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네덜란드의 천재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는 ‘북구의 모나리자’라고 불릴 정도로 신비로움과 매혹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터번을 두르고 왼쪽 어깨 너머로 살짝 고개를 돌린 그림 속의 아름다운 소녀. 커다란 눈망울 속에는 놀라움과 기쁨, 수줍음과 떨림, 그리고 열정과 유혹의 그림자가 모두 담겨져 있는 듯 신비롭다.

그 아름다운 표정 속에 어떤 비밀이 담겨 있을까? 그녀의 머리 속에는 어떤 상념들이 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가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상의 인물이라면 너무나 아쉽다. 그리하여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작가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림 속에 갇혀 있는 소녀를 캔버스 밖으로 끄집어낸다. 소녀의 삶을 입체적으로 채색하기 시작한다.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의 풍경과 당시의 미술사에 대한 풍부하고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배경을 완성하고 상상력으로 생명을 불어 넣는다. 

 

작가는 스히강이 시내를 흐르는 네덜란드 델프트의 어느 마을로 독자를 안내한다.

그 마을에는 가난하지만 꿋꿋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가는 소녀가 있다. 소녀의 이름은 그리트. 훗날 주인이 되는 화가 베르메르는 그녀를 자신의 캔버스에 담아내고, 그녀는 그 그림 속의 주인이 된다.

그리트는 집안이 몰락하자 베르메르 저택의 하녀로 들어가게 되고 바쁘고 피곤한 일상에 지쳐간다. 그러나 그 바쁘고 피곤한 와중에도 그녀에게 유일한 기쁨이 있었는데 바로 주인의 화실을 청소하는 일이다. 주인의 화실을 청소하면서, 주인의 물건들에 묻은 먼지들을 세심하게 닦아 내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주인의 그림들을 보게 되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트는 주인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너무 힘들다. 베르메르는 이미 부인과 자식들이 있고, 그녀의 주인이다.

베르메르가 그리트에게 이루어 질 수 없는 이상의 사랑이라면 같은 마을에 사는 푸줏간 주인의 아들 피터는 현실의 사랑이 된다. 피터는 그리트를 좋아하고 두 사람이 사랑을 한다면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두 사람은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좋은 일이 된다. 쉽고 순탄한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트는 선뜻 피터를 선택하지 못 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힘들고 위태로운 사랑을 열망한다.

베르메르는 그리트를 자신의 그림 속에 담으려 하고 그녀에게 아내의 진주 귀고리를 건넨다. 그리트가 베르메르에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갈망하듯 베르메르 역시 그리트에게 이룰 수 없는 이상을 갈구하고 있었다. 아내의 진주 귀고리를 한 그리트의 모습을 자신의 화폭에 담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베르메르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난 받을 짓인지도 안다. 베르메르와 그리트 두 사람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그 일을 해낸다. 그리고 담담히 파국을 맞이한다.

 

이 소설은 영화 ‘세익스피어 인 러브’처럼 작가의 호기심어린 상상력에서 시작되는 소설이지만 슈발리에는 베르메르 그림 속의 신비한 소녀의 정체라는 구미 당기는 소재를 가져와 즉흥적인 재미만을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소설의 바탕에는 사랑에 대한 깊은 고찰이 담겨 있다. 그것이 꼭 베르메르의 그림과 결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랑은 충분히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있고, 슈발리에는 진정한 작가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랑 이야기는 도처에 깔려있는 수많은 3류 사랑 이야기들과는 비교될 수 없다. 진주 귀고리를 한 그림 속 소녀의 표정과 생각을 쉽게 읽을 수 없듯, 이 소설 속의 사랑 이야기도 쉽게 생각하고 결론지을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모호한 것은 없지만 결코 단순하게 해석할 수도 없는 사랑 이야기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랑의 의미를 되짚고 고찰하는 뜻 깊은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 아니라 잘 읽힌다는 것이다. 잘 읽힌다. 이 한 마디로 이 소설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었고, 베스트셀러가 되기에 충분했고, 세계적인 명작이 될 수 있었다, 고 생각한다. 주인공 그리트의 남루한 일상과 절제된 감정의 흐름들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한 작가의 대단한 필력에도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책을 읽고나니 동명의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이제 그 매력적인 소녀를 문자가 아닌 영상으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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