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이 꽃피운 르네상스
박영택 지음 / 스푼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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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최고의 전문가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르네상스 미술과 역사 이야기!

청소년에서부터 어른들까지 르네상스 미술을 접하기 위한 가장 쉬운 해설서!

 

   tvN에서 방영하는 <요즘 책방: 책 읽어드립니다>란 프로그램을 특별히 즐겨보고 있다. 그 중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편 방송을 보면 유독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있는데,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중세 유럽의 역사와 미술 관련 책을 읽다보면 메디치 가문의 흔적을 흔히 마주치게 되는데, 이 방송에 의하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역시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기 위해 쓰인 책이라고 소개한다. 대체 이들이 당대에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기에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수많은 예술가와 과학자들이 메디치라는 이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고, 또 유례없이 다수의 위대한 작품들을 탄생시키게 된 것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메디치 가문이 꽃피운 르네상스』는 청소년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의 역사와 미술을 한꺼번에 배울 수 있는 책으로, 르네상스 전문가가 집필한 교양서답게 전문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어 앞선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좋은 해답이 되어주었다.

 

 

 

중세 미술에서 르네상스 미술로 넘어가기까지

 

 

   중세는 ‘종교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사회의 모든 면을 전적으로 지배했던 시기다. 그에 따라 로마 가톨릭교회는 미술에 장식적인 측면보다는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고 종교적 규범을 교육한다는 목적을 부여했고, 당연히 당시 그림이나 조각은 모두 종교적 내용을 소재로 할 수밖에 없었다. 즉, 신의 말씀, 천상의 세계, 죽음 이후에 갈 수 없는 낙원에 대한 이야기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교회에 속했던 중세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재주를 신에게 바치는 일, 이른바 신앙을 위한 봉사로 여겼다.

 

 

 

   그러다 14세기에 들어 유럽을 휩쓴 흑사병(페스트)으로 인해 유럽인들은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였고,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해왔던 신의 존재와 신의 은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중세 사회를 지배했던 로마 가톨릭교회는 위기에 처하게 되고, 교회의 최고 권위자인 교황의 권력도 위협(아비뇽 유수, 교회의 대분열)을 받게 되었다. 당시 유럽은 교회의 분열 못지않게 정치적인 변화, 프랑스와 영국과의 백년전쟁, 십자군 전쟁 등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상태였고, 그 사이에서 르네상스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시민 계급이 성장하기 이르렀다. 이제 유럽은 종교의 시대에서 국가와 개인의 시대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중세 교회를 연 교황이자 크리스트교를 더욱 체계화한 교황으로 알려진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Ⅰ, 재임 590~604)는 “글을 몰라 책을 못 읽는 사람은 성당의 벽면에 걸려 있는 그림을 읽도록 하시오.”라는 지시를 내렸어요. 미술이 좋은 교육 수단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무신자나 문맹자를 믿음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할 때 청각보다 시각적인 방법이 훨씬 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거예요. 무엇보다도 중세 미술, 즉 크리스트교 미술의 기본적인 사명은 포교였기 때문에 조형적인 아름다움이나 미학적인 특성보다도 도상들과 성경의 내용이 절대시되었어요. 따라서 그러한 미술은 감성적인 즐거움이나 미적인 체험을 얻기 위해 구상된 것이 아니라 말과 문장, 설교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었죠. / 17p

 

 

상업 중심의 시장 경제가 이루어지려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화폐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서로 통용되는 영역,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여러 규범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필요에 따라 요구되었던 것이 바로 강력한 통치와 법체계를 갖는 국가와 관료 체제입니다. 서로의 거래를 보호하는 체제가 있어야 안전한 상업 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인들은 절대적인 권력 체제를 선호하게 됩니다. 이는 교회가 삶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때와는 무척 다른 권력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경, 국가, 민족, 법체계 등으로 이루어진 근대 민족 국가의 필요성이 서서히 요구되면서 교회가 모든 부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잡았던 중세 봉건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가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 39p

 

 

 

 

 

  흔히 르네상스를 일컬어 ‘인간을 발견한 시대’라고 말하는데, 이는 신이 중심이 된 중세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 즉 모든 것을 신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보는 방식이 지배하는 세계로 전환되었다는 뜻이다. 이 무렵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부심을 찾기 위해서는 인간의 관심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세에서 현세로 끌어 내릴 수 있는 어떤 가치관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종교적인 가르침을 내세우는 삶 대신 자연과 인간에 중심을 둔 이른바 자연주의와 인문주의 사상이 새로운 가치로 탐구되었고, 이러한 탐구가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빛을 발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르네상스 문화와 예술이었다. 그리고 이 물결의 조짐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동되기 시작했다.

 

 

 

피렌체에서 발전된 르네상스와 그 중심에 있었던 메디치 가문

 

 

   왜 하필 피렌체였을까? 14세기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도시 국가 피렌체는 국제 교역과 은행업의 중심지로, 사업 도시답게 매우 현실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상인들의 도시였다. 모직 공업과 방대한 무역 규모, 은행업 등으로 막대한 이윤 추구와 이자 소득으로 부를 축적하게 된 피렌체의 신흥 상인들은 그들의 부와 명예를 과시할 수 있는 장소로 수도원을 이용하고, 성당을 치장하는 데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고리대금업을 통해 벌어들인 돈이라는 점을 이용해 일부를 교회에 반환하면 속죄한 것으로 여겨져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목소리도 한몫했다. 그에 따라 당대 최고의 화가들을 동원해 가족 예배실 내부를 호화롭게 꾸미는 내부 장식 등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고리대금업자인 아버지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들인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지은 예배당 내부에 그려진 벽화 <최후의 심판>이 대표적인 예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니는 것을 고귀한 명예로 삼고, 인간이 발전하여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로 인해 다분히 정적이고 수동적인 중세의 인간관에서 벗어나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인간관으로 변하였지요. 즉, 르네상스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세 시대처럼 신의 은총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간 스스로 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창조적인 인간주의를 지향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 38p

 

 

중세 미술의 기본 방침이란 ‘화가는 마음속에 있는 이상적인 상에 따라서 제작한다.’라는 것이었어요. 이미 로마 가톨릭교회가 정한 이상적인 기준이 있다고 한 것이지요. 반면 르네상스 미술인들은 정해진 기준에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본 그대로를 그리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고의 전환이지요. 이것은 중세 미술의 기본을 완전히 거부하는 자세입니다. / 46p

 

 

 

 

 

  신흥 상인들 중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할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성당을 건축하고 복원하는 데에 엄청난 재산을 기부하는 한편, 학자들을 통해 그리스·로마 시대의 학문을 복원하고 번역하는 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막대한 서적들을 수집해 도서관을 만들고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만들어 주었다. 아울러 당대 최고의 화가와 조각가, 건축가 들을 고용해 수많은 걸작들을 만들어 내게 했다. 이처럼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융성은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문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메디치 가문의 여유 있는 경제력과 자유로운 학문 연구의 지원은 개인을 자각하고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모든 사실의 근원을 캐내고자 하는 과학적인 연구로도 이어졌다. 또한 인간성을 추구하는 시민운동은 현실주의, 합리주의, 자연주의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피렌체에서 점차 작은 군주 국가로 전파되었고, 이내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기까지 했다. 책을 통해 이러한 과정을 쭉 살펴보다보면 한 가문의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들이 서양 미술의 가장 화려하고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들 가문의 후원이 없었다면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과 같은 거장들의 작품도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코시모가 피렌체의 국사를 맡아본 기간 동안 피렌체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고, 최고의 예술가들이 활동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만들어진 예술 작품은 대부분 ‘화려함’보다는 ‘장엄함’을 바탕으로 합니다. 코시모는 수많은 예술가와 건축가를 보호하고, 큰 규모의 건설 사업을 시도했습니다. 피렌체를 상징하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비롯하여 산 마르코 수도원, 산 로렌초 성당 등이 이때 새롭게 단장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술가들 역시 코시모의 후원을 받으며 제각기 자유롭게 기량을 발휘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당대의 뛰어난 예술가들이 불멸의 명작을 남길 수 있었으며, 그들의 작품으로 인해 르네상스 예술의 위대함이 활짝 피어났습니다. / 93p

 

 

브루넬레스키의 대표작은 바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이었습니다. 흔히 르네상스 초기 미술을 대표하는 인물로 건축은 브루넬레스키, 조각은 도나텔로, 이론은 레오네 바티스타 알베르티, 그림은 마사초를 꼽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은 고대의 로마 미술에서 수치 비례, 균형, 조화의 통일성, 기념비적인 예술성,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사실성, 재료 및 기술의 적절성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르네상스 미술가들에게는 커다란 수확이었습니다. 신의 말씀을 형상화한다는 중세 미술의 비유적인 상징주의적 세계가 인간 자신이 본 세계, 즉 살아 숨쉬는 세계로 바뀐 것입니다. / 101p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들은 ‘인간도 신처럼 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새로운 교리, 이른바 ‘헤르메스 주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로써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구원관이 피렌체에서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교리에 심취한 인문학자들은 성직자의 역할을 대신 맡았고, 예술 작품의 주제도 이들이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고대 로마 제국의 문화와 이교도로 여겨지던 그리스의 신들이 예술 작품의 주제로 적극 선정되기도 합니다. 바야흐로 르네상스 예술 작품에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는 전환점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 104p

 

 

 

 

 

 

   조반니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두 아들 코시모와 로렌초를 불러 놓고 “피렌체의 선하고 훌륭한 시민들을 존경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시민들은 우리 가문을 그들의 안내자로서 빛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 유언은 이후 메디치 가문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고, 후대에까지 줄곧 이어졌다. 덕분에 메디치 가문의 정치권력이 몰락한 뒤에도 그들이 남긴 방대한 문화유산은 흩어지거나 약탈당하지 않고 피렌체에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메디치 가문이 꽃피운 르네상스>의 저자는 바로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가 메디치 가문을 다시 살펴봐야하는 가장 큰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정치적 집권의 저력이 문화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둘째는 기업의 문화 후원을 가리키는 메세나의 중요성이 바로 그것이다. 공동체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정치가나 자본가, 지식인 들이 어떤 가치와 이상을 가져야 하는지, 또 미술에 대한 관심과 후원이 사회 구성원들의 지적·정신적 가치를 얼마나 고양시키는지, 새로운 창의성과 상상력이 한 사회를 새로운 세계로 밀고 나가는 데에 얼마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메디치 가문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교훈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피렌체의 인문학자들은 피렌체에서 펼쳐질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과거 고대 로마 시대의 문학 작품과 신화에서 찾았습니다. 이와 같이 보티첼리는 메디치 가문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시에 힘입어 고대 스리스의 정신과 르네상스의 정신이 유쾌하게 혼합된 그림을 그리는 한편, 인간의 아름다운 몸과 고귀한 정신, 자유로운 삶의 공기 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디치 가문이 추구했던 이상입니다. / 112p

 

 

코시모 1세는 막강한 권력을 통해 적극적인 예술 후원을 펼쳤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대표적인 미술 후원자 중에서 작품 주문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바로 코시모 1세였습니다. 하지만 코시모 1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미술 애호가이기보다는 미술을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강화하고자 한 인물이었습니다. 코시모 1세는 자신의 집권 과정에 철학자나 신학자, 역사학자, 인문학자 등 피렌체의 지식인들을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통치 시에 도움이 되도록 학자들에게 주제를 선정해 주고 글을 쓰게 하는 등 군주에게 봉사하는 문화 정책을 일관하였으며, 미술 후원도 그러한 목적으로 했다고 합니다. 특히 미술은 보는 순간 의미가 즉각 전달되며 암시적인 주제를 통해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만큼 정치 선전 시 이용 가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정치적 의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작품은 바로 자신의 초상화와 초상 조각이었습니다. / 124p

 

 

 

 

 

  <메디치 가문이 꽃피운 르네상스>는 중세 미술이 교회 중심에서 르네상스라는 인간 중심의 문화로 태동·발전된 과정을 비롯하여 그 중심에 있던 메디치 가문을 통해 얼마나 다양한 예술가들이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는지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듯 쓴 책이다. 덕분에 그간 다양한 미술사나 중세 유럽 역사에 관한 책을 읽었음에도 어렵게만 여겨졌던 르네상스 시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무래도 청소년들을 위해 쓰인 책이니만큼 중세 유럽과 르네상스 시대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더없이 좋은 안내서가 되어줄 것이다. 또 책 곳곳에 다빈치와 보티첼리, 도나텔로 등의 작품도 수록되어 있으니 그것을 감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게 읽힐 만한 책이라 꼭 읽어보시길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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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셀프트래블 - 2020-2021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정꽃나래.정꽃보라 지음 / 상상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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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를 즐기는 가장 완벽한 방법!

낭만과 여유가 가득한 꿈의 섬, 하와이 여행에 관한 모든 것!

 

   하와이. 어쩌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한번쯤은 꼭 품게 되는 꿈의 여행지로 이곳을 꼽지 않을까. 요즘은 하와이를 대체해 상대적으로 물가가 싼 동남아시아를 찾는 관광객이 늘고 있지만, 아무래도 휴양지하면 단연 하와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얼마 전에 TV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남궁민이 하와이에서 촬영을 하다 쉬는 틈에 바다거북을 보기 위해 해변으로 찾아가는 장면이나 서핑을 하며 여유를 만끽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추운 겨울을 이불 속에서 전전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저 화면만 보아도 마음이 설렐 지경이었다. 푸른 야자수를 배경으로 하와이 원주민들이 추는 멋진 훌라춤과 하와이안 뮤직을 감상하고, 환영과 축복 그리고 감사의 의미를 지닌 레이를 목에 두르고 신선한 로컬푸드를 만끽한 뒤 세계 3대 커피 중 하나로 꼽힌다는 코나 커피를 마시고 해변으로 걸어 나가는 이 기막힌 상상만으로도 어쩐지 행복한 기분이지 않은가.

 

 

 

 

 

 

알로하~ 하와이에서 꼭 해봐야 할 모든 것

 

 

   쌍둥이인 <하와이 셀프트래블>의 두 작가는 하와이의 매력을 꼽는다면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쨍한 날씨, 맑은 공기, 에메랄드빛 바다, 푸른 하늘, 웅장한 대자연의 매력에 ‘사람’이 더해져 하와이가 완성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 어느 곳보다 “알로하”, “마할로”라는 인사에 담긴 그들의 진심 어린 따뜻한 마음과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기원한다.

 

 

 

   책은 하와이 여행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오아후를 비롯해 저마다의 개성을 갖춘 마우이, 빅아일랜드, 카우아이를 중심으로 필수 여행지들을 소개한다. 본문인 지역별 주요 스폿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하와이에 대한 기본 정보를 비롯하여 ‘가기 전 자주 묻는 질문 8가지’를 통해 하와이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와의 경우 비자가 필요하지는 않으나 사전에 인터넷을 통해 전자여행허가제를 신청해 발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다는 점, 한국보다 비싼 물가에 팁 문화가 있어 예산을 잘 고려해야 한다는 점 등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더욱이 하와이에서 지켜야 할 법률과 규칙이 한국보다 더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어 책에 적힌 유의사항들은 반드시 숙지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이 외에도 일 년 내내 즐길 수 있는 하와이 축제, 여행 전 알아둘 하와이 역사와 문화, 알아두면 쓸모 있는 하와이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비롯해 저자가 추천하는 일정별 코스, 하와이에서 만날 수 있는 핫 스폿과 먹거리 등을 하이라이트로 소개해놓고 있으니 하와이를 떠나기 전에 미리 살펴보고 가자.

 

 

 

횡단보도 건널 때 스마트폰 사용 금지_

하와이에서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스마트폰을 사용하면 적발 시 $15~99의 벌금이 부과된다.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주의할 것. 단, 긴급연락번호인 911을 사용할 때는 위법 대상에서 제외된다. 디지털카메라, 태블릿, 노트북 등 전자기기를 사용하면서 건너는 것도 같은 행위로 간주한다. / 36p

 

 

하와이 음식점 이용 매뉴얼_

패스트푸드점, 테이크아웃 전문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음식점은 입장한 순간부터 직원이 안내할 때까지 대기해야 하며, 테이블마다 담당 서버가 있어 자리에 앉은 다음 메뉴가 정해지더라도 주문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큰 목소리로 손을 들어 직원을 부르는 것은 매너 위반. 서버가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어보기 전까지는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자. 만약 서버가 오지 않으면 주변에 있는 직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Excuse me”라고 부른 다음 부탁하면 된다. / 148p

 

 

 

 

 

 

   하와이는 계절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좋은 날씨와 경치를 자랑하고 있어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즐길 거리가 풍부하다고 한다. 저자가 꼽은 ‘하와이에서 꼭 해야 할 일 베스트 10’을 살펴보자면, 청량한 하와이 비치에서 물놀이 즐기기, 서핑이나 훌라 댄스, 우쿨렐레 같은 하와이 전통 문화 체험하기, 호놀룰루에서 쇼핑 삼매경에 빠지기, 지역적 특색과 독특한 문화가 더해진 핫플레이스 방문하기, 전 세계의 식문화가 만나 독특하면서도 재미난 맛을 선보이는 하와이 로컬 푸드 맛보기, 빅아일랜드 코나 지역에서 생산하는 코나 커피 음미하기, 하와이 왕국 시절의 문화와 풍습을 소개하는 역사 명소 둘러보기, 대자연이 선사하는 감동의 자연 만끽하기, 당일치기나 1박을 통해 오아후섬을 이웃하는 섬들 둘러보기, 와이키키 비치가 보이는 호텔에서 호캉스 누리기 등을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오아후의 쿠알로아 랜치에서 사륜구동차, 크루즈, 승마, 전동바이크와 같은 시를 넘치는 액티비티를 경험해보는 것도 특별한 추억이 될 듯하다.

 

 

 

 

 

 

오아후 OAHO_

‘하와이’ 하면 떠오르는 호놀룰루, 와이키키, 노스 쇼어, 진주만 등의 단어는 8개의 주요 섬 가운데 오아후섬에 있는 지역과 명소를 이르는 말이다. 즉, 하와이 여행이라는 것은 실은 오아후 여행을 말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와이 여행의 핵심이자 하와이를 대표하는 오아후는 주도 호놀룰루가 위치한 하와이 제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1845년부터 하와이 왕국의 수도로 활약하며 역사적 발자취를 남겼고 그 유산이 지금도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다. 관광,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하와이 전체 인구 중 80%가 살고 있으며, 도시적인 분위기와 대자연의 풍경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지역이다. 촘촘하게 늘어선 호텔과 상업시설 사이로 푸른빛 바다와 하늘이 가슴 뻥 뚫리듯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굴곡진 산맥 아래로 광활한 자연 풍광이 고혹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대조적인 모습을 즐길 수 있다. 전통문화 체험, 먹거리, 쇼핑 등 어느 하나 빠짐없이 만족감을 채워주는 최고의 관광지임이 틀림없다. / 224p

 

 

 

   무엇보다 <하와이 셀프트래블>을 읽으며 만족했던 것은 하와이의 독특한 문화와 그들이 규칙으로 삼고 있는 여행 매너들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관광객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기본 예의! 뿐만 아니라 관광객으로 혼잡한 음식점보다는 현지인이 즐겨 찾는 맛집이나 숨은 명소까지 알차게 구성해 소개하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 하와이만을 소개하는 여행가이드북 치고는 좀 두껍다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자유여행자들이 하와이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고려한 책이라는 게 확연히 느껴진다.

 

 

 

 

 

 

   하와이 하면 역시 뭐니뭐니해도 와이키키 비치! 하와이 원주민어로 ‘분출하는 물’이라는 뜻으로, 맑고 깨끗한 물이 풍부하고 어린이나 노약자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해서 더 좋은 곳이다. 와이키키는 호놀룰루를 넘어 하와이를 대표하는 초승달 모양의 해변으로 서쪽 힐튼 하와이안 빌리지부터 동쪽 카피올라니 파크까지 약 3km의 비치를 일컫는다고 한다. 왕의 휴양지로 이용된 와이키키 비치는 사실 7개의 비치를 총칭하는 단어라고! 저자는 각 해변이 지닌 특징과 풍경이 달라 여유만 있다면 2, 3곳을 골라 방문하는 것도 좋다고 한다. 하지만 바쁜 일정에 쫓기는 여행자라면 숙박하는 호텔 부근의 비치를 이용하거나 와이키키의 현관문 쿠히오 비치만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하와이를 떠올리자면 아름다운 비치와 푸른 자연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1790년에 분화한 이후 현재까지 휴화산으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910m의 분화구를 보유하고 있는 마우이의 할레아칼라 국립공원에서 일출을 보고, 세계 각국의 천체 관측소가 모여 있는 빅아일랜드의 마우나 케아에서 별자리를 관측하는 경험도 특별할 것 같다. 이처럼 <하와이 셀프트래블>은 하와이의 주요 명소뿐만 아니라 숨은 명소, 하와이의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들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어 이곳을 여행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꽤나 만족스러울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식당, 숙소, 주소, 가는 법, 요금 등 여행에 있어서 유용한 각종 팁까지 알차게 소개하고 있으니 꼭 참고하면 좋겠다. 책의 마지막에는 하와이에 관한 일반 정보, 출입국수속법, 하와이어, 영어 회화 등의 정보도 함께 제공하고 있으니 초보 여행자라고 두려워말고 차근차근 따라해본다면 누구나 만족스러운 여행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사실 하와이는 그저 막연히 우리가 꿈꾸는 지상낙원의 황홀한 이미지만 있을 뿐 이렇다 할 뚜렷한 정보는 많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하와이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지금 당장 떠나기에는 부담이 있지만, 언젠가 하와이로 떠난다면 그때도 꼭 셀프트래블을 이용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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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 2호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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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노래처럼, 곱게 갈린 커피의 은은한 향기처럼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가느라 수고한 당신을 위한 스탠딩에그의 따뜻한 커피에세이!

 

 

   사각사각(엄밀히 생각하면 서걱서걱, 혹은 드르륵드르륵에 가깝다).

   칼리타 핸드밀에 원두를 넣고 곱게 갈릴 때 나는 소리가 참 좋다. 아니, 밀봉이 되어 있던 갓 볶은 원두를 꺼낼 때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고소한 원두향을 맡은 순간부터 이미 나는 매료된 상태다. 드리퍼에 알맞게 간 원두를 넣고 이제 2분 남짓한 시간 동안 정성을 들여 물을 내릴 때, 나도 모르게 호흡을 가다듬어가며 경건해지는 그 마음까지도. 한때는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왕창 부어 꿀물처럼 마신다고 놀림을 받던 흑역사도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섬세하고도 정교한 커피 맛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마도 카페에서 커피 만드는 법을 배우고부터였을 것이다. 혹은 더 거슬러 올라가 인테리어를 하는 남편을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카페를 찾아다닌 것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동안에 커피로 인해 기억되는 추억도 생기고, 커피를 마셨던 공간으로 인해 기억되는 사람도 늘어났다. 고작 한 잔의 마실 것에 불과한데, 커피는 내게 가장 달콤한 여유와 안정을 주었다. 한 뼘 크기의 믹스 커피에서부터 풍성한 우유 거품으로 만든 라테에 이르기까지, 그날의 분위기와 기분에 따라 다른 커피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내 하루도 매일 특별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에 나는 커피가, 아직도 마시고 싶은 커피가 많아서 더 좋다.

 

 

 

 

The Best Coffee is The Coffee You Like.

당신이 좋아하는 커피가 최고의 커피입니다.

 

 

   왠지 책을 펼치면 아몬드 계열의 원두향이 맡아질 것만 같은 아담한 책 한 권을 만났다. 평소 「오래된 노래」와 「여름밤에 우린」란 노래를 좋아해서 내 플레이리스트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뮤지션, 스탠딩에그의 에세이다. 게다가 커피에세이라니. 미처 몰랐던 사실인데 스탠딩에그의 멤버 에그2호님이 망원동에서 ‘모티프 커피바’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그들의 음악적 색채만큼이나 책 곳곳에서 드러나는 커피에 대한 특유의 감수성도 허투루 읽히지 않는다. 적어도 매일 수십 잔의 커피를 만들어보고, 맛과 향의 미묘한 차이를 혀끝의 감각과 코끝의 감각으로 느끼며, 그 한 잔을 위해 카페를 찾는 사람들의 얼굴을 수도 없이 마주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갓 추출한 에스프레소 한 잔에서, 우연히 뛰어 들어간 카페에서, 뒷골목의 카페에서 만난 바리스타와 나눈 “I like it"이라는 한마디에서 일상의 바이브를 느끼고 그만의 감각적인 언어로 풀어쓴 여러 에피소드들이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커피가 우리의 무미건조한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고, 내일을 다시 기대하도록 만들게 하는 그 무엇이 된다는 것을, 물과 에스프레소가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듯 우리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라는 그 깨달음에 자연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세상엔 여전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오랜 시간 여전할 때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어느 날 우리로부터 그 여전한 것들을 순식간에 앗아버리곤 한다...(중략)...이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삶이 우리에게 야박한 탓이다. 그래서 이 삶 속에서 하루를 버텨야 하는 나는 오늘 연희동 길을 걷고, 매뉴팩트 커피로 가기 위해 16개의 작은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오늘도 이 안에 가득한 ‘여전함’들에 한 번 더 안도한다. / 28p

 

 

실제로 매일 수십 잔의 커피를 만들다 보면 똑같은 원두, 똑같은 방식이라 하더라도 매번 그 맛이 미묘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는다. 그렇다. 만약 당신이 어느 날 평생 잊지 못할 커피 한 잔을 마시게 된다 하더라도 당신 또한 그날의 커피와 똑같은 커피를 다시는 마실 수 없단 이야기다. 그러니 맛있는 커피를 대할 때면 천천히 한 모금씩 입에 머금을 때마다 그 순간에 흐르는 음악과 주변의 공기, 빛과 온도, 앞에 앉은 사람의 표정을 기억하기 위해 온 감각을 집중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근사한 순간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 60p

 

 

 

 

   나를 비롯한 우리 대부분은 언젠가부터 SNS를 통해 다른 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은밀히 동경하는데 익숙해지고 있다. 누군가가 올린 근사한 커피 한 잔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인생 커피라고 추켜세우는 해시태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거기다 시선을 압도하는 멋진 인테리어까지 겸비한 카페라면 당장 우리의 주말을 그곳에서 채워갈 생각으로 마음이 앞서가기도 한다. 우스갯소리로 내가 커피를 마시러 가는 건지, SNS에 사진을 올리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에그2호님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몇 년 전 라이프스타일이 근사해 보여 인스타그램을 팔로잉하던 A씨가 올린 한 장의 사진-그의 손에 들린 투명한 플라스틱 컵, 그 컵에 인쇄된 하늘색 병 모양의 로고와 블루보틀이라는 감각적인 네이밍, 자신의 ‘인생 커피’라는 A의 코멘트, 그리고 수천 개의 ‘좋아요’-에 압도되어 그 순간 이미 뉴올리언즈를 내 인생 커피로 삼아버렸다고 고백한다(이 말에 아직 블루보틀을 접해보지 않은 나는 뉴올리언즈를 검색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스위스 취리히의 뒷골목에 자리한 작은 카페의 창문 앞에 멈춰 서서 ‘인생 커피’라는 단어의 무분별함에서 오는 피로감과 그 말미에 밀려오는 ‘인생이란 단어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부터 마침내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누군가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찾아간 유명 카페에서 인증 샷에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의 안식처처럼 찾곤 했던 작은 뒷골목의 어느 카페가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참 오랜만에 그곳을 떠올렸다. 없어지지는 않았겠지, 조만간 그곳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모금 입안에 넣자 몽글몽글한 느낌이 적절한 온도로 퍼지고, 혀 깊은 곳부터 잘 익은 포도의 달콤함이 진하게 와닿더니 이어서 화사한 ‘보라색’이 한가득 확 퍼졌다. (그래, 라벤더의 향이다.) 따뜻한 커피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가면 마지막엔 지나간 달콤함과 함께 삽싸름하고도 화한 허브의 느낌이 입안에 남는다. 깔끔한 피니시였다.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을 넣고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게이샤를 느끼기 위해 모든 신경을 내 입안에 집중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가는 라벤더 향을 힘겹게 따라가고 있었다. / 53p

 

 

나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근사한 노래 제목을 적은 메모지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오, 그런데 그 미지근한 커피 맛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카페 내부에 흐르는 음악들-캐러멜 시럽보다 달곰쌈쌀하면서 우유만큼이나 부드러운 음악, 에스프레소 같은 진한 풍미를 지닌 솔 뮤직-에 진즉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커피 맛을 이런 식으로 평가해도 되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저는 커피 맛을 평가하고 싶지 않아요. 그저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즐기고 싶어요.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요.” / 80p

 

 

  책을 읽다보면 그가 런던에서 마신 플랫화이트를, 도쿄에서 마신 게이샤를 한 모금 마셔보고 싶어진다.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LP의 아날로그 사운드가 평범한 아메리카노마저 특별하게 만드는 베드포드 애비뉴의 “파이브 리브스”도 가보고 싶어진다. 언제든 스스로 커피를 만들어 마실 수 있는 바리스타들이 일부러 ‘돈을 내서 마시고 싶다던’ 아이스 큐브 라테 맛집 연남동의 “도깨비 커피집”에도. 카페를 연 지 2년 만에 찾아온 커피의 권태감을 잊게 해줬다던 롯폰기의 블랙 커피마저도. 블랙 커피는 분명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그가 보았던 오래된 두 친구의 연주를 나도 볼 수만 있다면 쓴 커피도 어쩐지 달게만 느껴질 것 같다.

 

 

 

“1분만 더 있다가 드세요.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를 뜨거운 물에 섞는 거잖아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물과 에스프레소는 서로 다른 성분이라서, 서로에게 완벽히 섞이고 녹아들 시간이 필요해요. 그제야 진짜 아메리카노가 되죠.” / 138p

 

 

나는 오랜만에 가정용 커피 메이커로 내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모금의 커피가 가슴을 타고 내려가 몸 안에 온기가 퍼질 즈음, 커피에 대한 애정이 다시 서서히 살아나 있음을 느꼈다. 그 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말이다.

‘그래, 좀 더 편안하게 대해야겠다. 오래된 친구를 곁에 두듯이.’

커피를 나의 10년 지기 친구라고 한다면, 내가 그에게 처음 같은 열정을 지니는 것도, 그에게 여전히 새롭고 특별한 매력을 기대하는 것도 억지스러운 일일 테니 말이다. / 187p

 

 

‘만약 정말로 사랑이 그저 뇌에 전달되는 전기 신호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나는 차라리 그 사실을 모른 채 그저 나의 진심이라 믿고 사랑하고 싶다.’

커피에 대한 내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커피 맛이 단지 어떤 성분과 비율에 따라 정해진다고 믿고 싶지 않다.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실험실에 갇혀서 눈을 가린 채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어디선가 좋은 음악이 흐를 때, 올해 첫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을 때…….

똑같은 커피도 분명 훨씬 맛있게 느껴지니까. / 206p

 

 

 

 

 

  두 해 전 여름, 카페에서 직접 핸드 드립으로 내려 마셨던 코스타리카 한 잔이 무척이나 좋아서 아직까지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문득 책을 읽는 내내 그 커피가 다시 생각나서 오랜만에 핸드드립 도구들을 꺼내보았다. 아,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원두가 신선하지 않아 단번에 인상이 윽, 하고 찌푸려졌다. 두 아이를 키우며 핸드드립은 어쩐지 사치 같아서, 원두를 일일이 가는 것이 번거로워서 믹스 커피나 편의점 커피만 마시느라 사놓았던 원두를 죄다 방치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이면 원두를 사러 가야할 것 같다. 커피 한 잔으로 기억될 나의 멋진 하루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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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스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 - 해피 모지스마스!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지음, 류승경 옮김 / 수오서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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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 찬란하고 평온한 크리스마스를 위한 단 하나의 책!

모지스 할머니의 아기자기한 겨울 풍경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림 동화! 

 

 

 

고요하고 거룩한 크리스마스.

모든 게 평온하고 모든 게 찬란합니다.

천국의 평화 같은 단잠에 들겠지요.

천국의 평화 같은 단잠에 들 거예요.

 

 

 

   ‘모지스 할머니’로 불리며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화가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그녀는 1860년에 태어나 12세부터 15년 정도를 가정부로 일을 했다고 하지요. 그러다 남편을 만난 후 버지니아에서 농장 생활을 했고, 관절염으로 자수를 놓기 어려워지자 바늘을 놓고 붓을 들었다고 해요. 그때 그녀의 나이가 76세라니 믿겨지나요?

 

 

 

 

 

 

   한 번도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데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사랑스러움과 아기자기함으로 그림 곳곳에서 따스한 온기가 오롯이 전달됩니다. 그렇게 무려 101세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왕성하게 활동하여 1,600여 점에 달아하는 작품을 남겼다하니 ‘인생이란 너무 늦은 때란 없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네요.

 

 

 

   모지스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크리스마스는 어떤 풍경이었을까요. 겨울은 매서운 날씨가 찾아오는 계절이지만, 유리처럼 투명한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재미를 놓칠 수 없는 계절이고, 썰매를 타고 눈길을 쌩쌩 달리며 숲을 누빌 수 있는 행복한 계절이기도 합니다. 다 함께 모여 크리스마스에 쓸 나무를 구하러 갈 때면 참으로 신이 났어요. 또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밀 상상을 하며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올 때면 얼마나 더 설레었을까요.

 

 

 

   그렇게 신나게 놀고 집으로 돌아와 따뜻하게 불이 지펴진 몸을 녹이자면 저절로 감사한 마음을 들 것 같아요. 그저 마음껏 누리고 마음껏 상상할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겠지요. 이렇게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 속 겨울은 너무도 따스해서 매서운 추위도 잊힐 만큼 우리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는 것만 같습니다.

 

 

 

추위는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겁니다.

쌓인 눈도 꽁꽁 언 연못도 사르르 녹겠지요.

그리고 다시 봄이 오면 말들은 들판을 달릴 거예요.

 

 

 

 

 

 

   모지스 할머니가 기억하는 첫 크리스마스는 네 살 때라고 해요. 산타클로스가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커다란 장난감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나면서도 은근히 설레기도 했던 시절을 추억하지요. 문득 나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는 어떤 날이었을까를 떠올려보았지만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네요. 그냥 산타클로스가 실은 아빠였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만 기억이 납니다. 오히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 처음 맞은 크리스마스가 더 많이 생각납니다. 크리스마스에 놀이 공원으로 놀러 가본 게 처음이었거든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놀이 공원의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캐럴을 들으며 남편과 나 그리고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은 아이와 회전목마를 탔는데, 그게 이상하게 기분이 참 좋았어요. 크리스마스란 그런 건가 봐요. 추위 따위가 뭔가요, 사랑하는 사람과 천진난만하게 뛰어놀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을요. 저는 그 기쁨을 조금 늦게 알아버렸지만, 사랑하는 두 아이에게만큼은 오롯이 느끼게 해주고 싶네요.

 

 

 

 

 

 

  모지스 할머니의 이 따뜻한 그림 동화를 읽으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합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추억을 남길 수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따스한 꿈이 자라날까요. 모지스 할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이 책을 아이들에게 꼭 들려주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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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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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터지다가도 어느새 감동으로 코끝이 찡해지는 가족 소설!

인생의 마지막 생일 파티를 맞은 한 남자와 그를 둘러싼 대가족의 유쾌발랄한 시트콤 같은 이야기!

 

 

  며칠 전날 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게 여름쯤이었으니, 그간 마음의 준비는 늘 하고 있었기에 충격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다만 생에 워낙 미련이 많으셨던 분이라 끝끝내 다 채워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세상을 떠나보내게 한 것이 죄송스러울 따름이었다. 외할머니가 마지막까지 애타게 찾으셨다던 그분은 과연 장례식장에 나타나셨을까, 나는 아직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꽤 오랫동안 만날 수 없었던 친척들을 그곳에서 마주했다. 낯설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듯 강렬하게 이끌리는 감정이란 게 이런 것인가, 단 한 번도 손잡아 준 적이 없고 등조차 토닥여준 적이 없던 우리들이 외할머니의 부재를 통해서야 비로소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들의 시대는 다 흘러갔다. 이제는 너희들의 시대야.”

   나의 아빠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조부모님 세대와 이렇게 모두 이별을 하였으니 이제 나의 부모님 세대가 다음 이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밀려나왔다. 언제 이렇게 늙어버리셨나, 어느새 세월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이 나이가 들어버린 나의 부모님과 삼촌들 그리고 이모들의 얼굴을 훑어보면서, 아빠의 말처럼 이제는 가족의 중추가 우리 세대로 바뀌어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이렇게 작은 공간에 모두가 모였을 때에야 비로소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사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죽음이 끊어진 줄로만 알았던 인연을 다시 이어붙이고 이렇게 가족이라는 연결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붙들게도 한다는 것. 죽음이 반드시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바로 그곳에서 또렷이 마주할 수 있었다. 나의 ‘죽음’이 흩어졌던 가족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고, 대화를 할 수 있게 하고 화해를 할 수 있게 한다면, 그리하여 내 죽음이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을 수 있다면 퍽 아름다운 것이지 않을까. 그렇지 않나요, 외할머니? 빅 엔젤처럼 말이에요.

 

 

 

누군가는 이미 겪었고, 누군가는 앞으로 겪을 일이기에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은 뿔뿔이 흩어져있던 대가족을 한 데 모아 인생의 마지막 생일파티를 열면서 자신의 죽음을 유쾌하고 따뜻하게 맞이하는 한 노인의 이야기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누구에게나 무겁기 마련이지만, 가장 번잡스럽고 떠들썩하게 마지막 생일을 보내며 가까워져오는 마지막 시간을 미처 화해하지 못했던 가족을 끌어안고 따스한 인사말을 건네며 이렇게 유쾌하게 마무리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특히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자 수장으로, 한때는 가족 위에 군림하던 가부장적인 아버지였기에 죽음 앞에서 화해를 시도하는 이러한 과정이 자칫 신파로 그려질 법도 하지만, 소설은 특유의 시트콤 같은 발랄함으로 마지막까지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삶과 죽음’, ‘상처와 화해’, ‘연민과 사랑’과 같은 진부해 보이는 주제마저 화려한 축제 속의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소설 곳곳을 밝힌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 엄수를 중시하여 가족 중 누구도 느릿하게 구는 꼴을 절대로 두고 보지 못하는 그 유명한 빅 엔젤 데 라 크루스가 하필이면 자신의 생일 전날 열린 어머니의 장례식에 늦게 되어 무슨 알리바이를 댈까 전전긍긍해하는 모습 하며, 무기력하게 하반신을 모두 드러내가며 딸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해야만 하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에 몰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생일 파티에 난입한 총잡이 앞에서 당장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거친 욕설을 내뱉는 장면에서는 이 소설이 마지막까지 눈물 콧물 흘리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마무리 지을 생각이 일체 없음을 단호하게 보여준다.

 

 

 

빅 엔젤 데 라 크루스는 시간을 엄수하기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미국인들은 그를 가리켜 ‘독일인’이라고 부르곤 했다. 참 웃긴 일이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멕시코인이라고 해서 시간을 안 지킬 거라고 생각하다니. 비센테 폭스가 일처리를 제때 하지 못한 적이 있냔 말이다. 호로새끼들. 그놈들의 생각을 고치는 게 그의 소명이었다. / 16p

 

 

“아주 넓은 해안이 있어. 우리는 모두 자그마한 호수야. 그런데 저 물 한가운데가 요동치면, 중심에서부터 퍼진 물결이 완벽한 원을 이루거든.”

그때 그는 이렇게 대꾸했었다.

“데이브, 지금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인생이 그런 거라고, 멍청아. 너 말이야. 물결은 처음에 세차게 시작하지만, 해안으로 갈수록 점점 약해지지. 그러다 다시 안으로 돌아오고. 돌아오는 물결은 눈에 보이지 않아. 하지만 분명히 존재해서 세상을 바꾸는 법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본인이 뭔가 성취했는지 어떤지 의심이나 하고 있잖아.” / 41p

 

 

휠체어에 앉은 그는 매처럼 사나웠다. 그는 비밀 병기처럼 복도에 뿜어지는 신부의 입 냄새를 맡았다. 빅 엔젤은 수천 명의 조카들과 손녀들과 자식들을 가리켰다. 그의 형제자매들은 이제 구세대였다. 맨 앞줄에 음산하게 앉아 있는 그들. 모두 마마의 유골함을 바라보며 동시에 똑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이제 제일 윗세대군. 이제 다음으로 죽는 게 우리겠지. 그들은 뒤를 돌아보다 빅 엔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그를 매일 같이 봤는데도 그랬다. / 94p

 

 

 

 

 

 

   멕시코인인 아버지와 미국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답게 멕시코인들의 생활상과 시대적 배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 또한 눈에 띤다. 이는 빅 엔젤의 할아버지 세대에서부터 아버지, 그리고 빅 엔젤 자신의 경험담과 배다른 동생인 리틀 엔젤 그리고 자식인 랄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려진다. 이를 테면 피부색이 너무 진한 갈색이라는 이유로 세군도는 로스앤젤레스 동쪽에 있는 공공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수 없었고, 1932년에는 대대적인 멕시코인 추방 분위기에 따라 2백만 명의 메스티소들이 잡혀서 기차에 짐짝처럼 실려 국경 너머로 보내졌다. 빅 엔젤과 같이 일했던 회사 중역들은 멕시코인이라면 바닥을 쓸거나 화장실 청소를 하게 마련이라 생각했으며, 컴퓨터 센터장이나 사이버 시스템 관리자로 일하는 멕시코인을 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혐오감을 드러내며, 세상천지에 이런 일이 일어나버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냐며 은밀하게 자기들끼리 모여서는 정족수가 넘는 회의를 해버리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랄로는 파병이 되면 자동으로 미국인이 된다는 말에 넘어가 미국의 군인이 되었지만 결국엔 추방을 당해 어둠 속에서 티후아나 강을 건너 몰래 미국으로 들어와 이제는 아버지의 차고에서나 사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 그러하다.

 

 

 

그 시절, 빅 엔젤은 직업이 두 개였다. 가끔은 세 가지 일을 할 때도 있었다. 불쌍한 페를라는 어두운 아파트에서 고생을 했다. 그녀는 그저 멕시코로 돌아가고 싶었다. 엔젤이 왜 이토록 미국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건 더 나은 삶이 아니었다. 적어도 고향에서는 더불어 사는 이웃이 있었고, 웃음이 있었다. 심지어 희망도 있었다. 티후아나에서는 파티를 하고 싶으면, 길 한가운데에다 모닥불을 지필 수 있었단 말이다. / 252p

 

 

“내가 떠나서 미웠겠지. 알아. 내가 형을 비롯해서 모두를 깔보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도 알아. 뭐, 어쩌면 그랬을지도. 난 평생 살아남기 위해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어쩌면 형에게서조차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그런데 이제 형이 날 떠나려 하고, 나는 형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가 없어. 난 언제나 생각했어. 내가 원했던 아버지를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그리고 이제껏 내가 원했던 아버지는 사실 형이었어.” / 423p

 

 

모든 사람은 비밀을 품고 죽는다. 빅 엔젤은 분명히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가장 끔찍한 사실을 안전하게 숨긴 채로 죽을 테니까. 삶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또한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긴 투쟁이다. 이것이 그의 가장 은밀한 비밀이었고, 그건 결코 죄가 아니었다. 다만 그가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것 뿐이었다. / 466p

 

 

 

 

 

 

   이 소설이 흥미로운 소재와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작법으로 이목을 끄는 것에 비해 어느 정도의 호불호를 지닌 작품임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하자면 그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을 듯하다. 독자로서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멕시코-미국의 국가 관계 및 사회적 배경과 그만큼 복잡하고 방대한 가족 관계로 인한 몰입의 어려움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때로는 시적인 표현을 쓰다가도 때로는 저급하게 느껴지리만큼 직설적인 표현으로 인해 문학적 감흥을 떨어뜨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의미 있는 것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서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좀 더 삶 가까이에 끌어와 축제처럼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죽음이란 이미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기에 마냥 진지하고 엄숙하게 받아들이기보다, 비록 시끌벅적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질지라도 내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가장 따뜻하고 즐거운 시간을 채워가는 것으로 이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이러한 순간은 찾아올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갈무리 할 것인가는 우리의 몫이다. 어쩌면 불의의 사고나 재난이 아니라 이렇게 세상과 작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생의 가장 큰 행운이 아니겠는가. 빅 엔젤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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