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령이라는 작가의 삶과 상상력 속에 소설적 소재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쩐지 이 한권의 소설집에서 나는 김서령의 많은 부분을 이미 읽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작가가 추후에 발표하는 단편들이나, 혹은 장편이라 할 지라도, 과연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에서 얼마나 멀리 달아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만큼 이 소설집에 실린 아홉편의 단편들은 내용이나 분위기가 전부 하나로 묶여지는 것 같다. 조금조금씩은 다르지만, 아홉 편의 소설들이 보이지 않는 실들로 촘촘하게 엮여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하나의 단편을 읽고, 또 다른 단편을 접할 때면, 긴장감과 흥이 조금씩 줄어드는 기분을 느낀다. 또 이런 이야기야... 그리고, 또 하나의 단편을 읽고, 다시 다른 단편을 읽으려 하면 긴장감과 흥은 더 줄어든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읽은 두 세편은 밋밋했다. 대 여섯 번 우려먹은 사골을 한 번 더 우려서 맹탕물을 마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읽기 전에는 참으로 기대가 컸는데, 다 읽고 나서 그 기대가 사그라드는 느낌은 한국소설을 읽으면서 종종 경험하는 것이라 새삼스럽지는 않다. 다만, 김서령이라는 젊은 작가에게서 나는 김애란이나 김재영 이상의 기대를 잠시나마 가졌던 것이 사실이고, 그 기대를 이 소설집이 충족시켜 주길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밀려드는 실망감은 조금 더 씁쓸했다.
아홉 편의 소설들은 모두 상처로 얼룩진 인간들의 이야기다. 상처에 대한 이야기. 참 많은 한국 작가들이 다루고 있다. 이 신예작가도 그것들을 한번 더 다룬다. 그것도 다분히 통속적인 분위기를 고수하며...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홀로 애를 낳거나, 지우거나, 사랑에 속고, 사랑에 울고, 운명에 휘둘리고...
소설에 몰입하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가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뜨는 쿨한 캐릭터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렇게 통속적인 인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구나, 통속적이면서 쿨한 척 하는 인물은 가장 싫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그런 인물들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들 커다란 불행을 하나씩 안고 살아간다. 작가는 마치 인간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비극을 안겨주려고 작정한 것 같다. 그들은 인생을 포기한 늙은이들처럼 차디찬 슬픔에 젖어 있거나, 답답하고, 궁상맞고, 청승스런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센척을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꾸역꾸역, 담담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척 하지만, 불행을 최대한 현명하게 대처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겠다는 열정어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듯 둔하고, 미련스런 모습만 보인다. 한 마디로 곁에 있으면 따귀라도 한 대 갈겨 버리고 싶은 짜증나는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이 우리 주위에 실제하는 인물들인가?
이들의 미련스럽고, 짜증나는 모습들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런 인간들의 모습이 정녕 우리네 삶의 모습이고, 현실의 진면목이라고 말한다면,
잘 알겠다고 대답하며, 책을 덮고 싶다.
그리고 그 책은 다시는 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답답하고, 짜증나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현실이 답답하고 짜증난다는 것은 굳이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작가 자신만이 알고 있는 큰 깨달음이나, 발견이 아닌 것이다.
소설로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시도는 좋다.
그러나 현실이 답답하고 짜증나다고 해서 소설까지 답답하고 짜증나서는 곤란할 것이다.
가령 폴 오스터나, 아멜리 노통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들은 어떤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 현실이고, 인간이다. 보잘것 없고, 답답하고, 무섭고, 너저분한 현실과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소설은 어떤가? 얼마나 깔끔하고, 재미있고, 매력적이며, 기발한가? 이야기도 캐릭터도 참으로 담백하고, 쿨하다. 상처를 대하거나 치유하는 자세도 훨씬 건강하고, 현명하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하나의 분위기로 끝까지 밀고나간 작가의 뚝심은 칭찬해 줄 만 하나, 이런 식으로는 더 많은 독자의 공감과 감동을 이끌기는 힘들 것 같다.
친근감 넘치는 정겨운 제목과, 노란 색 밝은 표지가 소설 속의 내용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황망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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