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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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의 시도들, 그 불온한 역사 이후의 시간들!

피부로 스며드는 듯한 언어, 그 예민한 감각의 여운!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 / 317p

 

 

 

  이따금 인간이 벌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유형의 비극을 상당히 오랜 시간 들여다보고 나면, 삶이 과연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찰나의 섬광, 날카로운 비명, 이 죽음의 끝에 또 어떤 죽음이 잇따라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자들의 생생한 공포. 저 내밀한 사연들을 하나하나 좇아가며 복기하고 또 복기하여 글로 엮어낸다는 건, 그들의 삶의 무게를 다시 하나하나 내 것으로 짊어지는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소설가인 경하의 삶에 뿌리를 내린 악몽도 그렇게 시작된다.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묘비처럼 심겨져 있는 눈 내리는 벌판. 왜 이런 데다 무덤을 쓴 거야? 밀물이 밀려오고 있는 바다 위에 펼쳐진 이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며 경하는 마음이 다급해진다. 이미 물에 잠긴 무덤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위쪽에 묻힌 뼈들은 옮겨야 한다고, 바다가 더 들어오기 전에 이 검은 나무들을 옮겨야 한다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는 사이 어느 새 바닷물은 무릎까지 차올라 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이 많은 무덤들을 다 어떻게 하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황망히 꿈에서 깨어난다.

 

 

 

  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까지 경하는 이 날의 꿈을 잊지 못한다. 어쩌면 봉분 아래의 뼈들을 휩쓸어가기 위해 밀려들어오던 그 시퍼런 바다는, 소설을 쓰는 내내 몰두해 있었던 도시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을 의미하는 건가.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순진한 착각은 이후에도 집요하게 그녀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인선에게 그 꿈을 이야기하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경하는 한때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하다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제주로 내려가 있던 친구 인선에게 그 꿈과 연관된 작업을 짧은 기록영화로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인선은 흔쾌히 좋다고 약속했지만, 두 사람의 일정이 꼭 맞는 때가 좀처럼 오지 않은 채 또 다시 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버리고 경하는 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바꾼다.

 

 

 

그러나 여전히 깊이 잠들지 못한다.

여전히 제대로 먹지 못한다.

여전히 숨을 짧게 쉰다.

나를 떠난 사람들이 못 견뎌했던 방식으로 살고 있다, 아직도. / 28p

 

 

 

  12월 하순의 아침, 경하는 인선이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통나무 작업을 하던 중 사고로 두 손가락이 잘려 봉합수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다급히 병원을 찾은 경하는 인선으로부터 뜻밖의 부탁을 듣는다. 지금 당장 제주로 내려가 혼자 남아 있는 새를 구해달라고. 오늘 안에 물을 줘야 살릴 수 있다고 말이다. 폭설로 인한 기상악화로 인해 겨우 마지막 제주 비행기에 올라탄 경하는 가까스로 인선의 마을로 향하지만, 지독한 두통과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으며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후회에 잠긴다. 하지만 그녀는 어두컴컴한 길을 헤치고 인선의 집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새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게 멈춘 게 언제였을까, 나는 생각한다. 내가 건천으로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그전에 물을 먹일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제대로 길을 택해 내처 걸어왔다면. 아니, 그전에 터미널에서 더 기다려 산을 가로지르는 버스를 탔다면. / 155p

 

 

 

 

 




 

 

 

 

제주 4·3 사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폭설로 전기마저 끊긴 인선의 집에서 경하는 제주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얽힌 인선의 가족사와 당시 제주민들의 증언이 담긴 기록을 마주한다. 언니와 심부름을 간 사이 온 가족이 학교 운동장으로 끌려가 학살을 당해 시체의 무덤 속에서 가족의 얼굴을 찾아 헤맸던 열 세 살의 엄마, 이북 사투리를 쓰는 경찰들이 마을마다 들이닥쳐 젊은 남자들을 잡아가 실적을 올린다는 소문에 동굴에 혼자 숨어 지냈던 아버지,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바다에 던지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던 어느 노인의 증언, 내 너머로 사십 호 안팎의 집들이 모여 있었지만 1948년 소개령 때 모두 불타고 사람들이 몰살되며 폐촌이 되어버린 마을,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도 학살을 피해 사라졌던 오빠의 행적을 찾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던 엄마와 또 다른 생존자들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절멸의 시도들, 그 불온한 역사 이후의 시간들이 생생하게 인선의 육성과 기록을 통해 경하에게로 전해진다.

 

 

 

까무러칠 것같이 아팠는데.

정말 차라리 까무러치고 싶었는데, 왜 그때 네 책 생각이 났는지 몰라.

거기 나오는 사람들, 아니, 그때 그곳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아니, 그곳뿐만 아니라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 56p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 225p

 

 

 

  인간이 인간에게 어쩌면 이리도 끔찍한 일을 벌일 수 있을까, 소설이 다루고 있는 제주 4·3 사건을 비롯해 아주 무거운 진실들은 너무 참담해서 때로는 차라리 몰랐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촛불은 이제 다 타들어 가는데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재우치는 인선을 따라가며 몇 번이나 머뭇거리게 되는 경하의 목소리가 꼭 내 것 같다. 돌아가자, 다음에 오자, 눈 그치고 다시. 하지만 그렇게 흘려 보낸 시간들이 아쉬워서, 너무나 간절해져서 인선은 혹은 그녀와 꼭 같은 마음이었을 수많은 누군가들은 꽤나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선의 한 마디가 경하는 물론, 내 마음까지 와락 붙든다. ……다음이 없을 수도 있잖아.

 

 

 




 

 

 

 

 ‘작별하지 않겠다라는 완곡한 다짐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우리는 기껏해야 이 비극의 아픔을 바라보고 그들의 상처를 들어주고 보듬어주는 것 정도 밖에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포기하는 것보다 잘린 손가락의 신경을 죽이지 않기 위해 3분 마다 바늘에 찔리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택했던 인선의 아픔조차 다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다만, 외면하지 않고 조금 더 끈질기게 바라보며 언제나 그것들이 던지는 질문 앞에서 마주 앉아 대답해보는 것. 어설픈 다짐이 아닌 담담히 그리고 묵묵히 작별하지 않고 계속 얘기해보는 것. 그것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지 않을까 믿어보는 거다.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는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 133p

 

 

 

  심심하게 다가오는 듯했던 소설이 갈무리될 때쯤 어느 새 저릿하게 파고든다. 피부로 스며드는 듯한 한강의 언어와 그 예민한 감각의 여운이 상당히 오래갈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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