박민규의 소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완성도가 높고 좋아지는 것일까? 정말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아지는 것일까? 모르겠다. 한강의 경우 아기부처 이후 몽고반점까지 과연 어떤 발전을 보였기에 상을 준 것인지, 단적으로 몽고반점이 아기부처보다 얼마나 더 잘 된 작품이고 얼마나 더 이상 문학상에 부합하는 작품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이상문학상 심사위원이 아니니... 나에게는 과연 최고를 가려내고 평가할 수 있는 눈이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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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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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천재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는 ‘북구의 모나리자’라고 불릴 정도로 신비로움과 매혹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터번을 두르고 왼쪽 어깨 너머로 살짝 고개를 돌린 그림 속의 아름다운 소녀. 커다란 눈망울 속에는 놀라움과 기쁨, 수줍음과 떨림, 그리고 열정과 유혹의 그림자가 모두 담겨져 있는 듯 신비롭다.

그 아름다운 표정 속에 어떤 비밀이 담겨 있을까? 그녀의 머리 속에는 어떤 상념들이 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가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상의 인물이라면 너무나 아쉽다. 그리하여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작가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림 속에 갇혀 있는 소녀를 캔버스 밖으로 끄집어낸다. 소녀의 삶을 입체적으로 채색하기 시작한다.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의 풍경과 당시의 미술사에 대한 풍부하고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배경을 완성하고 상상력으로 생명을 불어 넣는다. 

 

작가는 스히강이 시내를 흐르는 네덜란드 델프트의 어느 마을로 독자를 안내한다.

그 마을에는 가난하지만 꿋꿋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는 소녀가 있다. 소녀의 이름은 그리트. 훗날 주인이 되는 화가 베르메르는 그녀를 자신의 캔버스에 담아내고, 그녀는 그 그림 속의 주인이 된다.

그리트는 집안이 몰락하자 베르메르 저택의 하녀로 들어가게 되고 바쁘고 피곤한 일상에 지쳐간다. 그러나 그 바쁘고 피곤한 와중에도 그녀에게 유일한 기쁨이 있었는데 바로 주인의 화실을 청소하는 일이다. 주인의 화실을 청소하면서, 주인의 물건들에 묻은 먼지들을 세심하게 닦아 내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주인의 그림들을 보게 되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트는 주인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너무 힘들다. 베르메르는 이미 부인과 자식들이 있고, 그녀의 주인이다.

베르메르가 그리트에게 이루어 질 수 없는 이상의 사랑이라면 같은 마을에 사는 푸줏간 주인의 아들 피터는 현실의 사랑이 된다. 피터는 그리트를 좋아하고 두 사람이 사랑을 한다면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두 사람은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좋은 일이 된다. 쉽고 순탄한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트는 선뜻 피터를 선택하지 못 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힘들고 위태로운 사랑을 열망한다.

베르메르는 그리트를 자신의 그림 속에 담으려 하고 그녀에게 아내의 진주 귀고리를 건넨다. 그리트가 베르메르에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갈망하듯 베르메르 역시 그리트에게 이룰 수 없는 이상을 갈구하고 있었다. 아내의 진주 귀고리를 한 그리트의 모습을 자신의 화폭에 담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베르메르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난 받을 짓인지도 안다. 베르메르와 그리트 두 사람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그 일을 해낸다. 그리고 담담히 파국을 맞이한다.

 

이 소설은 영화 ‘세익스피어 인 러브’처럼 작가의 호기심어린 상상력에서 시작되는 소설이지만 슈발리에는 베르메르 그림 속의 신비한 소녀의 정체라는 구미 당기는 소재를 가져와 즉흥적인 재미만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소설의 바탕에는 사랑에 대한 깊은 고찰이 담겨 있다. 그것이 꼭 베르메르의 그림과 결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랑은 충분히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있고, 슈발리에는 진정한 작가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랑 이야기는 도처에 깔려있는 수많은 3류 사랑 이야기들과는 비교될 수 없다. 진주 귀고리를 한 그림 속 소녀의 표정과 생각을 쉽게 읽을 수 없듯, 이 소설 속의 사랑 이야기도 쉽게 생각하고 결론지을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모호한 것은 없지만 결코 단순하게 해석할 수도 없는 사랑 이야기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랑의 의미를 되짚고 고찰하는 뜻 깊은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 아니라 잘 읽힌다는 것이다. 잘 읽힌다. 이 한 마디로 이 소설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었고, 베스트셀러가 되기에 충분했고, 세계적인 명작이 될 수 있었다, 고 생각한다. 주인공 그리트의 남루한 일상과 절제된 감정의 흐름들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한 작가의 대단한 필력에도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책을 읽고나니 동명의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이제 그 매력적인 소녀를 문자가 아닌 영상으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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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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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다. 박민규의 첫 소설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펠리컨을 타고 몇 억 광년 은하계를 비행하여 개복치 같은 지구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암수 구분이 없는 괴이한 몰골의 외계인 같은 그의 첫 소설은, 자신들이 발을 붙이고 사는 땅덩어리가 감히 개복치를 닮았다고는 짐작조차 못할 수수한 상상력의 지구인들이 보기에는, 어느 날 아침 지하철 역 벤치에서 양복차림으로 묵묵히 쉬고 있는 기린을 보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것, 이었을 것이다.

외계인보다 더 외계인 같은 외모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처음 작가의 사진을 보고 무언지 모를 무언가가 잘못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박민규라는 신예 작가는 2003년 여름, 나름대로 잘 정돈되어 있던 한국의 문단(文壇)을 향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던 원폭과도 같은 가공할 위력의 원, 투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는데 그 중 '투'에 해당하는 더 강력했던 펀치가 2003년 내내 문인들과 독자들의 입에 끊이지 않고 오르내렸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었다. 이 강펀치는 당시 문단과 도서계에 꽤나 큰 충격과 파장을 불러 일으켰으며 지금까지도 국내 문인들과 독자들은 그 휴유증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른 하나의 스트레이트, 즉 '투'보다 먼저 날렸지만 조금 약했던 '원'이 바로 오늘 소개 하고자 하는, 정녕 외계인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무지막지하고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무장된, 그냥 영웅도 아니고 바로 이 ‘지구’를 지킨다는 ‘영웅’들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

이름하여,

‘지구영웅전설’

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만화속의 영웅들이 대거 등장한다.

먼저 슈퍼맨,

그리고 배트맨,

으로 변신하기 전의 브루스 웨인,

로빈,

원더우먼,

아쿠아맨, 아쿠아맨, 아쿠아맨...

또 아쿠아맨,

그리고 특별출연 하는 헐크,

로 변하기 전의 브루스 배너 박사(이 자도 영웅인가? 소설을 읽어 보니 영웅이 맞더라...),

그리고 새로운 이름 바나나맨, 등등...

소설 속의 주인공은 포느로 잡지를 보다가 담임에게 들키고 얻어터진 후에, 부모님을 모셔 와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주인공은 자살을 결심한다. 평소부터 슈퍼맨을 동경해 왔었기에 슈퍼맨처럼 빨간 망토를 두르고 계모가 계단 청소부로 일하는 빌딩의 옥상에서 마치 슈퍼맨 놀이를 하다가 죽은 것처럼 위장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뛰어 내린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는다. 마침 대한민국 상공을 순찰 중이던 진짜 슈퍼맨에 의해 운명적으로 구출된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고, 주인공은 꿈에 그리던 슈퍼맨을 실제로 만난 것이다. 슈퍼맨 뿐만 아니라, 슈퍼맨을 따라 영웅들이 모여 사는 ‘정의의 본부’로 까지 가게 된 주인공은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 떨렸던 슈퍼특공대(80년대 초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만화영화)의 핵심 멤버들을 모두 만나게 된다.

영웅들은 정말로 영웅다운 모습으로 지구 곳곳으로 날아다니며 영웅이 해야 할 일들을 영웅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이에 탄복한 주인공은 자신도 영웅의 멤버가 되기를 갈망했고, 마침내 ‘바나나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고 새로운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영웅들의 실체가 하나씩, 하나씩 드러난다.

챕터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영웅들이 어떤 영웅적인 일들을 하는 지 (주로 바나나맨의 눈과 로빈의 입을 통하여)비밀스럽게 밝혀진다.

그 실체가 바로 소설의 주요 내용이 되고 주요 반전이 된다. 그러므로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이들을 위해 그 실체를 여기서 밝힐 수는 없다. 영웅들은 나름대로 역할을 분담하여 체계적이면서도 위력적이면서도 제법 합리적인 방법으로 지구의 평화를 지켜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절대적인 '힘'앞에서 우리의 바나나맨은 할 일이 없어진다. 고작해야 영웅들의 심부름이나 해 주면서 우스꽝스런 제스처만 꾸준히 연습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바나나맨이라는 영웅으로 재탄생되었듯 박민규라는 시인 지망생이자 전직 회사원이자, 전직 잡지사 편집장이자,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백수가 소설가로 재탄생해 주어서 감사하다. 그가 내지르는 문장들은 바나나맨의 제스쳐처럼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슈퍼맨 못지 않게 힘이 넘치고, 배트맨처럼 참 정의롭기도 하며, 비행하는 원더우먼처럼 유혹적이며, 아쿠아맨처럼 끝없이 분열되기도 하며, 헐크처럼 변화무쌍한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감사하다. 이런 문장, 이런 소설을 읽을 수 있게 해 주어서...

 

왜 슈퍼맨은 배트맨에게 대표의 자리를 넘겨주어야 했는지, 배트맨이 구사하는 마운틴이라는 기술은 무엇인지, 또 배트맨은 왜 배트맨 복장을 잘 입지 않는지, 왜 로빈은 배트맨을 싫어하는지, 원더우먼은 왜 투명 비행기를 타야만 하는지, 그리고 아쿠아맨은 왜 그리도 많은지, 또 브루스 배너 박사는 어떤 방법으로 협상을 원만히 타결짓는지 등등... 정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영웅들의 대단한 활약상과 그 실체가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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