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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박완서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2005년 오늘날을 대표할 수 있는 우리 작가의 좋은 소설은 어떤 것일까..
어떤 소설을 읽어야 좋은 소설 읽었다는 자부를, 아니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최근의 한국 소설을 이끌어 가는 작가들은 과연 누구일까...
어떤 소설이 잘 쓴 소설일까...
참으로 암담한 질문들이 아닐 수 없다. 쉽게 답할 수 없고, 쉽게 답해서는 안 될 질문들이다.
그러나 매년 현대문학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라도 하듯 하나의 책을 출간한다.
바로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이다.
답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현대문학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여러 작가의 단편들이 믹서된 묶음 도서들이 판을 치고 있다. 이상문학상 수상 소설집,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 황순원 문학상 수상 소설집,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좋은 소설 등 국내 유수의 출판사에서 앞 다투어 그런 식의 소설집들을 묶어 내고 있다. 상금이라도 몇 천 만 원 내 걸린 문학상이라면 여지없이 그 후보작들을 모두 묶어서 책으로 낸다. 이런 도서들은 모두 국내 최고의 작가들의 최고의 소설들로만 엄선되었다는 타이틀을 달고, 홍보를 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도서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마치 우리나라 작가들이 쓰는 단편들은 모두 좋은 소설이 되는 것만 같아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인지에 대한 의문도 기대감도 사라지게 만든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발표하는 소설 가운데 반은 좋은 소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요즘은 정말 좋은 소설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간혹 정말 좋은 소설이 좋은 소설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이런 식의 묶음 도서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신뢰하는 책이 바로 현대문학에서 출간되는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껏 이런 식의 묶음 도서들을 많이 읽어 본 결과 평균적으로 재미있는 소설들이 가장 많이 수록된 책이 바로 현장비평가... 이기 때문이다.
올해만 해도 이런 식의 도서를 네 권 읽었는데 그 중 2005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 가장 많은 수의 재미있는 단편들이 실렸다.
2005년 현장비평가... 에는 총 열 명의 작가들이 쓴 열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이중에서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은 다섯 편이다.
나머지 다섯 편 가운데 네 편도 그럭저럭 읽혔으나 한 편은 도통 취향에 안 맞는 소설이라 지루했다.(비평가가 보기에는 그 소설도 잘 된 소설이고, 심지어는 재미있는 소설이라고까지 할 지 모르겠으나 개인적인 평가로는 지루했고, 지루했기에 그다지 잘 된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 지 않았다)
잘 읽힌 순으로 작품들을 나열해 본다면,
김애란 - 달려라, 아비
이기호 -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김중혁 - 무용지물 박물관
박완서 - 거저나 마찬가지
정이현 - 그 남자의 리허설
구효서 - 소금가마니
이혜경 - 피아간
윤대녕 - 탱자
조성기 - 작은 인간
하성란 - 웨하스로 만든 집
여기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두 편의 소설이 바로 김애란과 이기호의 소설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유난히 눈에 띈 두 작품이다. 두 작가 모두 젊은 작가지만 소설의 색깔은 전혀 다르다. 각기 다른 독특한 색깔을 지닌 젊은 작가들의 출현은 반가운 일이다.
달려라, 아비는 어머니와 둘이서 살아가는 여고생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상상하는 이야기다. 소박하고 간단한 소설이다. 최근의 젊은 작가의 소설에서 흔히 드러나는 과격하고 모험적이지만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해 휘청거리는 그런 소설이 아니다. 호수처럼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숨기고 있는 소설이다. 깊은 느낌의 감동이 전해지지만 또 소설은 웃기고 가벼운 터치로 일관한다.
여자가 아기를 배자 슬그머니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사내. 여자는 혼자 아기를 낳고, 아기는 자라면서 아버지를 생각한다.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 그래서 얼굴조차 모르는 아버지를 상상으로 그려본다. 아기는 자라서 소녀가 되고, 소녀의 상상 속에는 늘 아버지가 있다. 상상 속의 아버지는 늘 달리고 있다. 아니 달려야만 한다. 자신과 엄마를 버린 아버지니까 달려야만 한다. 아내와 자식을 버려야 할 만큼 바쁘고 대단한 일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집을 나간 것이고, 그렇다면 무조건 달려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그 날까지, 소녀의 눈앞에 나타날 그 날까지, 상상 속의 아버지는 그저 달려야만 한다. 그렇게 소녀는 상상 속에서 늘 아버지를 뛰게 만들며, 그렇게 늘 아버지를 곁에 두고 있었다.
김애란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충분히 심각해 질 수 있는 소재를 대단히 가벼운 어투로 풀어간다. 졸졸졸 냇물이 흘러가듯 경쾌하고 가볍게, 농담을 섞어 가면서... 그러나 그 느낌은 참으로 깊다. 지표의 깊은 곳까지 조용히 스며들 수 있는 물처럼 이 젊은 작가의 시선은 인생의 깊은 곳을 응시할 줄 안다. 그래서 대단히 안정적이며, 따뜻한 소설이 되었다.
김애란이 구사하는 문장은 참으로 읽히는 맛이 좋고, 아련한 여운이 오래 남는다.
달려라, 아비에도 좋은 문장들이 넘쳐난다. 그 중 인상적인 구절을 몇 옮겨 보자면,
말을 모르는 몸뚱이가, 세상에 편지처럼 도착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를 어느 반지하 방에서 혼자 낳았다. 여름날이었고, 사포처럼 반짝이는 햇빛이 빳빳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본 빛은 딱 창문 크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우리들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내 머릿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해왔던 상상이라 잘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결국 용서할 수 없어 상상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버지를 계속 뛰게 만드는 이유가, 아버지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죽여버리게 될까 봐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러자 갑자기 나는 서러워졌고, 그 서러움이 나를 속이기 전에 빨리 잠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애란과 함께 최근 주목하는 젊은 작가가 바로 이기호다. 이기호의 단편도 지금껏 네 편밖에 읽지 못 했다. 그러나 역시 나를 실망시킨 소설은 없었다. 그는 매우 독특한 상상력의 소유자다. 2005년 문학동네 여름호에 실렸던 ‘수인(囚人)’이라는 단편에서는 콘크리트로 덮여버린 서점 속에서 자신의 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무명작가의 이야기를 그렸다. 무명작가는 어쩌면 지금은 없어졌을 지도 모르는 자신의 책을 찾기 위해 곡괭이로 콘크리트를 파 나간다. 마치 그것이 작가가 해야 할 일인 듯, 열심히, 무거운 사명감을 띠고 묵묵히... 그리고는 종래 콘크리트 속에 파묻힌 서점 속에 갇혀 버린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은 흙을 먹고 사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하지만 그가 흙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83년에 미그기 한 대가 남하했기 때문이다. 미그기가 남하한 일이 남자가 흙을 먹는 일과 무슨 연관이 있냐고...? 소설을 읽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미그기가 남하하고, 북한의 공군 장교 한 명이 귀순을 한 크다면 크고 작다면 별 일 아닐 정도로 작은 헤프닝 하나가 팔랑이는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남자에게 어떤 엄청난 폭풍을 불러일으키게 되는지... 남자는 이제 어엿한 흙요리 전문가가 되어 독자들에게 간단히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야채볶음흙의 요리법을 설명하면서 양념처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곁들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그 곁들인 양념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 남자를, 그 남자가 먹는 흙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김애란, 이기호 두 젊은 작가의 역량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독서의 보람이 충분한 책이었다. 2006년에도 좋은 소설을 가려내는 작업이 활발하고 진지하게 계속 이루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