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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사랑 이야기 ㅣ 거장의 클래식 2
찬쉐 지음, 심지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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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 어디로 가는 걸까,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어느 새 마지막에 이르게 되는 소설!
표면적으로는 사랑을 좇고 있으나 실은 ‘연결’을 갈망했던 자들의 이야기!
참으로 신묘하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서사와, 현상과 심연을 뒤섞은 몽환적인 이미지로, 그야말로 난해하다고 평가할 만하다. 뭘까, 대체로 어디로 나아가려는 걸까, 온통 수수께끼로 가득한 이야기에 문장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것은 이 깊은 안개 속으로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이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어느 새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는 생경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에요.” / 68p
『신세기 사랑 이야기』의 인물들은 해소되지 않는 욕망을 따라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그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부유한다.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룽쓰샹과 진주는 솜 부스러기가 자신들의 폐에 엉겨 붙고, 피까지 토하면서 피폐해져가는 생활에 지쳐 성 접대부가 된다. 그들은 스스로 악마의 소굴을 벗어났음에 안도하고, 악착같이 버텨내 이 생활에서 만족감을 느낀다. 특히나 아이를 잃은 상처가 있었던 룽쓰샹은 더 이상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쾌락만 추구하면 그만이라는 심정이다. 반면, 계량기 공장의 창고 관리인 추이란은 마흔여덟의 유부남인 웨이보와 내연 관계를 갖고 있는 데다 여러 번 연애도 해봤지만 그 누구에게도 쉬이 마음을 주지 못한다. 반복되는 업무 패턴과 매일 보는 얼굴들에 돌연 반감이 들기도 한다. 오히려 몸을 팔며 사는 여성들의 삶에 은근 호기심을 느낀다.
비누 공장 직원인 웨이보는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그 어떤 야망이나 포부도 없이 평범한 나날을 보내다 스스로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간다. 그는 가혹한 형벌과 같은 한낮의 노역을 견뎌내야 했지만 몸이 힘드니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감옥에서의 생활에 만족감을 느낀다. 골동품 감정사인 미스터 유는 “저는 무용지물, 빈껍데기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오페라 가수 부부를 존경하고, 웨이보에게 “집이 있어서 정말 좋겠다. 나한테 그런 건 천국이 있다는 말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인데.”라고 말하며 현실에 온전히 마음을 두지 못한다.
웨이보는 아직도 그때 아버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무슨 야심이 있다는 말인가? 비누공장 직원이 되기밖에 더 했나? 웨이보 머리면 회계사 정도는 될 수 있었겠지만 그쪽으로는 노력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사는 것도 꽤 괜찮았다. / 119p
“아무리 기다려도 왜 우리한테는 행운이 오지 않는 건가요? 말 좀 해보세요. 행운이 왔다가 도로 가버리는데도 바보처럼 기다리기만 하고. 저 다리처럼 곧 홍수에 잠겨버릴 거면서 말이에요.”
요즘에는 주변 사람들이 갈수록 지난날에 연연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 기억 속의 거대한 역량이 현재 삶에 스며들어 웨이보를 비롯한 모든 이의 판단을 갉아먹고 있었다. 언젠가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고택은 진작에 헐렸음이 분명했다. / 1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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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나 창밖으로 떠들썩한 소리가 끊이지 않는 느낌, 벽을 열면 죽은 자의 유령이 머물러 있는 공간, 감옥과 다름없는 삶 속에서 누군가를 옆에 두고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쫓는 자들이 혼재하는 수상쩍은 세계. 이렇듯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되고, 현실과 꿈 그리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소설의 몽환적인 흐름은 당대의 중국 사회와 최하층민들의 심연을 반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반에 흐르는 공허함과 우울감은 당대의 중국 사회와 최하층민들의 상실감을 투영한 듯하다. 이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찬쉐가 문화대혁명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경험하면서 마주한 시대적 현실이 자신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죽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데서 살 거라고? 무섭지도 않아?”
“처음에는 오빠도 싫다 그랬는데 내가 설득했어. 죽은 사람이 뭐 어때서, 사람은 다 언젠가는 죽은 거 아니야? 난 움막이 너무 좋아. 안은 또 얼마나 따뜻한데. 오빠랑 같이 움막에서 자면 둘 다 행복한 꿈을 꿔. 마을 사람들도 나오는, 찬란한 금빛 물결 같은 유채 꽃밭 천지인 꿈 말이야.” / 179p
“어느 날 작업장에서 다른 죄수하고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치고받고 싸움질을 했어. 그러곤 혼자 비틀비틀 강가로 가서 몸을 씻었다네. 내가 중상을 입은 건 아닌지 걱정하면서 말이야. 그 순간 맑은 강물 속에 고향 집의 윤곽이 보이더군. 우리가 갇혀 있는 감옥의 형상이더라고.” / 333p
그러나 해소되지 않는 욕망과 지난한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면서도 욕망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인물들이 있어 눈에 띈다. 남편인 웨이보와 두 자식들이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샤오위안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며 차오현으로 떠난다. 접대부로 직업을 바꾼 첫 여직공들 중 하나인 아쓰는 자신에게 덧씌워진 편견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돼지우리에 살면 뭐가 또 어때서? 마음만 깨끗하면 되는 거 아닌가?’하고 불안한 삶 속에서도 새로운 사랑을 찾아 홀연히 나아간다. 그 가운데 아쓰의 질문에 대한 구씨 노인의 대답이야말로 이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어르신, 대체 사람은 평생 몇 번이나 죽을 수 있는 거죠?” “그건 그 사람의 잠재력을 봐야지. 잠재력이 크면 무한대로 죽을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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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떻게 발전해나가든 상관없이 연결은 꼭 필요합니다.” / 283p
주류와 타협하지 않는, 가히 독창적이고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 새로운 초현실적인 문학 세계의 비범함을 느껴보고 싶다면 ‘찬쉐’라는 이름에 주목해보시길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