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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챕터
위니 리 지음, 송섬별 옮김 / 한길사 / 2018년 3월
평점 :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용기와
극복의 힘을 전하는 위니 리의 자전 소설!
성폭력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에 가해진 무차별한 폭력에
저항하는 강렬한 메시지!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다. 늘 밝게 웃던 친구가 망연자실한 얼굴을 하고서 나타나 '내 동생이 어젯밤에
성폭행을 당했어'라고 말했던 순간이다.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으로 끌려가 낯선 남자로부터 폭력을
당했다는 것이다. 동생이 피를 흘리며 현관문을 열었을 때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던 친구의 떨리는 음성이 여전히 생생하다. 내가 마중을
나갔었더라면 하는 후회의 말로 점철된 회환들, 이제 얘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줘야 할지 모르겠다며 괴로워하던 말들.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은
흐릿하지만 이것이 내가 가장 가까이서 느낀 성폭력에 대한 감정들이다. 이마저도 피해자 가족이 되어버린 친구에게서 전해들은 간접적인 경험에 불과한
것이어서, 나는 분명 우리 모두가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른 데서나 일어나는 먼 이야기인 것처럼 여겼던 것 같다.
최근 들어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미투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게 되어서야 나는 마침내 우리 사회가
성폭력 문제에 이토록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소속 집단 내에서, 권력자의 힘에 의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에게서
혹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서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다수의 피해자들이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를 죽인 채 살아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이토록 내가 순진했었나,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언제고 터져 나왔을 일들이겠으나 그나마 이제서라도 제 목소리를 내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덕분에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소설로 써 발표한 작품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놀라움보다는 오히려 자연스럽고도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뒤따르게 한다
<다크 챕터>는 타이완계 미국인인 저자 위니 리가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 소설이다.
위니 리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해 영화 제작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커리어를 쌓아나가던 자신을 비비안이라는 소설 속 인물에 투영함으로써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닥친 상처와 고통들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 자신의 존재가 반으로 나뉘어져 지난 29년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이 완전히 분리된
것만 같은 그날의 생생한 감각들은 2008년 4월의 토요일, 볕 좋은 봄날의 아침 웨스트 벨파스트의 글렌 포레스트 파크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쁜 일상과 고단한 업무를 뒤로하고 혼자서 여기저기를 여행하며 하이킹 하는 것을 좋아하는 비비안은 벨파스트의
등산로에서 마주친 소년이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술인지 약인지 모를 것에 취한 듯 어쩐지 말을 횡설수설하고 수상쩍은
기색이 있지만 자꾸만 자신에게 들러붙어 따라오는 소년이 그저 귀찮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이를 따돌렸다고 생각하고 인적이 드문
등산로를 따라 벨파스트 힐즈에 거의 다다른 순간, 비탈 아래 새하얀 점퍼 차림의 그 아이를 발견하고 만다. 뛰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하지만 어느새 소년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질질 끌려가게 된다.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속으로 외치며 그가 요구하는 것들을 힘겹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녀의 공포와 수치심은 너무나 적나라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앞서 성폭력 피해의 진실을 드러낸 위니 리의 용기가 자연스럽고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고백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나는…
강간을 당한 사람이다.
강간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느낌이 가장 싫었다. 이 딱지는 떨어지지도 않는 저속한
싸구려 전단지처럼 그녀에게 철썩 붙어버린다. 활활 타오르는 쇠로 된 뜨거운 낙인이 그녀의 살갗에 지워지지 않는 화인을 남긴다. /
169p
어쩌면 인생이란 이렇게 임의의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는 걸까.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일이 무작위로 일어난 거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10분 전이었다면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
228p
소설은 그녀가 성폭행을 당하고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와 공황장애 같은 트라우마가 어떤 식으로 삶을 갉아먹는지 세세히
묘사해간다. 야심차고, 사교적이고, 에너지를 마구 뿜어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간의 삶은 이제 저 우주 너머 어딘가에
존재할 뿐, 현실의 자신은 그저 텅 빈 책에 불과해졌음을 느낀다. 그녀의 삶은 아파트 안에 갇힐 것이고, 진짜 비비안은 사라지고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그날의 상처를 마주하는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비비안은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살아남기 위해 성폭력을
견뎌냈던 것처럼 살아가기 위해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사회 시스템에 도움을 요청하고 친구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용의자로 붙잡힌 소년과의 법적 투쟁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아니면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익명의 얼굴 하나에 불과할까? 이제는 통계로만
존재하는 중국인 여성. 정체성도 개성도 없는 '성폭행 피해자'라는 선입견을 투사하는 텅 빈 배.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는 요 며칠간 그렇게 텅 빈 배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영혼도 본질도 없이 비어버린 것 같다. 어쩌면 이 회색 호수에 영원히 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가 정박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 266p
소설 속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마련된 사회적 시스템이 얼마나 얄팍한 것들인지 빈번하게 등장한다.
피해자가 스스로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회에 문을 두드려야 하는 현실과 그것을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더욱이 사건의 정황을 밝히기 위해 몇 번이나 그날의 고통을 반복해서 말해야 하는 시스템은 피해자들에게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또다시
너무 심한 폭력을 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할 만큼 또 다른 형태의 폭력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 사회가 이에 대한 대응을 얼마나
철저하게 마련하고 있는 것인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고 물어볼 사람도 없다. 어제 갔던 성건강
클리닉에 전화를 했지만, 클리닉 직원들은 PEP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기다리라고 하더니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바람에
그녀는 토요일에 성폭행을 당했고 어제 클리닉에 방문했지만 PEP에 대해 묻는 걸 잊었다는 말을 세 번이다 했다. / 274p
이 책이 여타의 소설과 대비될 만큼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피해자의 입장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까지 교차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째서 이러한 폭력이 발생하는 것인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가해자의 시선으로 균형 있게 사건을 조직해나간다. 고작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가정으로부터 얻은 폭력과 사회로부터 얻은 차별이라는 폭력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어디서부터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되짚어야 하는 것인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그들은 자꾸 묻는다. '그 여자에게 한 짓을 후회하는가' 그럼 다른 여자들은 내가
훔친 지갑이나 핸드폰,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후회해야 하나? 그럼 내 인생을 통째로 후회해야 하나? 그런데 내가 어째서 내 인생이 어떤 건지도
모르고 별반 관심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후회해야 하는가? 내 인생이 그 사람들 중 누군가의 인생에 끼어들기 전까지는 아무도 내 인생에 관심이
없다. / 325p
"애초에 제 잘못이 아닌 일을 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 저자가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는 편지 중에 쓴 글이
아직도 마음에 남는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못한 채 숨어버리는 현실 속에서 성폭행은 피해자들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그녀의
용기 있는 메시지가 모두에게 위안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