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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이아 - 매들린 밀러 짧은 소설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새의노래 / 2023년 7월
평점 :
![](https://image.yes24.com/blogimage/blog/h/j/hjh8s/IMG_20230809_001.jpg)
짧지만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이제 우리는 피그말리온의 신화가 아닌, 갈라테이아의 신화로 읽어야 한다!
“오, 여신이시여! 어찌하여 저는 이런 배필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요?
이토록 완벽한 여인이 어찌하여 인간이 아니라 대리석이라야 합니까?” / 16p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속에는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아 나그네들에게 몸을 팔게 된 키프로스의 여성들에게 환멸을 느낀 나머지 상아로 완벽한 이상형을 조각해 그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피그말리온이다. 그는 조각상을 마치 자신의 진짜 연인인 듯 여기며 입을 맞추고 어루만지더니 급기야 조각상이 진짜 여자로 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의 기도에 감동한 아프로디테는 결국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생명의 기운을 얻은 조각상은 마침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후 아프로디테의 축복 속에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여인에게는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실제 원본에서는 이름 없는 조각상이었으나 후에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딸에게는 파포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간절히 원하고 기대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후대의 사람들은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 혹은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라는 이름을 붙여 피그말리온의 신화를 칭송하고 낭만적으로 해석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과 어떤 식으로 사랑에 빠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 신화를 비유로 들기도 했다. 그런데 『아킬레우스의 노래』와 『키르케』로 더블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매들린 밀러는 자신의 짧은 소설 『갈라테이아』를 통해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인류가 조각상을 빚음으로써 이상적인 미의 기준을 세우고 아름다운 육체를 추앙함으로써 여성의 순결과 통제에 대한 환상을 부추겨왔다면, 여성의 성적 순결에 대한 집착과 ‘새하얀’ 상앗빛 피부가 완벽하다는 통념 속에서 인간으로 탄생한 갈라테이아는 과연, 정말로 행복했을까? 어쩌면 피그말리온이야말로 인셀(비자발적인 순결주의자, 여성혐오자)의 전형은 아닐까?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에서 갈라테이아에게 그 어떤 목소리도 부여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머릿속에 피그말리온의 이름만 남겨두었다면 이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고 목소리를 돌려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는 잠시 후에 자기 입술을 내 입술에 대고 눌렀다.
“살아나라. 살아나라, 내 생명, 내 사랑이여. 살아나라.”
나는 바로 이 순간, 이슬을 머금은 새끼 사슴처럼 눈을 떠 마치 태양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그를 보고 경외와 감사가 담긴 탄성을
조그맣게 터뜨려야 한다.
그러면 그가 나를 따먹는다. / 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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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의 신화가 아닌, 갈라테이아의 신화로
『갈라테이아』라는 제목을 본 순간, 나는 단박에 ‘미녀와 야수’ 이야기의 원형이라 불리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와 바다 님페 갈라테이아의 신화를 떠올렸다. 이 신화 속에서 갈라테이아는 우윳빛 살결의 아름다운 모습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첫 장을 읽는 순간, 내가 생각했던 신화와 다른 이야기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이 또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사전을 통해 피그말리온이 사랑에 빠진 조각상에게 이 신화 속 님페에서 따온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윳빛 살결, 모두가 이상향이라고 여길만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염원하며 만들어진 조각상, 그로부터 탄생된 인간 갈라테이아…. 이 모든 맥락이 가리키는 곳에서 갈라테이아가 자신만의 온전한 이름으로 설 자리는 애초에 없다.
나는 누워서 알맞은 자세를 취했다. 식은 죽 먹기다. 워낙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데다 내 머릿속 한구석, 돌이던 시절을 기억하는 곳이 내가 예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반기기 때문이다. 딱 한 군 데 힘든 부위가 있다면 손가락이다. 남편은 게으른 여느 조각가들의 작품과 다르게 뻣뻣하거나 축 늘어지지 않은 진짜 손가락처럼 보이게 하려고 1년이나 공을 들였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니까 나는 남편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손을 유지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 / 13p
이를 보여주듯 『갈라테이아』에서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가 온종일 누워 있는 채로 주변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만을 순종적인 태도로 기다리고 있기를 원한다. 또 임신을 했을 때 그녀의 배가 튼 살 자국을 보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그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딸 파포스의 태도를 보며 이를 간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손길로 빚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조각상에 불과하다. 이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결말 뒤에 묻혀진 진실은 우리가 꿈꾸는 것만큼 결코 아름답지 않다. 따라서 메들린 밀러는 이 결말을 뒤엎을 것을 제안한다. 피그말리온의 세상을 박차고 나가 자신의 두 발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새로운 갈라테이아의 신화를 우리에게 선사하려 한다.
얼굴아, 빨개져라. 빨개져라.
나는 기도했다.
빨개지지 않으면 저이가 나를 죽일 거야. / 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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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본만한 크기에 49쪽에 불과할 만큼 짧은 분량임에도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에 따라 신화는 달리 쓰이고 읽힐 수 있다는 것을 매들린 밀러는 또 한번 증명해냈다. ‘지배자의 연장으로는 지배자의 집을 부술 수 없다’던 오드리 로드의 말처럼, 새로운 목소리와 언어로 전통이라는 이름의 신화를 깨부수는 매들린 밀러의 이야기를 나는 계속해서 기대하고 기다릴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