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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1
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서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갓 대학을 졸업한 23살의 앤드리아 삭스는 패션 전문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된다. 패션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런웨이 세계를 군림하는 이 여왕 같은 존재는 그러나 사실 변덕이 죽끓듯 하고,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대부분의)사람들에게 무시와 경멸을 보내는 악마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앤드리아는 일 년간 미란다 밑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기로 계약을 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해온 성공을 위해서. 그리고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괴로워한다. 일 년간,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몇 십 년에 걸쳐 당할 수모와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앤드리아는 버티고 또 버틴다. 그녀는 오직,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렇게 11개월을 보낸다. 그 사이에 절친했던 친구가 알콜 중독이 되어가고, 4년 가까이 사귀어 온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흔들리고, 가족들과 소원해지고 있다는 것을 앤드리아는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아는 척 할 수 있는 시간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고대했던 성공이 눈앞에 보이지만, 앤드리아가 진실로 사랑했던 사람들은, 떠나온 섬처럼 까마득히 멀어져 있다. 하나의 성공을 손에 쥐는 대가로 그녀는 너무도 가혹한 희생을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 자신이 붙잡아야 할, 두 발을 딛고 일어서야 할 진정한 현실인지... 성공과 사랑 사이에서 엄청난 딜레마를 겪는다. 그리고 그 잔혹하리만큼 눈물겨운 기로에서 앤드리아는 마침내 선택한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 은수의 삶과 사고에는 크게 공감 할 수가 없었다. 나름 고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은데도 먼 나라 이야기처럼, 혹은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부푼 환상과 피상적인 재미만 느껴질 뿐 가슴 깊은 공감이나 울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연하남과의 동거를 비롯한 은수의 각종 연애담들이... 그런데 정작, 거의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이 젊은(차라리 어리다고도 할 수 있는) 금발의 백인 여성이 쓴, 이 소설은, 왜 그리도 구구절절 공감이 가든지... 왜 이 미국인 작가가 쓴 소설이 우리나라 작가가 쓴 소설보다 더 공감이 가는 건지...
그래, 인생이란 이런 것이지... 현대사회에서 직장을 구하고, 일을 한다는 것은, 성공을 꿈꾼다는 것은... 이렇게 비정하고, 고통스럽고, 잔혹한 것이지...
가련하게 울부짖는 저 어린 사회 초년생이여... 저 살벌한 세상의 중심으로 뛰어 든다는 게, 그 정글 같은 세계를 헤치고 나간다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란다... 그렇고 말고... 낭만? 달콤함? 화려함? 아니면 낯선이와의 황홀한 원 나잇 스탠드? 그런 것들은 기대하지 말아라. 그야말로 드라마나 영화, 소설 속, 혹은 돈 많은 백수들의 세계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들이란다. 우리네 현실은, 사회는, 삶은 만만치가 않단 말이다. 앤-드리-아, 우리 아이들이 해리포터 신작을 남들보다 하루 빨리 읽고 싶어해. 앤-드리-아, 저번에 내가 빈티지 서랍장을 본 그 골동품 점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필요해. 앤-드리-아, 45분 안에 내가 읽을 연설문을 써 가지고 와! 네가 사회에서 해야 할 일들이란 바로 이런 것들이란 말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그런 일이 아닌, 맨 땅에, 맨 손으로, 하루만에 베르사유 같은 궁전을 지어야만 하는, 그런 뜨악하고 무지막지한 일들이란 말이다. 물론 그런 일들 속에서도 이성과 논리와 체계가 존재한다. 하다보면 느껴진다. 그러니 일단 해야한다. 뭐? 어떻게 출간되지도 않은 해리포터 신작을 미리 구할 수 있냐고? 그 골동품 점의 상호가 뭐냐고? 어느 지역에 있는지 모른다고? 45분 안에 연설문을 쓸 수 없다고? 앤-드리-아, 그런 일을 하기 위해 네가 여기에 있는 거라고!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당장 이 사회에서 떠나라고! 지금껏 올라왔던 저 보잘것없는 몇 계단을 도로 굴러서 맨 밑바닥으로, 네 응석과 넘치는 감정을 황홀히 받아줄 가족의 품안으로 돌아가 방문을 걸고 잠그고 갓난아기처럼 나태하게 살란 말이다.
앤드리아는 무조건 해야만 했다. 미란다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출간되지도 않은 해리포터를 하루 전에 구해야만 했으며, 미국 땅덩어리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모르는 그 골동품 점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내야만 했으며, 45분만에 짧고 간결한 연설문을 써내야만 했다. 그녀는 그 모든 일들을 기적처럼 해낸다. 미란다를 위해서. 아니, 스스로의 성공을 위해서! 친구와 가족과 사생활을 팽개치고...! 수프와 스타벅스 커피로 끼니를 때우며 그렇게 열심히, 열심히 계단을 올라간 것이다.
갓 대학을 졸업한 꿈 많은 젊은이가 현실의 세계로 진입해 성공의 궤도에까지 오르기란,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고, 또 다른 세계가 탄생되어지는 일 만큼이나 험난하고 엄청난 것이다. 현실의 세상이란 교과서에 배운 것처럼, 텔레비전 속에서 분칠을 한 배우들이 조잘대는 낯간지러운 세상처럼, 동화처럼, 환상처럼, 아름답고 선한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악마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와 같은 곳이다. 온통 화려하게만 보이는 패션계도 내부를 들여다보면 애처로울 만큼의 땀방울과 살을 벨 듯한 냉기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굽이 10센티미터나 되는 멋들어진 스켈레토 구두를 신고 폼을 내기 위해서는 뒤꿈치가 타는 듯한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고, 4만 달러짜리 샤넬 드레스를 입기 위해서는 살인적인 체중감량을 감수해야만 하듯, 거의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듯한 고생을 겪어야만 겨우 골프공 만한 작은 성공하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세상의 법칙이며, 성공의 법칙인 것이다.
앤드리아는 미란다라는 악마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배워간다. 세상을 보는 시각과 현명히 대처하는 사고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마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분야의 성공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무수한 악마들로 북적인다. 그 중에서 앤드리아는 고작 프라다를 입는 악마 하나만을 상대했을 뿐이다. 그녀는 아직 젊었고, 성공을 위해서는 더 많은 계단을 올라야만 한다. 그리고 더 많은 악마를 만날 것이다. 하지만 계단을 하나씩 오르고, 악마를 하나씩 상대할수록 그녀는 더 성숙해지고, 현명해질 것이다. 아름답고 성공적인 삶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하나의 악마가 되어갈 쯤에 그런 것들을 완전하게 터득할런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살든... 성공을 꿈꾼다면 반드시 고통을 감수하고 악마와 어울리든, 스스로 악마가 되어야만 하니... 세상이란, 참, 정말로, 과연, 만만찮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