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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천운영의 세번째 소설집이자, 네번째 책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나는 천운영의 전작을 읽게 되었다.
등단 8년만에 네 권의 책이라... 다소 과작을 하는 듯 싶지만, 천운영은 부지런한 작가다. 첫 장편 <잘 가라, 서커스> 이후 약 일년간 소설을 쓰지 못했다고는 했지만, 그녀는 비교적 꾸준히 단편을 발표해왔다. 지난 한 해동안만 네 편의 단편을 각 문예지에 발표했다. 각종 문학상 후보에도 자주 올랐다. 특히 작년과 올해에 연달아 이상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었다. 그녀는 늘 자신의 자리에서 꾸준히 글을 쓰고, 평론가와 독자로부터 쉼 없이사랑을 받아왔다.
천운영의 소설이 평단과 독자에게 골고루 사랑 받는 이유는 색깔 때문이다. 그녀만의 색깔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 너무 강렬해서, 너무 자주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녀만의 강렬한 색깔. 천운영의 소설집을 단 한권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그 색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뾰족한 바늘로 살갗을 파고들어 한땀 한땀 화려한 얼룩을 내는 문신처럼 강렬하고 소름 돋는 색채. 혹은 이미지.
첫 소설집 <바늘>부터 천운영은 늘 인간의 몸, 혹은 여자의 몸을 서슴없이 주무르고, 파헤치고, 열어 보이는 작업을 해왔다. 그것은 두번째 소설집 <명랑>에서도 이어졌고, 세번째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에 이르러서도 작업은 쉼없이 진행되고 있다. 몸의 탐구. 그것은 곧 감정의 탐구이며, 삶의 탐구에 다름없다. 감정을 담고 있는 몸, 감정을 담고 삶을 살아가는 몸. 인간의 몸을 들여다보면 그 인간의 살아온 인생과 살아갈 인생, 그리고 그 인생의 골짜기마다 서려있는 감정과 눈물과 욕망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세번째 소설집에 와서는 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더 깊이 있게 담아내려고 한다. 천운영의 강한 특징 중에 하나인 철저한 취재에 입각한 사실적 묘사에 소설적 상상력과 환상성이 넘치지 않을 정도로 가미된다. 그래서 어떤 작품은 필시 처참하고 눈물겨운 인생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풀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화나 판타지, 혹은 꿈결 같은 아련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환상인듯, 현실인듯 모호한 경계 속에서 인간의 몸 속에 내재된 욕망의 덩어리들을 가차없이 터트리고, 주무르고, 독자로 하여금 그 진실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와 '내가 쓴 것', 그리고 '백조의 호수'가 특히 좋았다.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바늘>, <명랑>에서 보여진 천운영만의 특색과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었고, '내가 쓴 것'은 내용만 따지고 본다면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형식의 소설가 소설을 썼다는 실험성과 대중적인 흡인력은 훌륭했다. '백조의 호수'는 욕망의 허위와 파국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화장실에서의 어이없는 싸움부터 라스트의 반전에 이르기까지 그 기막히게 매끄러운 연결과 시선을 잡아끄는 서사의 힘이 가히 압권이었다.
나머지 다섯 편의 작품도 대체로 나쁘지 않았다. 이번 소설집만의 특색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표제작 '그녀의 눈물 사용법'도 충분히 천운영스러워서 좋았으며, 이미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통해 읽었던 '내가 데려다 줄게'의 몽환적인 이미지와, 혼혈 2세 소년의 성장 삽화를 보는 듯한 '알리의 줄넘기', 시종 유머러스하면서도 섬뜩한 분위기로 이어진 '후에'도 막힘없이 잘 읽혔다.
조금 안타까운 것은 천운영 자신이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편이라고 했던 '노래하는 꽃마차'가 개인적으로 가장 지루하게 읽혔다는 것이다. 뭐 개인차가 있을 테니, 이 단편이 가장 좋게 읽힌 독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천운영의 작품은 두번째 소설집 <명랑>에 실린 단편 '명랑'이다.
여하튼 천운영은 여전히 나에게 소중한 작가다. 최근 한국 작가들에게 워낙 실망을 많이 한 터라, 천운영이 고맙게까지 느껴진다. (윤성희, 천운영, 김애란... 내가 좋아하는 한국 여류소설가 삼인방이다) 천운영의 다음 작품집이 벌써부터 기다려지지만, 그녀는 때가 되어야 다음 작품을 낼 것이고, 나는 그 '때'를, 기꺼이 기다려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