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뒤에 쓴 유서 오늘의 젊은 작가 41
민병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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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아픔을 극복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을 것!

불행을 익숙한 방법으로 묘사하는 작법을 거부하는 민병훈의 글쓰기!

 

 

 

 

  『달력 뒤에 쓴 유서는 학창시절에 아버지의 자살을 마주한 가 가족의 불행을 소설에 쓰기로 마음먹는 데서 시작한다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날의 기억을 서서히 지웠지만고통은 어떤 식으로든 재현되기 마련이라서 마침내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놓였노라 고백한다그는 자신이 왜 이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지더 나아가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지 그 모든 의문을 좇기 위해 속리산으로 향한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의 시작이 되었던 그 집이 그 자리에 없기를 희미하게나마 바랐던 것은인식의 문을 닫아버림으로써 고통도 사라지기를 바랐던극복의 또 다른 방편이었을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집은폐가가 되었지만 농약을 먹은 아버지가 은색의 액체를 누런 장판에 쏟아 냈던 안방만은온전히 살아남아 그를 그날의 기억 속으로 데리고 간다이를 테면 밀려드는 잠 속으로 들려왔던 못질 소리 같은 것왜 아버지의 방에서 못질 소리가 들렸는지그때 의문을 가졌어야 했는데아니현관 옆에 걸린 달력 뒤에 적힌 유서를 우연히 발견했던 날 진즉에 알아차렸어야 했는데하고또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나의 불행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된 걸까아니면 죽음의 징후를 미리 발견하지 못한 나의 후회에서 비롯된 걸까하고.

 

 

 

왜 쓰는가왜 쓰려고 하는가.

 

 

  ‘는 출판사 편집자에게 보내는 메일에서 오스트리아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베른하르트는 자신의 작품을 악성종양에 비유하며 글쓰기의 목적이란바로 그 종양을 드러내는 작업이라 말한 바 있다그는 모국이자 자신의 병적이고 신경질적인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문학적 공간인 오스트리아를 지속적으로 부정했고그곳에서 해방되고자 끊임없이 자아를 분리시키고 자기 대상화를 시도했다그래야 자신의 콤플렉스를 해결할 수 있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화자인 ’ 역시 가족력으로 이어진 우울증이 자신에게 당도할 것을 걱정하며 죽음으로 향하지 않기 위해회피하지 않고 이겨내기 위해 그 과정을 소설로 써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실은 이제껏 쓴 모든 글에 그 시절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내내 에두르고 빙빙 돌렸던 것들을회피하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을아버지의 죽음으로 비롯된 것인지 그 뒤에 잇따르는 후회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를 불행을 마침내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새롭게 쓰기를 시도한다.

 

 

 

은색으로 물든 수건도 떨어져 있었다입을 막은 수건이었다마당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정리했다안방 창문이 깨져 있었다유리 조각을 쓸어 한곳에 모았다창문을 깰 때 다치지 않았다안방 문은 못이 박혀 밖에서 열리지 않았다경찰에게도 그렇게 설명했다그래서 창문을 깼다고 말하자 경찰은 잘했다고 말했다잘한 일이 아니다들어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그대로 시간이 흘러아버지를 발견하지 않았다면겨우 남은 의식으로 괴롭게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 71p

 

 

누가 물어보면 자연사 혹은 사고사라고 말했지 누군가 자신은 이제 사라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우울하고 고독하고 삶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하면 조심스럽게 꺼냈지 나는 남겨졌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달리 도와줄 수가 없었어 너도 예전에 증상이 심했을 때 내가 죽지 말라고 했지 슬리퍼를 가지런히 두면서 생각해 보면 글을 쓰기 이전에는 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내가 읽고 좋아하는 책들의 세계는 몰이해로 넘쳐 무의미의 의미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남겨진 자의 삶을 말하고 싶었던 거야 / 78p

 

 

 



 

 

 

 

    『달력 뒤에 쓴 유서가 여느 소설과 다른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작가는 아버지의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경험을 비극적이거나 통속적인 방식으로 그리지 않는다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화를 들추어내거나 죽음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옮겨냄으로써 하나의 사건처럼 소비되기를 거부한다실제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덤덤하게그러나 형식면에서는 상당히 자유로운 방식으로 그간 억눌려 있던 기억들을 풀어놓는 쪽에 가깝다메모전화 통화메일누구와 나누는지 알 수 없는 대화 등 불행을 익숙한 방식으로 묘사하지 않는 이러한 다채로운 서술 방식은 하나의 맥락으로 형용할 수 없는 죽음의 수많은 링크를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누군가의 입장에감정적으로 가닿기를 바라거추장스러운 단어와불필요한 진술로기억을 꾸미고나도 모르게 관습화된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러웠다그렇다면 그것들을 경계하는 것이과연 맞는 것일까그대로 써라있는 그래도겪었던 그대로이것은 소설이지다른 무엇이 아닌 소설이것을 소설이라고 설득해야 한다면지금까지 써 온 대부분의 소설들에이미 비슷한 질문들을 받았지만이 글은 그것들과 어떻게 다른지어떻게 같은지대답을 준비해야 한다하지만 나는 무슨 말을 준비할 수 있을까.) / 33p

 

 

나는 철저히 내게서 기인한 것들로만 문장을 구성하려 하는데이 작업을 진행하는 어떤 순간에는 너무 힘든 나머지다른 방식의 문장을 바랄 때도 있었다사명감책임감정치의욕이 담긴 것들나는 최대한 예민하지 않으려 했다누군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물으면 나와 가족에 대한 글을 쓴다고 짧게 말했다사건에 대해 말한 뒤에는 순간 적막해진 분위기를 깨려고 작업과 상관없는 농담도 던졌다가족이 나오면 다 슬프지누군가는 나의 농담에 그렇게 대답하기도 했다. / 76p

 

 

문학은 제게 불행을 불행으로

말해도 된다는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불행을 불행으로슬픔을 슬픔으로.

나를 나로. / 68p

 

 

 



 

 

 

 

  작가 민병훈은 소설의 서두에서 글쓰기를 통해 삶을 이해하고 고통을 극복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소설이라면나아가 문학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으면서도 자신의 글쓰기가 그 안에서 생기고 자라났음을 알기에 오히려 더 그 안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간 게 아닐까그가 걸어 들어간 자리가 과거의 불행한 기억으로부터 회복의 가능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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