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이는 물결 - 작가, 독자, 상상력에 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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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글쓰기비평상상과 환상의 예술에 관한 예리한 통찰이 빛나는 에세이!

이야기라는 너른 대지를 자유롭게 떠돌며 은유하고 상상하는 즐거움을 선물하는 책!

 

 

 

  문득내 안에 이야기가 들어선 순간이 언제였을까를 생각해본다친구들을 따라 우연히 가게 된 도서관이라는 곳에서 난생 처음으로 세상에 이토록 많은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을까하교 후 골목 끝에 있던 만화책방에서부터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다 읽어버리고만 만화책이 아쉬워서그만 참지 못하고 다음 권을 빌리기 위해 다시 발길을 되돌린 때였을까아니다아니야그보다 훨씬 더 앞선 때였던 것 같은데그래저 문이다외갓집의 커다란 중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들어오는 바로 저 문그 너머에 있을 것에 대한 상상이 나를 이야기의 세계로 이끌었던 게 틀림없다.

 

 

 

  손잡이를 돌릴까 말까들킬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넘나들었던 사촌언니들의 방엔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내가 읽기에는 제법 어른스러운예쁜 그림체의 만화책과 하이틴 로맨스 책들이 꽂혀 있었다지금이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때의 나는 분명 언니가 막 들여놓은 게 분명한 새로운 책을 발견해내는 재주가 있었다그 두근거림이 언니들에게 들킬까봐 염려된 어린 아이의 조바심이었는지고작해야 위인전만 읽던 아이가 언니들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설렘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헛갈리지만그때 처음으로 이야기를 소유하는 즐거움에 대해 알았던 것 같다.

 

 

 

  이야기에 빠져드는 순간은 어디에나 있다이미지도 체면도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조르바에게서페이지의 질감이나 쉼표를 따라 호흡을 고르는 그 사이사이 어디에서든 존재한다혹은 나란히 진열된 색색의 전집 사이에 실수로 꽂혀버린 책의 이질감 사이에서아직은 읽어선 안 된다는 당부의 메시지 속에서책탑의 한 중간에 짓눌려진 어느 신비한 단어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어슐러 K. 르 귄은 마음에 이는 물결에서 이렇게 쓴다. “그런 책에는 위엄이 있다똑같은 표지에 제목이 금박으로 찍힌 책들이 일렬로 꽂혀 있는 모습은 위압적이지만전집의 진짜 위엄은 정신적인 면에 있다전집은 위대한 정신의 건축물많은 건물들로 이루어진 집이다독자는 어떤 문으로든 들어갈 수 있다.” 오늘 내가 걸어 들어간 문 뒤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그 순간 내 마음에 이는 물결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우아해질 수 있다이것이 이야기라는 너른 대지를 자유롭게 떠돌며 은유하고 상상하는 즐거움을 선물하는 이 책을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무한히 늘어선 그 서가들에서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때의 기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저는 그때 약 스물다섯 권이나 되는 책을 들고 있어서 걷기도 힘든 지경이었지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저는 뒤로 돌아서서 도서관 건물의 널찍한 계단을 올려다보았습니다저게 바로 천국이지나의 천국이야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세상의 모든 글이 저기에 있고난 그 글을 읽을 수 있어. / 48p

 

 

 



 

 

 

 

  『마음에 이는 물결은 SF·판타지 문학의 거장 어슐러 K. 르 귄의 에세이집이다독서글쓰기비평상상과 환상의 예술에 관한 예리한 통찰이 빛나는 책이다첫째 장에서는 미국 개척자 집안의 증손녀이자 아메리카 인디언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부모님의 역사에서 비롯된 자신의 글쓰기 영토를 더듬어본다두 번째 장에서는 톨스토이에서부터 반지의 제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비평과 분석을 통해 작품을 읽는 시야를 한층 넓혀준다그 중에서 좋은 글의 요건으로 단어보다 심오하며 이야기 전체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강세-리듬을 강조한 대목이 인상적이다지루한 산문모양새 없는 이야기읽기 힘든 글에는 독자의 몸과 마음과 심장을 붙잡아 몰아치고 움직이는 리듬이 없다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예측 가능한 리듬을 넘어서 다양한 변주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춤을 출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나 역시 읽는 이에게 어떤 광경감정을 마음속에 물결치도록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 책의 부제가 아쉬웠다. ‘북미 마지막 야생 인디언 전기라니어머니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의미와 정신에 어긋나는 제목이 아닌가이시는 야생이 아니었다그는 황야에서 오지 않았다그의 부족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은 변경 개척자들보다 훨씬 더 탄탄하고 뿌리 깊은 문화와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그가 살던 곳은 황야가 아니라 소중하고 친숙한 세계였다그의 부족 사람들은 그 세계의 산 하나하나강 하나하나돌멩이 하나하나를 모두 잘 알았다저 황금빛 산들을 피와 슬픔과 무지의 황야로 만든 자가 누구인가?

문명과 야만 사이에유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경계선이 있다 해도 그것은 지도에 그어진 선이 아니다지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역도 아니다오로지 마음속 경계선이다. / 58p

 

 

어떤 이야기가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인 듯하다이야기의 리듬 구조는 여행과 비슷하면서 동시에 건축물을 닮았다위대한 소설은 우리에게 일련의 사건뿐만 아니라 어떤 장소우리가 머물러 살 수도 있고 나중에 되돌아갈 수도 있는 상상 속의 풍경을 제공해준다. / 182p

 

 

우리가 네 살 때 들은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오랫동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도 어른이 된 뒤에는 누가 그 점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요구하지 않는 이상 그 영향을 분명히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또한 그 영향을 의식하는 것을 몹시 꺼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전통적인 규범을 따른 문학 담론에만 진지하다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이라면우리가 어렸을 때 잠옷으로 갈아입고 동물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침대에 누운 뒤 가족들 중 어떤 여성이 소리 내어 읽어준 이야기를 언급하기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쩌면 그런 이야기가 우리의 상상력에 그 어떤 책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 187p

 

 

 




 

 

 

 

  이 외에도 픽션이 되어버린 논픽션문학상의 정치성과 그 안에서의 젠더 문제소설 안에서의 미학작가와 독자의 관계 등에 관한 솔직하고도 흥미로운 고찰이 매력적이다그 가운데 공동체를 확립하고 확인하는 데 있어 인간의 가장 훌륭한 유산이 되어준 상상력과 이를 향한 예찬이야말로 책에서 가장 돋보인다덕분에 상상의 힘과 그 안에서 유영하는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벅차오른다에슐러 K. 르 귄이 당부했던 것처럼 성장을 위해서건강을 위해서유능함을 위해서즐거움을 위해서’ 평생 상상력을 익히고 표현하는 삶을 살아야지모쪼록 이 책을 읽고 많은 분들이 힘겨운 순간에도 상상력을 잃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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