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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간만에 참, 무지하게 안 읽히는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작가는 '만약 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 순간 당신은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라고 얘기한 바 있다. 말의 뜻은 곧, 작가가 일부러 안읽히도록 글을 썼다는 얘기가 아닌가... 나는 과연 참 안 읽혔으니, 나름 잘 읽은 것인가?
김영하의 신작을 두고 좋지 않은 평을 하려니 마음이 쓰리긴 하다. 김영하의 소설은 '아랑은 왜'를 제외하고는 모두 읽었다. 그 중 '검은꽃', '오빠가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아주 재미있었고, 충분히 칭찬해 주고 싶은 책들이다. 무엇보다 '재미'. 문학성은 차치하고, 김영하의 전작들은 출중한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소설은 일단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전작들에 비해 문학성이 더 뛰어난 것 같지도 않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20년간 본국으로부터 잊혀진 '간첩'으로 살아오던 한 남자가 어느날 귀환명령을 받고 일어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언뜻 실시간으로 대단히 긴박하고,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들이 촤르륵 펼쳐질 것 같은 줄거리지만, 그런 박진감과 재미를 기대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곧 난감한 지루함과 배신당한 듯한 실망감에 빠져들 수 있다.(나는 그랬다)
대게 제한된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들은 긴박감 넘치기 마련인데, 더구나 이 소설은 스파이 첩보물 같은 전운을 띠었는데(물론 전혀 그런 류의 소설은 아니었다), 더구나, 더구나 말이다, 3년을 기다린 김영하의 신작 장편인데, 이 소설은 전혀 긴박하지도, 술술 잘 읽히지도, 새롭지도 않다. 인물들의 심리에 공감하기도 힘들고, 당연 감동도 없었다. 지루하고, 무미하다. 감정이 느껴진다면 짜증스러움 뿐이다. 캐릭터들은 참 마음에 안 들고, 꾸역꾸역 하는 행동들을 보고 있으면 울화통이 다 치밀었다. 짜증나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캐릭터들이었다. 심지어는 마리나 소지 같은 이름 조차도 짜증이 났다.(뭔가 쿨 하게 보이고 싶어서 그런 이름이나 별명을 택했는지 모르겠으나, 전혀 쿨하지 않았고, 오히려 촌스러웠다. 촌스럽고 어색하긴 소녀들의 대화도 마찬가지.)
김영하 본인은 이 소설을 쓰면서 재미 있었을까, 지루했을까...
김영하는 이 소설을 왜 썼으며,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라는 폴 발레리의 말과, 하루 동안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사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거창한 문구는 독자를 현혹시키게에 딱 좋은 것 같다. 기실, 그 남자의 하루가 폴 발레리의 말과 얼마나 부합하는지, 저 말을 이 남자의 하루에 적용시킬 만한지 조차 의심스러웠고, 하루 동안 인생을 통째로 다시 사는 남자의 이야기치고, 그 하루는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늘어졌으며, 예측 가능했다.
그나마 남자(기영)의 이야기는 따라가줄만 한데, 아내와 딸의 이야기는 도무지 집중하기가 힘들었다.(소지도 마찬가지) 인물들의 과거도 마찬가지다. 기영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당췌 새로운 감동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었고, 그다지 강렬하거나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도 없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풀리지 않는 의문들도 수두룩했다.
아내(마리)의 사생활을 왜 그런 식으로 그렸는지(사실 이 같은 여자 캐릭터 - 성적으로 타락하거나 문란(혹은 쿨?)하거나 상처받은 여자 - 는 김영하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데, 나는 작가가 왜 자꾸 이런 여자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귀환명령을 받은 간첩의 고뇌 사이사이에 그의 아내와 딸의 일과가 굳이 교차되어 들어갈 필요가 있었는지, 아빠, 엄마, 딸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맞물리는 접점 같은 것은 무엇이며, 그 접점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 밋밋한 결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지, 그래서 그 남자는 오래된 사상과, 거짓 일상을 버리고, 새로운 일상, 새로운 삶을 찾았다는 얘긴가?
제목이 왜 빛의 제국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고, 너무 재미있었다느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느니, 긴장감이 넘쳤다느니, 너무 감동적이었다느니 하는 평들에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어 안타깝고 답답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