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가 온다
백가흠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백가흠의 소설은 제법 낯설다.

내용이 낯선 것이 아니라 분위기가 낯설다. 낯설고 무섭다. 무섭고 답답하다. 비릿한 생선을 날로 회쳐 먹는 기분이다. 날고기를 씹는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눌려, 혹은 독특한 빛깔과 향기에 이끌려 우물우물 씹다 보니 한 접시를 다 비운 듯한, 그런 느낌이다.

회가 아니라면 마약 같다. 양귀비 잎사귀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중독이 되어 더 많이 더 빠르게 계속 씹어 먹듯, 그렇게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을 읽어 치웠다. 당연히 포만감이나 개운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쉽게 소화가 안 되는 소설들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분노와 공포의 감정들이 수시로 교차되며 입 안에서 계속 씹혔다.

백가흠은 근래에 출현한 신인 작가 가운데서 보기 드물게 다른 색깔을 지닌 작가다. 다른 색깔이기 보다 짙은 색깔인 것 같다. 고만고만한 작가들 사이에 파묻히지 않고 강렬한 색깔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가다. 하얀 도화지에 제대로 먹칠을 할 줄 아는, 온전한 것들을 제대로 부수고 제대로 난자할 줄 아는, 뭔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줄 아는 작가다. 손에 잡힌 대상에게 치명타를 가할 줄 아는 작가다. 서슴없이 배를 가르고 내장을 파헤쳐 사방에 흩뿌릴 줄 아는 작가다. 아무리 퍼덕퍼덕 날 뛰는 생선들이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꼼짝없이 살이 발리고 뼈가 추려져 접시 위에 놓여진다.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하나의 회감이 될 수밖에 없다.

백가흠은 오랜 시간 갈아온 자신만의 회칼을 능숙하게 휘두르며 사랑 이야기를 제대로 망쳐 놓는다. 아니 제대로 회를 뜨는 것이다.


남자들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이 사랑을 하는 방식은 하나같이 난폭하고 위악적이며, 퇴행적이고 유아적이다. 그들은 어쩌면 이 세상에 없는 사랑을 갈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폭력을 통해서 그러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슬픈 판타지다.

백가흠 소설의 남자들이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도 같은 한없이 넓고 포용적인 사랑이다. 그들은 순수하고 무한한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다. 사랑을 갈구하기 보다는 기대고 쉴 수 있는 안식처를 갈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식처가 마련되지 않으니 폭력을 자행하는 것이다. 마음먹은 대로 여자가, 혹은 세상이 움직여 주지 않으니 남자는 답답하고 허전하다. 답답하고 허전하다 못해 위협과 공포를 느낀다. 강한 소유욕이 그 대상을 찾지 못 하자 허기로 돌변하고, 난폭함이 드러난다. 남자는 폭력을 휘두르며 허기에서, 공포에서,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렇게 하면 원하는 바를 얻을 줄 안다. 아니 그렇게 해도 결국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남자도 안다. 현실은 위태롭게 어긋나며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는다. 파국을 알면서도 타인에 대한 폭력을,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학대를 멈출 수 없다. 갈망하는 꿈은 점점 더 멀어지고 유린당한 현실은 더욱 추악해 질 뿐이다. 그래서 상황은 늘 최악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반들반들하게 갈아 놓은 회칼처럼 날렵한 문장들과 사실감 넘치는 대사들이 강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백가흠의 소설은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복어와도 같은 소설이다. 그러나 천천히 잘 씹어 먹으면 독특하고 강렬한 뒷맛을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반응이 극단으로 갈릴 수 있는 소설이며, 작가다. 독과 맛을 함께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 작가에게, 소설에게 중독이 될 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새로운 힘을 지닌 새로운 국내 작가의 출현이 반갑다.

새로운 힘을, 과격할 정도로 새로운 힘을, 느껴보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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