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 모양 상자 모중석 스릴러 클럽 10
조 힐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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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희귀 물건 수집광인 과거의 록스타 주드는 인터넷을 통해 유령 붙은 양복을 구입한다.
그때부터 주드와 귀신과의 필사의 사투가 시작된다. 양복과 함께 하트 모양 상자에 담겨온 귀신은 엄청난 적의와 소름끼치는 집념으로 주드를 공포와 죽음의 끝으로 내몬다. 주드는 젊은 애인과 함께 귀신으로부터 도망다니는 한편, 귀신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도 애쓴다.
귀신은 누구인가? 귀신이 주드에게 배달되어진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귀신은 왜 주드를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하트 모양 상자'는 한 마디로 잘 쓰여진 공포소설이다. 이렇게만 쓴다면 모두가 입을 다물 것이다. 공포소설을 하위문학으로 취급하는 고매한 순문학 작가들도, 평론가들도 이 작품 앞에서는 입을 딱, 다물고 말 것이다. 그만큼 '하트 모양 상자'는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다. 비판의 날을 들이댈 자리가 거의 없다. 소재의 선택도 좋았고, 주제도 명확하며. 구성도, 문장도 탄탄하다. 시종 여유를 잃지 않는 작가의 태도도 마음에 들고, 유머도 훌륭했다. 젊은 나이에 브램스토커상을 수상한 작가의 빛나는 경력이 과연 믿음직스럽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정말 훌륭한 작품이다. 누구나 칭찬할 수밖에 없는 작가고, 소설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공포소설 매니아로서의 기대에는 조금 만족스럽지 못 하다는 것이다. 이것도 물론 시각의 차이일 것이다. 이 작품이 그저 훌륭하고, 재밌게만 읽히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마도 이 작품에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나는 젊은 신예 작가 조힐이 아버지를 뛰어넘는 공포(혹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공포)를 보여주길 기대했었다. 더 젊고, 더 감각적이고, 더 파격적인, 더 무섭고, 더 역동적인, 더 놀라운 환상과, 공포와 서사를 보여주길, 더 새로운 환상문학의 길을 열어주길, 기대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트 모양 상자'는 무난했다. 무난하다 못해, 조금 낡은 느낌까지 들었다. 조힐은 특별히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탄탄하고, 안정적인 문장으로, 탄탄하고 안정적인 소재를 택해, 탄탄하고 안정적인 이야기를 펼쳐 나갈 뿐이었다. 귀신이 나오고, 귀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귀신에 얽힌 원한의 내용을 알게 되고, 귀신과 최후의 사투를 벌인다는, 탄탄하고 안정적이지만, 조금은 낡은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젊은 감각으로 새롭게 첨가된 공포나 서사는 없었다. 너무 무난한것도 흠이라면 흠일 수 있을 것이다.
분량이 너무 길다는 것도 작은 흠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까지 길게 나갈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 소설이 아닌데, 중편 정도로 마무리를 지었다면 더욱 깔끔하고 흡인력 있는 소설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주인공의 내면과 일상을 너무 세밀하게 묘사하다 보니 사실성은 살아났으나, 메인 스토리의 진행이 느린 듯 하여 조금은 불만스러웠다.
또한 조힐은 내 기대와는 달리, 아버지의 모습와 너무 흡사했다. 이 소설은 작가를 '스티븐 킹'으로 슬쩍 바꿔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킹의 작품 분위기와 닮아 있다. 물론 그 대단한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분위기를 닮았다는 것은 이미 작가의 역량이 아버지에 많이 근접했음을 뜻한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조힐은 아직 젊은 작가다.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나는 그가 언젠가는 아버지의 역량을 뛰어넘어 새로운 환상문학의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상상력으로, 새로운 공포를 창조해 낼 것임을 믿는다.
작가의 첫 장편인 '하트 모양 상자'를 읽고 나면 적어도 그런 믿음은 충분히 가질 수 있다.
여하튼 '하트 모양 상자'는 잘 쓰여진 훌륭한 소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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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실로의 여행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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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방 안에 한 노인이 갇혀 있다. 노인은 고립되어 있다.
노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며, 이곳이 어디인지, 왜 갇혀 있는 지 알지 못 한다. 처벌 받기 위해 갇힌 것인지, 보호 받기 위해 갇힌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노인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 한다. 그의 앞에는 한 묶음의 원고와 몇 장의 사진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사진 속의 인물들이 한 사람씩 노인을 찾아온다. 노인은 자신 앞에 놓인 원고와 사진과 방문객들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복원해 내야 한다.
원고와 사진과 방문객들에게서 하나씩 실마리를 찾아가며 노인은 끊어진 이야기를 완성시키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은 모호하기만 하고, 진실의 실체에 접근해 간다고 생각할수록 두려움과 혼란은 가중된다. 진실은 무엇이며, 노인의 과거는, 그리고 현재는, 또 미래는 어떤 모습이며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까...? 

폴 오스터는 기발한 상상력과 감각적이고 치밀한 구성으로 시작부터 소설 속 캐릭터를 혼란에 빠뜨린다. 캐릭터가 혼란을 거듭할 수록 독자도 혼란에 빠진다. 캐릭터가 진실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뒤집히기도 한다. 진실은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보이다가도 순식간에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버린다. 진실은 시종 숨어 있다. 아니, 어쩌면 진실따위는 애초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가는 그것을 캐릭터에게 스스로 찾게 하거나, 혹은 스스로 만들기를 종용하는 듯 하다.
그래서 캐릭터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간다. 오로지 머리(상상) 속으로만 진행되는 운명이지만, 그것은 나름 제모습을 갖춰가며, 캐릭터에게 실존의 색깔을 입힌다. 캐릭터는 소설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재구성하고, 미래를 그려나간다. 물론 난관은 많다. 우선 몸이 자유롭지 못 하다는 게 가장 큰 장애다. 그는 어쨌거나 원고(감금된 방) 속에 갇힌 인물이니까...
결말이 어떻게 될 지는 캐릭터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고, 심지어는 소설가도 모른다.(물론 소설가는 안다. 어쨌거나 이 소설은 끝이 나니까) 
각자의 상상으로 결말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이 인생이고, 소설도 인생이니까,
소설 속의 캐릭터도 결국은 인생을 살아가는 거니까...

지금까지 읽은 폴오스터의 소설 가운데서 가장 좋았던 것 같다.
'기록실로의 여행'은 폴 오스터의 2006년 최신작이며, 그 대단했던 '공중 곡예사'나 '뉴욕 3부작'보다 더 강한 흡인력과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참으로 독특한 소설이다.
분량은 고작 200여 페이지로 작가의 전작들에 비해 상당히 짧은 편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엄청난 것이다. 심지어 그 끝이 열려 있어, 책을 덮고도 아직 소설이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독자의 머릿속에서, 일상에서, 무의식중에 끝없이 이어지고 있을 것만 같은 소설이다.  

소설 속 노인이 감금된 방 안에 홀로 갇혀 정체성을 찾고, 스스로 실존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처럼, 폴 오스터라는 작가도 아마 그런 치열한 고뇌와 탐구를 거듭하면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할 것이다. 소설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타자는 영원한 타자일 뿐, 나의 문제에 큰 도움을 주지 못 한다. 결국 혼자만의 싸움이고, 노력이며, 고통이고, 즐거움이다. 그 지독한 과정을 열렬히 사랑하고, 즐기지 못 한다면 진정한 소설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산다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제한된 공간, 제한된 자유 안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탐구하고, 증명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만 하는 무모하고 고된 작업. 그러나 그 작업을 한 순간이라도 멈추게 된다면, 존재는 순식간에 공백(blank)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인생은 미완으로 남을 것이다. 쓰다 만 미완의 원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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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탐험가들 모중석 스릴러 클럽 8
데이비드 모렐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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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에게 별 다섯 개 짜리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한 치의 지루함도 없고, 한 치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그래서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최고'라고 말 할 수 있는, 바로 이런 소설. 

패러곤 호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환희와 좌절, 숨겨진 아픔과 공포의 역사도 함께 간직하고 있는, 지금은 문을 닫은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철거를 눈앞에 두고 있는 거대한 화석 같은 건물이다. 
밤 열 시. 다섯 명의 크리퍼(도시탐험가)들이 지하터널을 통해 패러곤 호텔로 잠입을 시도한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탐사다. 버려진 건물이나 시설 등에 잠입해 그곳에 서려 있는 과거의 시간과 그 안에 깃든 추억들을 음미하고, 잠들어 있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거대한 공포가 그들을 삼켜 버린다. 그 낡은 건물은 벗어날 수 없는 악몽 속으로 크리퍼들을 인도한다. 100년의 시간이 숨 쉬듯 살아있는 섬뜩한 과거의 신전 속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괴물이 그들의 숨통을 조여온다.  

이제 크리퍼들의 목적은 오직 살아남는 것. 출구가 완전히 봉쇄된 암흑의 공간 속에서 크리퍼들은 살아남기 위해 보이지 않는 적과 사투를 벌인다. 금고 속에 갇혀 있던 정체불명의 한 여자는 이런 말을 한다. 
'그가 오고 있다'
'그는 우리 모두를 죽일 것이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
그러나 늦었다.
'그'는 이미 호텔에 있었고,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옥 같은 폐건물 속에서 크리퍼들은 한 명씩,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
크리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그'의 정체는 무엇이며, 패러곤 호텔에 숨겨진 잔혹한 비밀은 무엇일까?
두터운 과거의 시간층 속에 숨겨져 있던 진실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소설은 밤 아홉 시부터 시작하여 여덟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그린다.
여덟 시간 동안 상상도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평온했던 크리퍼들의 신상에 엄청난 변화가 온다. 추억이 공포로 바뀌고, 탐험이 사투로 바뀌고, 과거가 현실로 바뀌고, 삶이 죽음으로 바뀐다.
데이비드 모렐은 소설을 어떤 식으로 써야 독자를 끝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지를 제대로 아는 작가다. 그는 거의 정공법적인 방식으로 호러와 서스펜스의 진수를 보여주다가 별안간 예상치 못한 반전을 터뜨리며 엄청난 박진감과 카타르시스로 독자를 마지막까지 악몽의 끝으로 내몬다.
마치 영상을 보듯 생생하게 펼쳐지는 역동적인 서사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숨막히는 스릴, 지루한 틈을 주지 않는 긴박한 사건과 위기의 연속...  
'장르'의 특성을 떠나 떠나 모름지기 '소설'이 갖춰야할 최고의 미덕, '재미'로 완전하게 무장을 한 작품이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독자는 작가의 손아귀에서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 한다. 

이 소설은 서스펜스 스릴러로 분류하기보다 호러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무난할 듯 싶다. 최고의 호러소설에게 주어지는 '브램 스토커 상'을 2006년에 수상한 작품이며, 무엇보다 스티븐 킹의 최신작이었던 '셀'보다 '공포'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체감 공포'와 '호러적 재미'면에서 이 작품을 능가하는 호러소설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물론 '호러적 재미'가 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다. 작가는 그 유명한 영화 '람보'의 원작인 '퍼스트 블러드'로 데뷔를 했었다. 장르적 재미 이면에 진지한 고찰과 감동을 깔아놓을 줄 아는 훌륭한 작가다. 게다가 작가는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취재와 조사, 연구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소설 속에 리얼리티가 살아있다.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숨막히는 공포와 손에 잡힐 듯한 리얼리티가 멋진 조화를 이루며 '걸작'이 탄생되는 것이다. 
호러소설의 세계적인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븐 킹과 딘 쿤츠 등도 이 작품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현재 영화 제작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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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사카 고타로의 상상력은 기상천외하면서 따뜻하다. 그의 상상력에는 진한 감동과 여운이 묻어난다. 무심코 스쳐 지났던 문장의 의미가 나중에야 되살아나며 짙은 향을 내뿜는다. 그 향은 황홀한 칵테일처럼, 음악처럼 우리를 기분좋게 취하게 한다.  

이번 연작 소설에서 이사카 고타로는 '치바'라는 사신을 등장시킨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일반적인 사신의 모습과 이미지를 깔끔하게 배반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사신이다. 전설의 고향에 단골로 등장하는 저승사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소설을 읽으면 대략 난감해진다.  

고타로가 창조한 사신은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인간과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다. 다만 인간의 습성들을 잘 이해하지 못 하고, 인간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인간과 대화를 나누면 늘 조금씩 핀트가 어긋난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음악이다. 인간은 모두 사라져도 좋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이 만들어 낸 음악도 사라지게 될 터이니, 다만 그것이 걱정이다. 할 수만 있다면 며칠이고 음반 매장에서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감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마땅히 해야할 일이 있다. 일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이니까 해야만 한다. 사신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 죽음에 임박한 인간을 일주일 동안 지켜보고, 그의 죽음까지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일을 한다.
여섯 개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여섯 명의 인간들을 지켜본다.
죽음에 임박한 인간을 지켜보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고민을 듣고, 진심을 가늠하고, 상황을 파악하다, 가可, 불가可(보류)의 판단을 내린다. '가'가 되면 예정대로 죽는 것이고, '보류'가 되면 죽음은 미뤄진다.
그러나 대부분이 '가'다. 죽음이 임박한 인간은 예정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죽는다면 이상하지만, 사신이 찾아왔다는 것은 때가 되었다는 얘기다.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억울한 일도, 두려운 일도, 특별한 일도 아니다. 배가 고파 밥을 먹는 것이나, 잠이 와서 잠을 청하는 것이나, 푸른 하늘을 보고 싶어 고개를 드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순수한 일이다.  

작가는 '죽음'을 통해 인간의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조명한다. 또한 '삶'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담담하게 재해석한다.
행여 죽음이 목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하지만 결과는 같다. 그리고 그것은 목전에 다다른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고, 대부분 그 시기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살다가 죽는 것.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일이다.
그러니 당연한 결론이지만 살아 있는 순간을 늘 최선의 시간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죽음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삶이다.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최선을 다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에 있어서 최선이란, 그 의미를 깨닫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생의 마지막 한 순간까지 즐겁게 웃다가 어느날 눈부신 태양을 바라보듯, 가만히 눈을 감는 것.

치바가 사신임을 알아챈 한 노파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죽음은 전혀 특별하지 않죠. 하지만 중요한 일이지요. 예를 들면 말이에요, 태양이 하늘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특별한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태양은 중요하잖아요. 죽는 것도 똑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요. 

인간에게 죽음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특별한 일은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죽음은 그저, 중요하고, 자연스럽고, 눈이 부셔서 그만 눈을 감는 일일 뿐이다.

수록된 단편들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것은 맨 처음에 실린 '사신의 정도'와 맨 마직막 작품인 '사신vs노파'였다. 나머지 단편들도 모두 재미있고, 작가의 또다른 연작 소설 '칠드런'처럼 마지막에는 예상치못한 반전, 혹은 진실들을 하나씩 숨겨두고 있다.
사신이 등장한다고 해서 칙칙하거나 우울하지 않다. 감상에 젖어 늘어지지도 않고, 눈물이나 찔찔 짜면서 신파로 흐르지도 않는다. 여차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사카 고타로는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 작가는 영리하고, 독자를 배려할 줄 안다. 칙칙하고 우울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여섯 편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날씨는 흐리지만, 내내 죽음을 다루고는 있지만, 시종 재기발랄한 유머와 따스한 감동이 넘치고, 예상치 못한 유쾌한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작가의 애정이 듬뿍 담긴 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진정 쿨한 소설이란 바로 이런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사카 고타로는 '사신의 정도'로 제5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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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냥 - 상
텐도 아라타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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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텐도 아라타의 '가족사냥'은 살이 떨리도록 끔찍하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소설이다. 공포소설로 봐도 무방하고, 추리소설로 봐도 좋다. 실제로 텐도 아라타는 추리소설에도 일가견이 있는 작가다. 

텐도 아라타는 엽기적인 설정과 묘사, 추리소설을 방불케하는 치밀한 구성과 절묘한 복선, 그리고 가슴저미는 메시지와 강렬한 상징들로 병들어가는 현대 가족을 해부하고, 그 내부를 정교하게 그려낸다.
소설은 시작부터 무시무시한 흡인력을 내뿜으며, 독자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끈다. 이 책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권보다 더 두꺼운 하권이 훨씬 속도감 있게 읽히는 특징을 보인다. 즉, 서사가 진행되고, 사건의 실마리가 하나씩 풀릴 수록 흡인력에 가속이 붙는다는 얘기다. 끝으로 갈수록 강한 힘을 발휘하는 소설. 웬만한 작가가 아니고서는 쓰기 힘들 것이다.
 
부모에게 폭력을 가하고, 등교를 거부하던 문제의 십대 청소년들이 끔찍한 방법으로 부모를 고문하고 살해 한 후, 스스로도 목숨을 끊는 엽기적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이 희대의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피비린내 나는 서사가 전개된다.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중년의 형사, 사건과 간접적으로 연루된 젊은 미술교사, 미술교사에게 원인모를 적의를 보이는 여학생, 그리고 가정문제를 상담받는 상담원들... 떨어진 한 방울의 꿀에 개미들이 모여들듯, 그렇게 사건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모여들지만, 그들 모두는 각자의 문제를 하나씩 안고 있고, 그 문제는 다름 아닌 각자의 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두들 가족 때문에 갈등하고, 다투고, 괴로워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무서워 스스로 가족에 얽매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도 있고, 가족들에게 진실한 사랑을 얻고자 스스로를 학대하거나 비뚤어지는 이도 있고, 자기 가족에 대한 잘못을 다른 가족들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병든 가족들, 사랑이 없는 가족들, 내부에서부터 썩어가고, 무너지는 가족들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도 있다.
살인사건은 조금씩 해결되지만, 그들 가슴 속에 맺힌, 그들 가족 속에 얽힌 문제들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사건에 얽힌 문제는 해결되도, 인간에 깃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인가?
소설을 읽어나갈수록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사회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 구성원들에 의해 엮어지느 관계들이, 정녕 이렇단 말인가? 이토록 문제투성이고, 끔찍하고, 절망적이란 말인가?
 
이 소설에서 집과 흰개미는 상당한 상징성을 지닌다. 텐도 아라타는 가족의 병폐를 집과 흰개미로 대치하여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하며 탄탄하게 서사를 진행시켜 간다. 
흰개미가 집의 내부를 갉아먹기 시작하면 그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신경을 쓰면, 사전에 막을 수 있다. 징후를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흰개미는 절대로 자연발생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날아든다. 최초의 침입 흔적을 빨리 발견하고, 대처한다면 집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집의 내부에 흰개미가 둥지를 틀고, 사방에 구멍을 낸 상태라면, 구제의 길은 없다. 집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고등학생 딸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아버지는 어느날 자신의 집을 방문한 흰개미 구제 요원이 딸의 문제에 참견을 하려 하자, 우리 가족 문제니까, 당신은 신경을 쓰지 말라, 고 한다. 그러자 그 요원이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의 문제라고 혼자 고민하다가 결국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사례를 많이 보아왔다, 고.
자신의 집에 흰개미가 없다고,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다. 흰개미는 언제든 다른 곳에서 날아들 수 있으니까. 또한 자신의 집을 침입한 흰개미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안 될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집을 장악한 흰개미는 언제든지 옆집으로, 또 다른 집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흰개미의 구제를 위해 온 가족이, 온 이웃이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집을 구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 구제의 방법은 쉽지가 않다. 미지근해서도, 극단적이 되어서도 곤란하다. 그래서 가족을 구성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닌 것 같다.
텐도 아라타는 특별한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엄청난 사건들을 통해 무시무시한 현실을 보여주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하라고 충고만 해 줄 뿐이다. 이 소설은 제9회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수상했는데, 바로 미야베 미유키가 '화차'로 받았던 그 상이다.
 
마지막 한 장까지 살벌한 이 책을 덮고나서, 가족의 필요성에 대해 새삼 고찰해본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가족 속에서 자라고, 성장한 후에는 당연하다는 듯 새로운 가족을 만든다.
왜, 그래야만 하는 걸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살 수 없는 것일까?
불편하거나 낙오자의 삶을 살게 되는 걸까?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은 '정상'이 아닌 건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가족이란 도대체...
생각할수록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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