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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실로의 여행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방 안에 한 노인이 갇혀 있다. 노인은 고립되어 있다.
노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며, 이곳이 어디인지, 왜 갇혀 있는 지 알지 못 한다. 처벌 받기 위해 갇힌 것인지, 보호 받기 위해 갇힌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노인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 한다. 그의 앞에는 한 묶음의 원고와 몇 장의 사진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사진 속의 인물들이 한 사람씩 노인을 찾아온다. 노인은 자신 앞에 놓인 원고와 사진과 방문객들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복원해 내야 한다.
원고와 사진과 방문객들에게서 하나씩 실마리를 찾아가며 노인은 끊어진 이야기를 완성시키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은 모호하기만 하고, 진실의 실체에 접근해 간다고 생각할수록 두려움과 혼란은 가중된다. 진실은 무엇이며, 노인의 과거는, 그리고 현재는, 또 미래는 어떤 모습이며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까...?
폴 오스터는 기발한 상상력과 감각적이고 치밀한 구성으로 시작부터 소설 속 캐릭터를 혼란에 빠뜨린다. 캐릭터가 혼란을 거듭할 수록 독자도 혼란에 빠진다. 캐릭터가 진실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뒤집히기도 한다. 진실은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보이다가도 순식간에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버린다. 진실은 시종 숨어 있다. 아니, 어쩌면 진실따위는 애초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가는 그것을 캐릭터에게 스스로 찾게 하거나, 혹은 스스로 만들기를 종용하는 듯 하다.
그래서 캐릭터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간다. 오로지 머리(상상) 속으로만 진행되는 운명이지만, 그것은 나름 제모습을 갖춰가며, 캐릭터에게 실존의 색깔을 입힌다. 캐릭터는 소설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재구성하고, 미래를 그려나간다. 물론 난관은 많다. 우선 몸이 자유롭지 못 하다는 게 가장 큰 장애다. 그는 어쨌거나 원고(감금된 방) 속에 갇힌 인물이니까...
결말이 어떻게 될 지는 캐릭터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고, 심지어는 소설가도 모른다.(물론 소설가는 안다. 어쨌거나 이 소설은 끝이 나니까)
각자의 상상으로 결말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이 인생이고, 소설도 인생이니까,
소설 속의 캐릭터도 결국은 인생을 살아가는 거니까...
지금까지 읽은 폴오스터의 소설 가운데서 가장 좋았던 것 같다.
'기록실로의 여행'은 폴 오스터의 2006년 최신작이며, 그 대단했던 '공중 곡예사'나 '뉴욕 3부작'보다 더 강한 흡인력과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참으로 독특한 소설이다.
분량은 고작 200여 페이지로 작가의 전작들에 비해 상당히 짧은 편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엄청난 것이다. 심지어 그 끝이 열려 있어, 책을 덮고도 아직 소설이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독자의 머릿속에서, 일상에서, 무의식중에 끝없이 이어지고 있을 것만 같은 소설이다.
소설 속 노인이 감금된 방 안에 홀로 갇혀 정체성을 찾고, 스스로 실존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처럼, 폴 오스터라는 작가도 아마 그런 치열한 고뇌와 탐구를 거듭하면서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할 것이다. 소설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타자는 영원한 타자일 뿐, 나의 문제에 큰 도움을 주지 못 한다. 결국 혼자만의 싸움이고, 노력이며, 고통이고, 즐거움이다. 그 지독한 과정을 열렬히 사랑하고, 즐기지 못 한다면 진정한 소설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산다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제한된 공간, 제한된 자유 안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탐구하고, 증명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만 하는 무모하고 고된 작업. 그러나 그 작업을 한 순간이라도 멈추게 된다면, 존재는 순식간에 공백(blank)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인생은 미완으로 남을 것이다. 쓰다 만 미완의 원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