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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조커 1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5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이규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평점 :

사상 초유의 기업 테러를
두고 펼쳐지는 두뇌 싸움!
일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인간 심리의 밑바닥을
파헤치는 압도적인 소설!
조커(Joker).
트럼프 카드 게임에서 사용되는 조커는 일종의 와일드 카드다. 게임 내에서 조커는 다양한 역할을 한다. 때로는
최고위인 비장의 카드가, 때로는 유해한 카드가 되기도 하는 이 양면의 성격 때문에 우리는 조커 패를 손에 쥐게 되는 순간 마음이 동요되는 것을
느낀다. 내 손에 들린 이 조커 패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에 따라 판이 달라질 수도 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이와 같은 게임이라면,
기묘한 반전 혹은 나와 누군가의 인생을 쥐고 흔들 수 있을 만한 이 특수한 카드가 손에 들어오게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1조 엔대 대기업의 운명을 쥐고 흔들기 위해 뭉친
'레이디 조커'
<레이디 조커 1>은 세 권의 분량에 이르는 시리즈 중 그 첫 번째 책이다. 사상 초유의 대기업 테러를
다룬 이 소설은 일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인간 심리의 밑바닥을 파헤치는 작가의 치밀하고도 집요한 시선이 압도적인 필력으로 완성된 사회 범죄
미스터리다. 정경 유착 및 소외계층의 차별 등 일본 굴지의 대기업 히노데 맥주와 사회의 각종 부조리한 일면들로부터 희생당한 이들이 한 데 모여
기업 테러를 감행하고,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이는 고다 형사의 활약이 예상되는 소설이다.
일명, 레이디 조커. 이들의 요구 조건은 현금 20억, 인질은 350만 킬로리터의 맥주다. 1조 엔대 대기업을
테러하기 위해 뭉친 다섯 남자는 스스로를 레이디 조커라 부르지만, 정재계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한 이 어마어마한 계획을 실행하기에는 다소 평범해
보인다. 약국을 운영하며 경마장을 찾는 것이 유일한 취미인 모노이, 장애인 딸을 키우는 트럭 운전수 누노카와, 이십 대 중반으로 작은 공장에서
일하는 일명 요짱, 재일조선인으로 신용금고에서 근무하는 고 가쓰미, 경시청의 현역 형사로 있는 한다까지. 성격도, 하는 일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뜻하지 않은 사고나 불운을 덧입고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살아가는 일본의 수많은 가장 혹은 청년들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수많은 영화와 다수의 작품에서 보이는 기업 테러 공모자들은 하나같이 특수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들의 계획은 무모해보일 정도다. 어째서 이들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이 위험천만한 테러를 감행하게 된 것일까.
소설의 시작은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히노데 맥주 주식회사 가나가와 공장으로 장문의 편지가 도착하는데,
이를 작성한 오카무라 세이지는 히노데로부터 퇴사를 권고 받은 마흔 명의 직원들 가운데 하나다. 그가 쓴 편지에는 가난한 소작민으로 태어나 입양이
된 후 히노데 맥주에 입사하기까지 오카무라 그 자신의 개인사와 당시 회사 동료였던 노구치 등 피차별 부락민들이 벌인 노동 쟁의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빈궁을 면치 못했던 소시민들의 모습과 신분제도 하에 천민 부락민들이 겪어야 했던 차별들은 일본의 암울한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는 현대 사회로 접어들고 후세에까지 이어져 마침내 한 청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불의의 사고를 낳고 만다.
오카무라 세이지의 동생인 모노이는 자신의 손자가 히노데 맥주 회사로부터 아버지가 부락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험에 떨어진 뒤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깊은 회의에 빠져든다. 결국 경마장에서의 인연을 계기로 알게 된 네 남자와 합심하여 히노데 맥주와 모순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향해
묵직한 한 방을 내던지기로 결심한다.
"누노카와가 일전에 자기 딸을 두고 조커를 뽑은 격이라더군.
그때 문득 생각했어.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을 조커라고 한다면,
우리야말로 조커라고." / 258p
다들 겁에 질린 개처럼 미친 듯이 짖어대며 물어뜯기 바쁩니다. 허구한 날 일하고 먹고
자는 것밖에 모르는 생활 속에서 굶주린 기억이 골수에 사무치니 천해질 수밖에요. 냉정하게 생각하질 못하니 천할 수밖에. 그렇게 보면 이 나라
전체가 천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도망치면 부모 형제가 따돌림을 당하고 굶어죽을 테니 결국 전장에 나가기는 했지만, 천하다 천하다 해도 가난한
놈이 가난한 나라를 침략하는 것만큼 천한 게 없어요. 그걸 잘 아는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유로 살육을 저질렀으니, 인간이란 참으로
가련한 존재가 아닙니까. / 26p
이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온 차별이라는 긴 터널의 출구에서, 여전히 일부 남은 장벽을
방패 삼아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령 장벽이 철거된다면 그들 중 대부분은 또 터널 밖에 만연한
무지와 무관심을 규탄하며 새로이 장벽을 쌓고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사수하려 들지 않을까? 평등이니 차별이니 하는 것도 이렇게 서로를 보완하며 일부
사람들에게 존재이유를 제공하는 장치에 불과하지 않을까? 뒤집어서 보자면 그런 평등이나 차별과 무관했던 스물두 살의 아들은 그들이 말하는 세계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 63p
소설은 히노데 맥주 회사를 노리는 범인 집단 '레이디 조커' 외에도 히노데 맥주 회사를 이끌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경영진들, 히노데 맥주 회사의 사장인 시로야마 쿄스케가 납치됨으로써 범인 집단이 노리는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하는 고다 형사 외 경시청 형사들,
누구보다도 발 빠르게 사건의 추이를 쫓아나가는 기자진들의 시점을 교차 반복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정치인과 교류하며 뒤로는 시중은행과 증권사의
금융 자본, 관청, 지하 금융이 한 데 얽혀 부패한 냄새를 풍기는 기업의 생리와 엄격한 상하 관계 속에서 불거지는 경찰 내부 조직의 알력들,
누구보다 먼저 사건을 쫓아가 보도해야 한다는 신문 기자들의 직업 생태계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회 시스템의 구조적인 모순과
이해관계들을 진중한 시선으로 읽어내고 다양한 인물의 시점을 치밀하게 교차시키면서 탄탄한 플롯을 완성시킨 저자의 필력에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다.
시로야마 역시 시대가 달라지리라고 예감은 했다. 활황기는 언젠가 천장을 칠 테고,
부동산과 주식은 하락세로 돌아설 것이다. 대량 소비를 즐기는 부자들의 시대가 끝나고 이어서 도래할 시대는 한마디로 '소시민적 결벽'이리라는 것이
시로야마의 예감이었다. 절약, 소형화, 간소화, 개인주의 같은 키워드로 표현할 수 있을 서민의 심정은 물질적 풍요를 포기하고 정신적 충실을
지향하며 사회에 '결벽'을 요구할 것이다. 결벽의 시대에는 정계와 은행, 기업의 체질도 그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기업이 이윤 추구에 앞서
사회적 의무와 윤리를 요구받을 시대는 생각보다 머지 않았다. / 98p
1권의 초중반부까지는 사건의 발단을 풀어내는 과정으로 인해 속도감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으나 시로야마 사장이 납치된
이후부터는 쫓기듯 빠른 호흡으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만큼 흡인력 작품이라 무려 세 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마저도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뒤늦게야 안 사실이지만 이토록 남성적인 성격의 소설을 쓴 작가가 사실은 여자라는 것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놀라워하지 않을까.
웬만하면 다음 편의 예고글을 미리 읽지 않는 편인데, 이 소설은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없어 나도 모르게 그만
읽고 말았다. 그런데 더 모르겠다. 레이디 조커는 과연 이 어마어마한 계획을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고다 형사는 사건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인지, 앞으로 펼쳐질 2권과 3권의 내용이 무척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