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챕터
위니 리 지음, 송섬별 옮김 / 한길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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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용기와 극복의 힘을 전하는 위니 리의 자전 소설!

성폭력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에 가해진 무차별한 폭력에 저항하는 강렬한 메시지!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다. 늘 밝게 웃던 친구가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서 나타나 '내 동생이 어젯밤에 성폭행을 당했어'라고 말했던 순간이다.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으로 끌려가 낯선 남자로부터 폭력을 당했다는 것이다. 동생이 피를 흘리며 현관문을 열었을 때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던 친구의 떨리는 음성이 여전히 생생하다. 내가 마중을 나갔었더라면 하는 후회의 말로 점철된 회환들, 이제 얘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줘야 할지 모르겠다며 괴로워하던 말들.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은 흐릿하지만 이것이 내가 가장 가까이서 느낀 성폭력에 대한 감정들이다. 이마저도 피해자 가족이 되어버린 친구에게서 전해들은 간접적인 경험에 불과한 것이어서, 나는 분명 우리 모두가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른 데서나 일어나는 먼 이야기인 것처럼 여겼던 것 같다.

 

 

 

   최근 들어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미투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게 되어서야 나는 마침내 우리 사회가 성폭력 문제에 이토록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소속 집단 내에서, 권력자의 힘에 의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에게서 혹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서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다수의 피해자들이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를 죽인 채 살아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이토록 내가 순진했었나,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언제고 터져 나왔을 일들이겠으나 그나마 이제서라도 제 목소리를 내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덕분에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소설로 써 발표한 작품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놀라움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럽고도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뒤따르게 한다

 

 

   <다크 챕터>는 타이완계 미국인인 저자 위니 리가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 소설이다. 위니 리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해 영화 제작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커리어를 쌓아나가던 자신을 비비안이라는 소설 속 인물에 투영함으로써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닥친 상처와 고통들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 자신의 존재가 반으로 나뉘어져 지난 29년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이 완전히 분리된 것만 같은 그날의 생생한 감각들은 2008년 4월의 토요일, 볕 좋은 봄날의 아침 웨스트 벨파스트의 글렌 포레스트 파크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쁜 일상과 고단한 업무를 뒤로하고 혼자서 여기저기를 여행하며 하이킹 하는 것을 좋아하는 비비안은 벨파스트의 등산로에서 마주친 소년이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술인지 약인지 모를 것에 취한 듯 어쩐지 말을 횡설수설하고 수상쩍은 기색이 있지만 자꾸만 자신에게 들러붙어 따라오는 소년이 그저 귀찮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이를 따돌렸다고 생각하고 인적이 드문 등산로를 따라 벨파스트 힐즈에 거의 다다른 순간, 비탈 아래 새하얀 점퍼 차림의 그 아이를 발견하고 만다. 뛰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하지만 어느새 소년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질질 끌려가게 된다.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속으로 외치며 그가 요구하는 것들을 힘겹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녀의 공포와 수치심은 너무나 적나라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앞서 성폭력 피해의 진실을 드러낸 위니 리의 용기가 자연스럽고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고백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나는…

강간을 당한 사람이다.

강간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느낌이 가장 싫었다. 이 딱지는 떨어지지도 않는 저속한 싸구려 전단지처럼 그녀에게 철썩 붙어버린다. 활활 타오르는 쇠로 된 뜨거운 낙인이 그녀의 살갗에 지워지지 않는 화인을 남긴다. / 169p

 

 

어쩌면 인생이란 이렇게 임의의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는 걸까.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일이 무작위로 일어난 거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10분 전이었다면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 228p

 

 

 

   소설은 그녀가 성폭행을 당하고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와 공황장애 같은 트라우마가 어떤 식으로 삶을 갉아먹는지 세세히 묘사해간다. 야심차고, 사교적이고, 에너지를 마구 뿜어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간의 삶은 이제 저 우주 너머 어딘가에 존재할 뿐, 현실의 자신은 그저 텅 빈 책에 불과해졌음을 느낀다. 그녀의 삶은 아파트 안에 갇힐 것이고, 진짜 비비안은 사라지고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그날의 상처를 마주하는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비비안은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살아남기 위해 성폭력을 견뎌냈던 것처럼 살아가기 위해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사회 시스템에 도움을 요청하고 친구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용의자로 붙잡힌 소년과의 법적 투쟁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아니면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익명의 얼굴 하나에 불과할까? 이제는 통계로만 존재하는 중국인 여성. 정체성도 개성도 없는 '성폭행 피해자'라는 선입견을 투사하는 텅 빈 배.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는 요 며칠간 그렇게 텅 빈 배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영혼도 본질도 없이 비어버린 것 같다. 어쩌면 이 회색 호수에 영원히 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가 정박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 266p

 

 

 

   소설 속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마련된 사회적 시스템이 얼마나 얄팍한 것들인지 빈번하게 등장한다. 피해자가 스스로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회에 문을 두드려야 하는 현실과 그것을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더욱이 사건의 정황을 밝히기 위해 몇 번이나 그날의 고통을 반복해서 말해야 하는 시스템은 피해자들에게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또다시 너무 심한 폭력을 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할 만큼 또 다른 형태의 폭력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 사회가 이에 대한 대응을 얼마나 철저하게 마련하고 있는 것인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다. 어제 갔던 성건강 클리닉에 전화를 했지만, 클리닉 직원들은 PEP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기다리라고 하더니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바람에 그녀는 토요일에 성폭행을 당했고 어제 클리닉에 방문했지만 PEP에 대해 묻는 걸 잊었다는 말을 세 번이다 했다. / 274p

 

 

 

 

 

 

   이 책이 여타의 소설과 대비될 만큼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피해자의 입장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까지 교차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째서 이러한 폭력이 발생하는 것인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가해자의 시선으로 균형 있게 사건을 조직해나간다. 고작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가정으로부터 얻은 폭력과 사회로부터 얻은 차별이라는 폭력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어디서부터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되짚어야 하는 것인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그들은 자꾸 묻는다. '그 여자에게 한 짓을 후회하는가' 그럼 다른 여자들은 내가 훔친 지갑이나 핸드폰,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후회해야 하나? 그럼 내 인생을 통째로 후회해야 하나? 그런데 내가 어째서 내 인생이 어떤 건지도 모르고 별반 관심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후회해야 하는가? 내 인생이 그 사람들 중 누군가의 인생에 끼어들기 전까지는 아무도 내 인생에 관심이 없다. / 325p

 

 

 

   "애초에 제 잘못이 아닌 일을 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 저자가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는 편지 중에 쓴 글이 아직도 마음에 남는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못한 채 숨어버리는 현실 속에서 성폭행은 피해자들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그녀의 용기 있는 메시지가 모두에게 위안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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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어디에나 있어! - 제21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기획 부문 수상작 사회와 친해지는 책
이남석.이규리.이규린 지음, 김정윤 그림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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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더 즐겁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디자인에 관한 모든 것!

이제껏 몰랐던 디자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식 쏙쏙 어린이 교양책! 

 

 

 

   직업상 우리 부부는 주말이 되면 아이와 함께 새로운 디자인이 돋보이는 창의적인 공간을 자주 찾곤 한다. 신랑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고, 나 역시 한때 출판사에 몸을 담으며 편집 디자인과 관련된 업무를 주로 해왔기 때문에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참신한 발상이 돋보이는 공간, 혹은 사물에 유독 관심이 많은 편이다. 비록 아이가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디자인이라는 개념 하에 기존의 발상을 해부하고 새롭게 조합해보려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시도들을 아이에게 꾸준히 노출시켜줌으로써, 아이의 사고력과 창의력을 키우는 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

 

 

 

   이 때문에 '디자인'을 주제로 한 어린이 교양서가 출간되어 무척 반가웠다. 디자인이란 것이 단순히 미적 감각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마케팅과 공공성 등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만큼, 어린이들에게도 이에 대한 개념과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책이 나왔기에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

 

 

 

우리 모두를 위한 디자인의 가치

 

 

   <디자인은 어디에나 있어!>는 창비에서 실시한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를 통해 당선된 작품으로 어린이를 위한 디자인 입문서이자 교양서다. 사용자 경험 디자인이나 소셜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저자들이 모여 어린이들이 어렵지 않게 디자인의 개념과 가치를 이해하고 디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준다. 특히 쌍둥이인 유진이와 예린이가 디자인 엑스포를 방문해 그곳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디자인 엑스포로 들어선 유진이와 예린이는 가장 먼저 대형 스크린을 통해 다양한 디자인 분야를 소개하는 영상을 보게 된다. 흔히들 알고 있는 패션 디자인, 광고 디자인을 비롯하여 기업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시아이 디자인, 활자의 서체를 디자인하고 다양한 매체에 쓰이는 타이포그래피, 비상구나 화장실처럼 시설, 사물, 개념 등을 단순하게 그림 문자로 나타낸 픽토그램 등 디자인이란 이름의 다양한 영역들을 알게 된다. 이어 '유니버설 디자인'을 주제로 한 두 번째 부스에서는 장애,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 제품들을, '인간 공학 디자인'을 주제로 한 세 번째 부스에서는 인간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편안하고 효율적인 제품과 서비스, 환경을 고려한 제품들을 경험한다. 이곳에서는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이 직접 디자인 물품들을 만져보고 체험해봄으로써 디자이너가 어떠한 철학을 가치고 디자인을 실현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디자인 철학은 디자인을 할 때 방향을 잡아 주는 원칙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멀리 있는 목적지를 향해 떠날 때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나침반 같은 거지요." / 17p

 

 

"디자이너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관심이 많아요. 어떤 때 편안함을 느끼는지,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은 무엇인지 세심하게 관찰하지요. 덕분에 더 쓰기 좋은 키보드나 기발한 의자를 만들 수 있는 거예요." / 32p

 

 

 

 

 

 

   다섯 번째 부스에서 아이들은 디자이너들이 늘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창의적인 대안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하는 시도들을 엿보게 된다. 특히 네덜란드 디자이너 위르헌 베이의 진공청소기 의자는 가장 인상적이다. 의자 모양의 커다란 먼지 봉투가 진공청소기와 연결되어 있는 제품이다. 재미있는 시도이기는 하지만 누가 봐도 예쁘지도 않고 불편하다고 여길 만하다. 안내원 역시 널리 쓰이는 상품으로 만들기에는 실패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지같이 삶의 부정적인 부분도 의자처럼 쓸모 있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전하고자 한 디자이너의 시도를 높이 평가한다. 이 외에도 '재활용'이라는 개념의 리사이클링, '새활용'이라는 개념의 업사이클링 통해 환경을 위한 디자인과 버려진 자동차 방수포를 활용해 가방을 만드는 한 사례를 통해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디자인의 따뜻한 철학을 일깨워준다.

 

 

 

 

 

 

디자인의 가치가 높아지는 시대, 디자인으로 생각하는 법

 

 

   안내원은 유진이와 예린이에게 디자이너가 꿈이 아니더라도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 디자인이 사고력과 창의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래에는 좋은 디자인 제품과 서비스를 알아보고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학교에 제출하는 리포트나 발표 수업에서만 하더라도 서체나 그림과 같은 디자인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디자인을 잘 이용할수록 내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기에 용이한 것은 물론, 세상을 더 편리하고 안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데 디자인이 이롭게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디자인을 보다 가깝게 느낄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다.

 

 

"디자인의 출발점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디자이너는 삶을 어떻게 하면 더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지요. 그러다 보면 문제점이 드러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도 떠올라요. 세상의 다양한 변화를 예민하게 알아채는 감각도 중요하지요." / 79p

 

 

"좋은 디자이너라면 통합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꼭 디자이너가 꿈이 아니더라도 디자인을 공부하면 창의력과 사고력을 키울 수 있어요. 그래서 어린이들이 디자인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 80p

 

 

 

 

 

 

   평소 디자인에 관심 있던 예린이와 달린 유진이는 디자인 엑스포에 입장할 때만 하더라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점차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일상생활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책의 말미에 저자 역시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생각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지고, 좀 더 창의적이며 세상을 이롭게 만들기 위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고 하니 우리 아이에게도 이런 기회를 자주 열어주기 위해 고심해봐야겠다. 끝으로 이 책이 많은 아이들에게 세상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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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롭 - 위기의 남자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5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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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의문의 죽음을 동시에 추적하는 형사 해리 보슈의 대활약상!

섬뜩한 진실과 거듭된 반전, 치밀하고도 흡인력있는 전개로 눈을 뗄 수 없는 범죄 스릴러!

 

 

 

   여름이 찾아올 무렵, 서점가 문학 코너에 두드러지는 변화가 있다면 바로 '스릴러' 및 '추리 소설'과 같은 장르 소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이다. 한때 서점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나 역시 당시 유명 추리 소설 시리즈와 인기 있는 스릴러물만 뽑아서 진열할 계획을 세우곤 했다. 먼저 유명 작가들을 선별해 목록을 만들던 도중 나는 처음으로 마이클 코넬리라는 이름을 마주했다. 당시 그에 대한 첫인상은 생각 이상으로 작품 수가 상당하다는 것, 표지만 보아도 무척 하드보일드한 내용일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영화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의 원작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영화관까지 찾아가서 봤던 작품이라 대표적인 작품들을 엄선해서 진열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더 이상 그의 작품을 가까이 접하지 못했는데, 최근 들어 그의 작품이 미국 드라마로 방영되고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만 하더라도 무려 열다섯 편이나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왜 지금껏 읽어보지 못했지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바로 그 열다섯 번째 신작 <드롭: 위기의 남자>편을 읽고서야 뒤늦게 정주행하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외로운 코요테 같은 형사, 해리 보슈의 강렬한 범죄 스릴러

 

 

   이쯤되면 거의 실존하는 인물처럼 느껴질 것 같다. 오랫동안 형사 해리 보슈의 활약을 지켜봐온 독자들은 이제는 그냥 '믿고 보는 시리즈'라고 증언하는 걸 보면 말이다. 열다섯 번째 시리즈로 돌아온 <드롭: 위기의 남자>는 특수살인사건 전담반에 있던 보슈가 미제사건 전담반으로 돌아온 지 1년째 되는 해에 벌어진 사건들을 추적하는 사회 범죄 스릴러다. 그는 10년 전쯤 퇴직연금을 전부 수령하고 경찰국에서 퇴직했다가, 2년 후 경찰국의 퇴직유예제도 덕분에 경찰국으로 돌아와 남은 근속 기간이 기껏해야 이제 39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파트너인 데이비드 추와 함께 남아도는 사건과 특별한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건을 맡아서 수사하는 이른바 '깍두기' 팀으로 움직이며 자신이 맡을 사건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거의 10년 전쯤 보슈는 퇴직연금을 전부 수령하고 경찰국에서 퇴직했다.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그리고 2년 후에 경찰국의 퇴직유예제도(Deferred Retirement Option Plan, DROP) 덕분에 경찰국으로 돌아왔다. 드롭은 경험 많은 형사들이 경찰국에 오래 몸담으며 가장 잘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 마련된 제도였다. 보슈가 가장 잘하는 일은 살인사건 수사였다. 그는 7년 계약을 맺고 다시 돌아온, 이른바 '재생 타이어'였다. / 32p

 

 

 

 

 

 

   때마침 보슈 팀에게 1989년도에 발생한 미제 사건 하나가 맡겨진다. 피살자는 릴리 프라이스, 19세 여대생이다. 어느 일요일 오후 그녀는 베니스비치에서 룸메이트 한 명과 놀다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집으로 혼자 가던 중 성폭행을 당해 교살되었고, 이후 후미진 곳의 바위 위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정액은 없었으나 당시 피해자의 목 뒤쪽, 오른쪽 귀밑에서 작은 혈흔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최근에서야 다시 분석한 결과 클레이턴 S. 펠이란 자의 것으로 판명이 난 것이다. 펠의 전과를 보면 여러 차례 체포된 기록이 있고 공연음란죄와 불법 감금, 강간 혐의로 세 번 유죄판결을 받은 기록도 있기에 누가 봐도 그가 범인임을 의심할 수는 없으나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클레이턴 펠은 1981년생으로 사건이 발생한 1989년에는 불과 여덟 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고작 여덟 살인 아이가 자신보다 훨씬 큰 성인을 성폭행하고 교살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한편, 샤토마몽트 호텔에서 시의원 어빈 어빙의 아들 조지 토머스 어빙의 투신 사망 사건이 발생한다. 국장실의 호출로 보슈에게 이 투신 사망 사건까지 함께 떨어지는데, 이제 막 미제 사건 하나를 전달받은 보슈로서는 동시에 두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난제를 떠안고만 다. 일명 '하이 징고(high jingo)'. 경찰국 수뇌부가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사건 혹은 정치적 압력이 많이 들어오는 사건을 일컫는 말로, 정치적 외압 때문에 수사권을 휘두르기가 쉽지 않은 것은 불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거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어빙 의원이 특별히 그를 지목하여 수사 요청을 한 것이라 더더욱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어빙으로서는 대안이 없었던 게 분명했다. 비록 적대 관계에 있는 사이이긴 하나 공평하고 진실만을 쫓는 보슈의 진정성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자네가 그랬지. 모두가 중요하거나 아무도 중요하지 않다고. 그 말이 기억나는군. 이 사건이 그 말이 진심인지를 시험하겠군. 적의 아들도 중요한가? 적의 아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할 것인가? 적의 아들을 위해서도 철저히 수사할 것인가?" / 42p

 

 

"뭐가 까칠하다는 거야? 내가 맡은 사건에 정치적인 간섭이 들어오는 건 딱 싫어하는 거? 이거 알아? 오늘 다른 사건도 하나 맡았어. 열아홉 살 아가씨가 강간당하고 해변가 바위 위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어. 게들이 그 아가씨의 몸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대. 그런데 그 사건을 해결하라고 나를 불러낸 시의원은 한 명도 없었어. 웃기지 않아?" / 89p

 

 

 

옳은 길을 찾기 위해 틀린 길을 헤매야 한다

 

 

   보슈는 사건에 대한 정보와 결론을 종용하는 어빙의 끊임없는 외압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논리대로 사건을 수사해나간다. 다른 형사들이 간과하는 부분들에서 진실의 냄새를 맡고 예리하게 추적해가는 기민함을 보이는 동시에, 곳곳에서 자신의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딸과 더 오래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책임 앞에서 고민하고, 늘 막연하게 거부해왔던 '악'에 대한 이중성 앞에서 깊은 회의를 느끼기도 하며 조직 내의 구조적인 모순 앞에서 절망하기도 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덕분에 해리 보슈 형사에 대한 이미지가 꽤 입체적으로 그려져 왜 이 기나긴 시리즈를 계속 읽어야 하는 것인가 대한 물음에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악이 환경의 영향을 받아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해. 클레이턴 펠이 바로 그런 경우인 것 같고. 하지만 펠처럼 악을 실현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똑같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도 악한 행동을 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 그러니까 환경 말고 다른 것도 있는 거야. 등식의 반대편. 사람들은 잠재된 무언가를 가지고 태어나고 특정한 환경하에서만 그 무언가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 아닐까? 모르겠어, 해나. 정말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걸. 확실히는 모를 거야. 가설만 갖고 있을 뿐이고. 그 가설들은 길게 보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피해를 막지는 못할 테니까." / 232p

 

"이게 바로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예요. 이자와 같은 인간들 때문에. 이런 괴물들은 우리가 막아 세울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거든요. 숭고한 일이에요, 우리가 하는 일. 그걸 잊지 마세요. 선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했는지 기억하시라고요." / 387p

 

 

 

 

 

 

   <드롭: 위기의 남자>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섬뜩한 진실, 뜻밖의 반전으로 사회 범죄 스릴러가 갖춰야 할 요소들을 고루 갖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경찰과 이를 둘러싼 사회 조직의 내부를 직접 들여다보듯 사실적으로 그려나가면서 다양하고 현실적인 캐릭터들로 플롯의 완성도를 높인 점이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장르를 좋아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읽는 내내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몰아치듯 내달릴 수 있었던 점이 무척이나 좋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길과 조직의 논리 사이에서 부딪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제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앞으로의 시리즈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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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일기 1
자까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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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 없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빵빵 터지는 리얼 캠퍼스 라이프 웹툰!

 

 

 

 

   친척 오빠가 다니는 대학교에 합격하여 사전답사도 할 겸 밥도 얻어먹을 겸 캠퍼스를 홀로 찾아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사실 대학 생활에 대한 이렇다 할 로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캠퍼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여긴 신세계다!'라는 느낌이 팍 들었더라죠. 묵직한 전공 서적을, 그것도 원서로 된 알 수 없는 제목의 책들을 저마다 한 쪽 손에 들고 다니는 언니와 오빠들을 보며 이들이야말로 수능 따위에 찌들지 않은 진정한 지성인의 모습이다라고 느꼈어요. 같은 과 점퍼를 입고 지나가는 무리를 보며 학교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에 살짝 전율이 일기도 했고요. 원하는 강좌를 선택해 자율적으로 일정을 짤 수 있고, 교정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다니며 캠퍼스 커플이란 것도 해볼 수 있고, 대학 축제 때는 연예인까지 온다는 말에 대학 생활은 역시 멋진 거구나… 뭐 이런 착각 같은 것을 제대로 했더랍니다. 실상은 학기 내내 밤샘 리포트 작성과 조별 발표, 아르바이트를 뛰느라 꽃 같은 대학 생활 따윈 없었습니다.

 

 

 

   새내기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들은 여기에 없단다라고 말하게 되는 때도 오더란 말이지요. 하지만 졸업을 하고 사회로 진출해 마침내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보니 또 이때만큼 재미있었던 시절은 다시없을 것이란 걸 부쩍 느끼게 되는 요즘입니다. 날이 좋아서, 혹은 날이 너무 좋지 않아서 수업이란 걸 가끔 빼먹는 호사도 누려보고, 밤 늦게까지 부어라 마셔라 해도 튼튼한 간 덕분에 다음 날에 또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부어라 마셔라 할 수 있는 젊음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일까요. 비록 꿈에 그리던 로망 넘치는 캠퍼스 따윈 없지만 그 시절, 가장 되돌아가고 싶은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웹툰 한 편이 있어 평소 찾아가며 재미있게 읽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까 님의 <대학일기>!

 

 

 

 

 

 

페이지 마다 빵빵 터지는 리얼 캠퍼스 일기

 

 

   네이버 웹툰으로 이미 <대학일기>를 접한 분들이라면 자까 님의 분신인 듯한 하얗고 동글동글한 캐릭터에 일단 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특히 이 순둥순둥, 몽글몽글한 귀여움이 현실 그림체로 돌변할 때마다 어찌나 깔깔거리고 웃게 되는지 그야말로 반전 매력이 쩐달까요. 작품을 보며 혼자서 큭큭 대고 웃는 제 모습을 행여 누가 보지 않을까 눈으로 흘깃 둘러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이 작품을 미처 알지 못했던 분들이라 하더라도 각종 SNS에 돌아다니는 짤을 통해 접하신 분들이 상당히 있을 거예요. 개인적으로 대학 생활을 이토록 현실적으로 재미있게 그려낸 작품이 또 있을까 싶어요.

 

 

 

 

 

 

   이렇듯 네이버에서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웹툰 <대학일기>가 두 권 분량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1화에서 100화까지 연재된 작품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낸 것인데, 휴대폰 화면을 넘겨가며 읽던 것을 지면으로 만나니 새로운 기분이 들었어요. 웹툰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4컷 만화 부록까지 수록되어 있으니 소장하는 즐거움까지 얻을 수 있고요.

 

 

 

   대학생의 일상을 담은 내용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 시기에 흔히 고민하게 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혹은 우리들의 소소한 일상을 말 그대로 일기처럼 다루고 있어 20대란 시기를 통과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한 내용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저도 겪었고 또 누군가가 겪고 있을 그런 일들 말이에요. 음… 10대가 읽는다면 20대의 현실을 미리 깨달을 수 있는 팩트 폭격이 될 수 있을까요? 뭔가… 사악한 웃음을 짓게 되는 30대입니다. 하하.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은 나도 모르게 풉, 하고 새어나오는 웃음이 민망해지지 않을 만한 장소에서 읽으셔야 한다는 것을 당부 드립니다. 페이지를 넘기다 재미있는 컷을 찍어 주변 지인에게 사진 전송을 하는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감히 자부도 해봅니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명탐정 코난>이 계속 어린 코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자까 님도 쭉 대학생인 채로 <대학일기>를 그려주심이… 죄송합니다.

 

 

 

(평소에 쓰던 서평글과는 다르게 써봤습니다. 이렇게 써 보는 것도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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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조커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5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이규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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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초유의 기업 테러를 두고 펼쳐지는 두뇌 싸움!

일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인간 심리의 밑바닥을 파헤치는 압도적인 소설!

 

 

 

 

   조커(Joker).

   트럼프 카드 게임에서 사용되는 조커는 일종의 와일드 카드다. 게임 내에서 조커는 다양한 역할을 한다. 때로는 최고위인 비장의 카드가, 때로는 유해한 카드가 되기도 하는 이 양면의 성격 때문에 우리는 조커 패를 손에 쥐게 되는 순간 마음이 동요되는 것을 느낀다. 내 손에 들린 이 조커 패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에 따라 판이 달라질 수도 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이와 같은 게임이라면, 기묘한 반전 혹은 나와 누군가의 인생을 쥐고 흔들 수 있을 만한 이 특수한 카드가 손에 들어오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1조 엔대 대기업의 운명을 쥐고 흔들기 위해 뭉친 '레이디 조커'

 

 

   <레이디 조커 1>은 세 권의 분량에 이르는 시리즈 중 그 첫 번째 책이다. 사상 초유의 대기업 테러를 다룬 이 소설은 일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인간 심리의 밑바닥을 파헤치는 작가의 치밀하고도 집요한 시선이 압도적인 필력으로 완성된 사회 범죄 미스터리다. 정경 유착 및 소외계층의 차별 등 일본 굴지의 대기업 히노데 맥주와 사회의 각종 부조리한 일면들로부터 희생당한 이들이 한 데 모여 기업 테러를 감행하고,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이는 고다 형사의 활약이 예상되는 소설이다.

 

 

 

   일명, 레이디 조커. 이들의 요구 조건은 현금 20억, 인질은 350만 킬로리터의 맥주다. 1조 엔대 대기업을 테러하기 위해 뭉친 다섯 남자는 스스로를 레이디 조커라 부르지만, 정재계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한 이 어마어마한 계획을 실행하기에는 다소 평범해 보인다. 약국을 운영하며 경마장을 찾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모노이, 장애인 딸을 키우는 트럭 운전수 누노카와, 이십 대 중반으로 작은 공장에서 일하는 일명 요짱, 재일조선인으로 신용금고에서 근무하는 고 가쓰미, 경시청의 현역 형사로 있는 한다까지. 성격도, 하는 일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뜻하지 않은 사고나 불운을 덧입고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살아가는 일본의 수많은 가장 혹은 청년들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수많은 영화와 다수의 작품에서 보이는 기업 테러 공모자들은 하나같이 특수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들의 계획은 무모해보일 정도다. 어째서 이들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이 위험천만한 테러를 감행하게 된 것일까.

 

 

 

   소설의 시작은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히노데 맥주 주식회사 가나가와 공장으로 장문의 편지가 도착하는데, 이를 작성한 오카무라 세이지는 히노데로부터 퇴사를 권고 받은 마흔 명의 직원들 가운데 하나다. 그가 쓴 편지에는 가난한 소작민으로 태어나 입양이 된 후 히노데 맥주에 입사하기까지 오카무라 그 자신의 개인사와 당시 회사 동료였던 노구치 등 피차별 부락민들이 벌인 노동 쟁의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빈궁을 면치 못했던 소시민들의 모습과 신분제도 하에 천민 부락민들이 겪어야 했던 차별들은 일본의 암울한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는 현대 사회로 접어들고 후세에까지 이어져 마침내 한 청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불의의 사고를 낳고 만다. 오카무라 세이지의 동생인 모노이는 자신의 손자가 히노데 맥주 회사로부터 아버지가 부락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험에 떨어진 뒤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깊은 회의에 빠져든다. 결국 경마장에서의 인연을 계기로 알게 된 네 남자와 합심하여 히노데 맥주와 모순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향해 묵직한 한 방을 내던지기로 결심한다.

 

 

 

"누노카와가 일전에 자기 딸을 두고 조커를 뽑은 격이라더군.

그때 문득 생각했어.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을 조커라고 한다면,

우리야말로 조커라고." / 258p

 

 

 

다들 겁에 질린 개처럼 미친 듯이 짖어대며 물어뜯기 바쁩니다. 허구한 날 일하고 먹고 자는 것밖에 모르는 생활 속에서 굶주린 기억이 골수에 사무치니 천해질 수밖에요. 냉정하게 생각하질 못하니 천할 수밖에. 그렇게 보면 이 나라 전체가 천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도망치면 부모 형제가 따돌림을 당하고 굶어죽을 테니 결국 전장에 나가기는 했지만, 천하다 천하다 해도 가난한 놈이 가난한 나라를 침략하는 것만큼 천한 게 없어요. 그걸 잘 아는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유로 살육을 저질렀으니, 인간이란 참으로 가련한 존재가 아닙니까. / 26p

 

 

이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온 차별이라는 긴 터널의 출구에서, 여전히 일부 남은 장벽을 방패 삼아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령 장벽이 철거된다면 그들 중 대부분은 또 터널 밖에 만연한 무지와 무관심을 규탄하며 새로이 장벽을 쌓고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사수하려 들지 않을까? 평등이니 차별이니 하는 것도 이렇게 서로를 보완하며 일부 사람들에게 존재이유를 제공하는 장치에 불과하지 않을까? 뒤집어서 보자면 그런 평등이나 차별과 무관했던 스물두 살의 아들은 그들이 말하는 세계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 63p

 

 

 

 

 

 

   소설은 히노데 맥주 회사를 노리는 범인 집단 '레이디 조커' 외에도 히노데 맥주 회사를 이끌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경영진들, 히노데 맥주 회사의 사장인 시로야마 쿄스케가 납치됨으로써 범인 집단이 노리는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하는 고다 형사 외 경시청 형사들, 누구보다도 발 빠르게 사건의 추이를 쫓아나가는 기자진들의 시점을 교차 반복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정치인과 교류하며 뒤로는 시중은행과 증권사의 금융 자본, 관청, 지하 금융이 한 데 얽혀 부패한 냄새를 풍기는 기업의 생리와 엄격한 상하 관계 속에서 불거지는 경찰 내부 조직의 알력들, 누구보다 먼저 사건을 쫓아가 보도해야 한다는 신문 기자들의 직업 생태계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회 시스템의 구조적인 모순과 이해관계들을 진중한 시선으로 읽어내고 다양한 인물의 시점을 치밀하게 교차시키면서 탄탄한 플롯을 완성시킨 저자의 필력에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다.

 

 

 

시로야마 역시 시대가 달라지리라고 예감은 했다. 활황기는 언젠가 천장을 칠 테고, 부동산과 주식은 하락세로 돌아설 것이다. 대량 소비를 즐기는 부자들의 시대가 끝나고 이어서 도래할 시대는 한마디로 '소시민적 결벽'이리라는 것이 시로야마의 예감이었다. 절약, 소형화, 간소화, 개인주의 같은 키워드로 표현할 수 있을 서민의 심정은 물질적 풍요를 포기하고 정신적 충실을 지향하며 사회에 '결벽'을 요구할 것이다. 결벽의 시대에는 정계와 은행, 기업의 체질도 그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기업이 이윤 추구에 앞서 사회적 의무와 윤리를 요구받을 시대는 생각보다 머지 않았다. / 98p

 

 

 

 

 

 

   1권의 초중반부까지는 사건의 발단을 풀어내는 과정으로 인해 속도감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으나 시로야마 사장이 납치된 이후부터는 쫓기듯 빠른 호흡으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만큼 흡인력 작품이라 무려 세 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마저도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뒤늦게야 안 사실이지만 이토록 남성적인 성격의 소설을 쓴 작가가 사실은 여자라는 것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놀라워하지 않을까.

 

 

 

   웬만하면 다음 편의 예고글을 미리 읽지 않는 편인데, 이 소설은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없어 나도 모르게 그만 읽고 말았다. 그런데 더 모르겠다. 레이디 조커는 과연 이 어마어마한 계획을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고다 형사는 사건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인지, 앞으로 펼쳐질 2권과 3권의 내용이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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