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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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간만에 참, 무지하게 안 읽히는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작가는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라고 얘기한 바 있다. 말의 뜻은 곧, 작가가 일부러 안읽히도록 글을 썼다는 얘기가 아닌가... 나는 과연 참 안 읽혔으니, 나름 잘 읽은 것인가? 

김영하의 신작을 두고 좋지 않은 평을 하려니 마음이 쓰리긴 하다. 김영하의 소설은 '아랑은 왜'를 제외하고는 모두 읽었다. 그 중 '검은꽃', '오빠가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아주 재미있었고, 충분히 칭찬해 주고 싶은 책들이다. 무엇보다 '재미'. 문학성은 차치하고, 김영하의 전작들은 출중한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소설은 일단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전작들에 비해 문학성이 더 뛰어난 것 같지도 않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20년간 본국으로부터 잊혀진 '간첩'으로 살아오던 한 남자가 어느날 귀환명령을 받고 일어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언뜻 실시간으로 대단히 긴박하고,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들이 촤르륵 펼쳐질 것 같은 줄거리지만, 그런 박진감과 재미를 기대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곧 난감한 지루함과 배신당한 듯한 실망감에 빠져들 수 있다.(나는 그랬다)

대게 제한된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들은 긴박감 넘치기 마련인데, 더구나 이 소설은 스파이 첩보물 같은 전운을 띠었는데(물론 전혀 그런 류의 소설은 아니었다), 더구나, 더구나 말이다, 3년을 기다린 김영하의 신작 장편인데, 이 소설은 전혀 긴박하지도, 술술 잘 읽히지도, 새롭지도 않다. 인물들의 심리에 공감하기도 힘들고, 당연 감동도 없었다. 지루하고, 무미하다. 감정이 느껴진다면 짜증스러움 뿐이다. 캐릭터들은 참 마음에 안 들고, 꾸역꾸역 하는 행동들을 보고 있으면 울화통이 다 치밀었다. 짜증나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캐릭터들이었다. 심지어는 마리나 소지 같은 이름 조차도 짜증이 났다.(뭔가 쿨 하게 보이고 싶어서 그런 이름이나 별명을 택했는지 모르겠으나, 전혀 쿨하지 않았고, 오히려 촌스러웠다. 촌스럽고 어색하긴 소녀들의 대화도 마찬가지.) 
김영하 본인은 이 소설을 쓰면서 재미 있었을까, 지루했을까... 
김영하는 이 소설을 왜 썼으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라는 폴 발레리의 말과, 하루 동안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사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거창한 문구는 독자를 현혹시키게에 딱 좋은 것 같다. 기실, 그 남자의 하루가 폴 발레리의 말과 얼마나 부합하는지, 저 말을 이 남자의 하루에 적용시킬 만한지 조차 의심스러웠고, 하루 동안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사는 남자의 이야기치고, 그 하루는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늘어졌으며, 예측 가능했다.
그나마 남자(기영)의 이야기는 따라가줄만 한데, 아내와 딸의 이야기는 도무지 집중하기가 힘들었다.(소지도 마찬가지) 인물들의 과거도 마찬가지다. 기영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당췌 새로운 감동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었고, 그다지 강렬하거나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도 없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풀리지 않는 의문들도 수두룩했다.
아내(마리)의 사생활을 왜 그런 식으로 그렸는지(사실 이 같은 여자 캐릭터 - 성적으로 타락하거나 문란(혹은 쿨?)하거나 상처받은 여자 - 는 김영하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데, 나는 작가가 왜 자꾸 이런 여자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귀환명령을 받은 간첩의 고뇌 사이사이에 그의 아내와 딸의 일과가 굳이 교차되어 들어갈 필요가 있었는지, 아빠, 엄마, 딸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맞물리는 접점 같은 것은 무엇이며, 그 접점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 밋밋한 결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지, 그래서 그 남자는 오래된 사상과, 거짓 일상을 버리고, 새로운 일상, 새로운 삶을 찾았다는 얘긴가?
제목이 왜 빛의 제국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고, 너무 재미있었다느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느니, 긴장감이 넘쳤다느니, 너무 감동적이었다느니 하는 평들에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어 안타깝고 답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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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은 속삭인다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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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연쇄적으로 죽음을 맞는다.
첫번째 여자 가토 후미에는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자신이 사는 맨션 옥상에서 뛰어내려 사망한다.
두번째 여자 미타 아츠코는 지하철 선로로 뛰어내려 열차에 치어 사망한다.
그리고 세번째 여자 스가노 요코는 야간에 도로를 가로지르다가 택시에 치어 사망한다.

고등학생 마모루는 우연히 이 사건에 끼어들게 된다. 세번째 사건의 가해자로 현장에서 체포된 택시기사가 바로 마모루의 이모부인 것이다. 이모부의 과실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전후 상황으로 볼 때, 여자가 자살을 위해 도로로 뛰어든 것으로 봐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모루의 집으로 '여자를 죽여줘서 고맙다'는 의문의 전화까지 걸려오자, 마모루는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홀로 수사에 나선다.

스가노 요코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마모루는 요코를 포함한 네 명의 여자(가토 후미에, 미타 아츠코, 스가노 요코, 다카기 가즈코)를 알게 되고, 네 여자가 과거에 같은 일을 했었고, 같은 잡지에서 함께 인터뷰를 했던 사실도 알아낸다. 또한 네 여자 중에서 요코를 포함한 세 여자가 이미 죽었다는 충격적인 사실까지 밝혀낸다. 게다가 그들의 죽음은 모두 '자살'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나머지 한 명의 여자 다카기 가즈코. 그녀의 행방은 알 수 없으나, 살아있다면 목숨이 위험하다.
그 즈음 마모루의 주변에서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일들이 연달아 발생한다. 그리고 또다시 걸려오는 의문의 전화. 배후에 숨어있던 범인이 스스로 마모루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범인은 마모루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뒤짚어엎는 엄청난 비밀을 알려준다. 

 이 소설은 일본 추리소설의 여왕 미야베 미유키의 초기 작품으로 1989년에 제2회 일본추리서스펜스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답게 이번에도 작가는 고도로 성장하는 현대 사회의 그늘 속에서 치유되지 못하고 있는 인간들의 상처와 사회의 얼룩을 드러내 보인다. 무시무시하고 스릴 넘치는 사건을 숨가쁘게 쫓아가다보면 어느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무겁고 진지해 진다. '이유'나 '화차'에서처럼 범인의 마음을 일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회에 얼룩진 부조리와 법망을 유유히 뚫고 세상을 활보하는 악의(惡意)들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행동이 나쁜 줄도 모르고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들, 혹은 과거의 악행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에 대한 연민이나 이해의 감정도 든다. 알고보면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불쌍한 인간들인 것이다. 또한 하나의 사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있으며, 얼마나 많은 의미가 녹아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많은 의미들을 모른 채, 혹은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알게 된다. 작가는 특유의 섬세하고 박력있는 필체로 사회의 얼룩진 단면을 예리하게 해부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한 편, 한 편에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열정의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이번 작품을 위해 두 가지의 전문지식들을 끌어온다. 하나는 사건의 중심에 숨어 있는 '최면'이라는 정신요법과, 또 하나는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마모루가 사용하는 '열쇠'기술들이다. 이 두 가지는 숨가쁘게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무리없이 녹아 있으며, 작품을 탄탄하게 받쳐준다.
'최면'이 어떻게 사건의 중심을 이끌게 되는지, 그 사건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 '열쇠' 기술들이 어떤 식으로 발휘되는지... 작가는 이 흥미진진한 요소들을 적시적소에 배치하며 독자들에게 서스펜스의 진수를 만끽하게 한다.  

이제 작가의 또다른 걸작인 '브레이브 스토리'를 읽을 예정인데, 그 전에 나도 이 한 마디를 외쳐보고 싶다. 책 맨 뒷장에 작은 글씨로 씌어 있는 센스 있는 한 마디.

"미미여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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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김서령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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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이라는 작가의 삶과 상상력 속에 소설적 소재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쩐지 이 한권의 소설집에서 나는 김서령의 많은 부분을 이미 읽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작가가 추후에 발표하는 단편들이나, 혹은 장편이라 할 지라도, 과연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에서 얼마나 멀리 달아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만큼 이 소설집에 실린 아홉편의 단편들은 내용이나 분위기가 전부 하나로 묶여지는 것 같다. 조금조금씩은 다르지만, 아홉 편의 소설들이 보이지 않는 실들로 촘촘하게 엮여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하나의 단편을 읽고, 또 다른 단편을 접할 때면, 긴장감과 흥이 조금씩 줄어드는 기분을 느낀다. 또 이런 이야기야... 그리고, 또 하나의 단편을 읽고, 다시 다른 단편을 읽으려 하면 긴장감과 흥은 더 줄어든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읽은 두 세편은 밋밋했다. 대 여섯 번 우려먹은 사골을 한 번 더 우려서 맹탕물을 마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읽기 전에는 참으로 기대가 컸는데, 다 읽고 나서 그 기대가 사그라드는 느낌은 한국소설을 읽으면서 종종 경험하는 것이라 새삼스럽지는 않다. 다만, 김서령이라는 젊은 작가에게서 나는 김애란이나 김재영 이상의 기대를 잠시나마 가졌던 것이 사실이고, 그 기대를 이 소설집이 충족시켜 주길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밀려드는 실망감은 조금 더 씁쓸했다. 

아홉 편의 소설들은 모두 상처로 얼룩진 인간들의 이야기다. 상처에 대한 이야기. 참 많은 한국 작가들이 다루고 있다. 이 신예작가도 그것들을 한번 더 다룬다. 그것도 다분히 통속적인 분위기를 고수하며...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홀로 애를 낳거나, 지우거나, 사랑에 속고, 사랑에 울고, 운명에 휘둘리고...

소설에 몰입하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가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뜨는 쿨한 캐릭터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렇게 통속적인 인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구나, 통속적이면서 쿨한 척 하는 인물은 가장 싫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그런 인물들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들 커다란 불행을 하나씩 안고 살아간다. 작가는 마치 인간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비극을 안겨주려고 작정한 것 같다. 그들은 인생을 포기한 늙은이들처럼 차디찬 슬픔에 젖어 있거나, 답답하고, 궁상맞고, 청승스런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센척을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꾸역꾸역, 담담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척 하지만, 불행을 최대한 현명하게 대처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어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듯 둔하고, 미련스런 모습만 보인다. 한 마디로 곁에 있으면 따귀라도 한 대 갈겨 버리고 싶은 짜증나는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이 우리 주위에 실제하는 인물들인가?
이들의 미련스럽고, 짜증나는 모습들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런 인간들의 모습이 정녕 우리네 삶의 모습이고, 현실의 진면목이라고 말한다면,
잘 알겠다고 대답하며, 책을 덮고 싶다.
그리고 그 책은 다시는 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답답하고, 짜증나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현실이 답답하고 짜증난다는 것은 굳이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작가 자신만이 알고 있는 큰 깨달음이나, 발견이 아닌 것이다.
소설로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시도는 좋다.
그러나 현실이 답답하고 짜증나다고 해서 소설까지 답답하고 짜증나서는 곤란할 것이다. 
가령 폴 오스터나, 아멜리 노통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들은 어떤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 현실이고, 인간이다. 보잘것 없고, 답답하고, 무섭고, 너저분한 현실과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소설은 어떤가? 얼마나 깔끔하고, 재미있고, 매력적이며, 기발한가? 이야기도 캐릭터도 참으로 담백하고, 쿨하다. 상처를 대하거나 치유하는 자세도 훨씬 건강하고, 현명하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하나의 분위기로 끝까지 밀고나간 작가의 뚝심은 칭찬해 줄 만 하나, 이런 식으로는 더 많은 독자의 공감과 감동을 이끌기는 힘들 것 같다.
친근감 넘치는 정겨운 제목과, 노란 색 밝은 표지가 소설 속의 내용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황망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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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김서령
    from 파아란 영혼 2007-10-17 21:40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김서령(지음), 실천문학사 제법 탄탄하고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표현력을 가진 김서령의 첫 소설집 읽기의 시작은 매우 유쾌했다. 하지만 다 읽은 지금, 요즘 작가들은 왜 여기에서 멈추어 버리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불쾌해졌다. 도리어 뒤에 찬사에 가까운 평문을 쓴 방민호(문학평론가)나 소설가 이혜경, 문학평론가 서영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여러 단편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가난하거나 불행하거나, 그리고..
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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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대단한 소설에 대한 감상문을 어떻게 써야 할 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우선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에게 또 한번 고개를 숙인다. 이제는 찬사를 넘어 존경의 뜻을 표한다.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습니까? 당신은 정녕 천재입니까?
묻고 싶다. 그러면 작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나는 천재가 아니라, 그저 작가일 뿐입니다.
맞다. 그녀는 진정한 작가다. 그리고 진정한 작가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다시 말해, 작가인 척 하지만, 진정한 작가가 아닌 짝퉁 작가들이 주위에 하수도 물이 넘치듯 넘쳐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이런 진정한 작가의 가치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지 않을 수 없다!

모방범은 우선 그 대단한 원고 분량만으로도 읽는 이를 질리게 한다. 그러나 첫 장을 여는 순간, 독자는 재미에 질려 버리고, 충격과 감동에 질려 버린다. 미야베 미유키가 만들어 놓은 모든 장치들에 꼼짝없이 걸려들어 기분 좋게 바둥거리게 된다. 그 작은 체구의 여자 작가 손에 꼼짝없이 잡혔다가, 이리저리 흔들렸다가, 롤러코스트를 타듯 허공으로 내던져지고, 빙글빙글 돌다가,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풀려나는 그 기분이, 가히 하늘을 찌를 듯 경이롭고, 행복하다.
이런 식으로 작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쁨은, 언제든, 어느때든, 대 환영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소설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희대의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킨다.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토막,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평화로운 공원에서 여성의 손목이 발견되고, 엽기적인 살인이 이어진다. 시민들은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히고, 경찰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고, 수사는 난항을 거듭한다. 그 때, 범인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범인은 납치, 토막 살해한 희생자의 나머지 신체 부위가 있는 곳을 공개적으로 알린다. 이어서 범인은 매스컴을 통해 버젓이 대중 앞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희생자 유가족과, 경찰, 매스컴과 교묘한 두뇌 싸움을 벌인다.

범인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소설은 시작부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독자의 이성을 마비시켜 버린다. 어설프게 다음 장을 예상치 못하도록, 시작부터 머리를 온통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독자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그저 작가가 이끄는대로 끌려다니기만 한다. 물론 앞써 언급했듯이 즐거운 이끌림이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며, 서로 교차되고, 겹겹이 쌓이면서 새로운 살인이 모의되고, 새로운 전율과 공포를 부르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책장이 넘어갈수록 의문은 점점 더 많아진다. 간신히 하나의 의문이 풀리는가 싶으면 또다른 의문들이 등장한다. 의문이 의문을 낳고, 또 다른 사건을 야기하며, 새로운 의미를 갈구한다.
그러나 무릎까지 차오르던 수많은 의문과 비밀들은 결국 하나씩 풀려가고 매듭을 짓는다. 작가는 치밀과 복선과 암시, 과거와 현재, 인물과 인물들을 수시로 오가는 절묘한 구성으로 긴장과 서스펜스를 극도로 끌어올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강한 카타르시스로 독자의 가슴을 뒤흔든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그야말로, 원없이 느끼게 해 준다. 특히 마지막 순간의 놀라운 카타르시스 한 방은, 생각할수록 스릴 넘치고 감동적이다. 이 대단했던 이야기가 이런 놀라운 반전으로 정리되는구나! 새삼 작가의 역량에 탄복하고 박수를 보낸다.  

특이하게도 등장인물들 모두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범인도, 피해자도, 경찰도, 피해자 유족들도, 그들의 친구들도, 모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의 시점에서 사건이 전개될 때는, 그들이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세상사가 그렇듯. 모든 인간들이 각자 주인공이고, 모든 인간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각자의 상처를 가지고, 각자의 삶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비록 세상의 아주 작은 한 부분만을 이해하려고 해도 한 두 사람만의 이야기나 노력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한 두사람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하나의 사건을 말하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다. 찬찬히 살펴보면 그 하나의 사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고,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나의 사건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는지... 알고 보면 경악하게 된다. 한 사람만 뚝 떼어 놓고, 하나의 사건만을 뚝 떼어 놓고, 그 사람을, 그 사건을 온전히 얘기할 수 없으니... 그 한 사람을 얘기하려면, 그 한 사건을 얘기하려면, 모든 인간을, 모든 인간사를 함께 다뤄야만 하니, 세상은 참으로 놀랍고, 그래서 만만치가 않은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에는 늘 이렇게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깔려 있고, 가슴을 직접 파고드는 현실적인 감동이 있어,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마치 세상이라는 거대한 소설의 첫 페이지가 다시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은 대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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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ckle 2007-06-19 09:14   좋아요 0 | URL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마치 세상이라는 거대한 소설의 첫 페이지가 다시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 이 멋진 문장이 눈에 확 박혀서 불청객의 댓글 하나 안 남길 수 없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

리아트리스 2007-06-20 23: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올해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2006년 최고의 소설 열 편을 선정해 보았다. 2005년 12월부터 2006년 11월 사이에 출간된 신작 소설(집) 중에서 필자가 읽은 소설들을 대상으로 개인적인 기준에 의해 선정된 소설들이다. 한국 소설 다섯 편과 외국 소설 다섯 편을 골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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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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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단한 소설을 베스트로 선정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난 후에 느낄 수 있었던 제목이 주는 강렬한 감동과 여운은 잊을 수가 없다. 삶이 모두 끝난 후에 삶을 그리워하지 말고,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코끼리
김재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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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후 우리네 비루한 삶을 이만큼 깊이 있는 감동으로 담아낸 작가는 없었던 것 같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흠 잡을 데 없이 다듬어진 문장과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깊이 있는 시선에 믿음이 간다.
도쿄 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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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순수문학을 하면서 장르적 재미를 추구할 줄 알고, 자국어로 소설을 쓰면서 세계적인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작가. 이런 작가 우리나라에는 왜 없나? 104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오가와 요코의 '임신 캘린더'와 함께 올해 읽은 가장 재미있는 일본 순수문학.
펭귄뉴스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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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낡고 사소한 물건들을 창고 속에서 골라와 툭툭 먼지를 털어내고 그 속에 담긴 (역시 우리가 잊고 있었던)소중한 가치들을 발견하게 해 준다. 기발한 상상력과 놀라운 재미로 똘똘뭉친 이 신예에게 거는 기대가 박민규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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