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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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 상징되는 여성사의 계보,

어쩐지 우리의 미래는 썩 근사해질 것 같아 이미 행복해진다!

 

 

   모던 걸, 우리의 모던 걸…….

   한국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이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던 탓에 사진 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이민을 간 여성, 심시선. 하지만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남편이 될 남자는 죽어버렸고, 사탕수수나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 혹은 쇼필드 배럭스 군인들의 빨랫감을 세탁하며 낯선 땅에서 삶을 연명하던 그녀는 우연히 99번 국도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당시 미술계가 사랑하던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로, 자신에게 도움을 베푸는 이 신비로운 동양 여성을, 게다가 그림까지 그릴 줄 아는 그녀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겠다는 빌미로 독일행을 제안했다. 20세기 여자들이 교육의 기회라는 말에 따라나섰던 수많은 길들은 정말 교육에 닿기도 했고, 위험한 나락에 닿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교육과 기회를 원했던 여성들은 벌어질 일들을 하나도 모른 채 자신을 내건 도박을 해야만 했다. 심시선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시선이 독일에서 지낸 기간은 칠 년 남짓이지만, 당시 유럽은 그녀를 재능 있는 화가를 파멸로 몰아넣은 아시아 마녀라 증오했다. 미디어는 지금보다 느렸지만 그때 사람들도 지금 사람들 못지않게 가십을 사랑했고, 조롱에서 폭력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훨씬 짧았다. 창문으로 날아드는 깨진 판석, 집 앞에 버려지는 오물, 길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위협들이 도를 넘어설 지경이었다. 정작 소품 취급을 당하며 가학에 가까운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그녀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죽음으로 향하는 자신의 나선 경사로를, 구부러진 스프링을 어떻게든 펴고 스스로 비틀린 부분을 수정하는 것만이 살아 있는 예술가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고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만 한다고 믿었다. 덕분에 그녀로부터 뻗어나온,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유산들은 지지 않고 꺾이지 않는 법을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갈 의지를 얻을 수 있었다. 모던 걸, 우리의 모던 걸……. 세상의 모던 걸들이 남긴 유산은 그렇게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그러니 여러분, 앞으로의 이십 년을 버텨내세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모퉁이가 찾아오면 과감히 회전하세요. 매일 그리되 관절을 아끼세요. 아, 지금 그 말에 웃는 사람이 있고 심각해지는 사람이 있군요. 벌써 관절이 시큰거리는 사람도 많지요? 관절은 타고나는 부분이 커서 막 써도 평생 쓰는 경우가 있고 아껴 써도 남아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 불공평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모든 면에서 닳아 없어지지 마십시오. / 229p

 

 

아무것도 당연히 솟아나진 않는구나 싶고 나는 나대로 젊은이들에게 할 몫을 한 것이면 좋겠다. 낙과 같은 나의 실패와 방황을 양분 삼아 다음 세대가 덜 헤맨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 299p

 

 

 

 

 

 

 

 

말해지지 않는 것들로 우린 연결되어 있지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는 격동의 세기를 살다 간 한 여성 예술가로부터 3대에 걸쳐 이어지는 여성 중심의 서사를 다룬 소설이다.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라고 밝힌 것처럼, 억압과 부조리 그리고 차별과 폭력의 시대를 견디고 극복해온 20세기 신여성의 삶이 이 땅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또 어떻게 21세기 여성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는지 심시선이라는 한 여성의 목소리와 가정사를 통해 보여준다. 작가 정세랑은 명혜, 명은, 경아, 화수, 지수, 우윤, 해림으로 상징되는, 심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그녀들’을 통해 이 땅에서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고 연대하며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이상적이나 과장되지 않게, 쿨한 듯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 83p

 

 

 

   이야기는 작고한 심시선 여사의 십 주기를 맞이하여 딱 한 번만 하와이에서 제사를 치르겠다는 첫째 딸 명혜의 공식 선언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살아생전에 제사는 사라져야 할 관습이라고 강경 발언을 했던 심시선의 뜻을 생각하면 참으로 의아한 일이지만, 한때 심시선 여사가 살았던 하와이를 여행하며 각자에게 기뻤던 순간이나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제사상에 올리는 것으로 십 주기를 기리겠다는 명혜의 뜻에 모두들 기꺼이 수긍한다. 그렇게 소설 속의 인물들은 누군가는 하와이를 상징하는 물건을 찾고, 누군가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경험들을 공유하며 저마다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수집하는 미션에 몰두한다. 그러는 동안에 이들은 가깝지만 먼 듯했던 서로의 관계를 돌아보고,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로가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으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각자의 언어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렇듯 복잡하고 허례허식에 가까운 제식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추억하고 나의 삶에 투영하고 있는지, 그 자체에 의미를 두려는 명혜의 참신한 발상은 그것이 ‘그녀들 혹은 그들이 시선으로부터 배운 삶의 방식’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이자 작가가 지향하는 여성사의 중요한 방향성을 상징한다.

 

 

 

“나 결심했어. 할머니 제사상에 완벽한 무지개 사진을 가져갈 거야.”

“뭐?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하는 거야?”

지수의 결정에 우윤은 깔깔 웃었지만, 속으로 자신도 결정했다. 완벽하게 파도를 탈 거야. 그 파도의 거품을 가져갈 거야. / 102p

 

 

경아는 오래전에 식어버린 커피와, 오래전에 끝난 대화를 하와이에서 곱씹었다. 만약에 경아가 완벽한 코나 원두를 사서 엄마가 좋아하던 묵직한 미국식 머그에 내려 제사상에 올리면 죽고 없는 사람이라도 웃을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유머였으니까. 엄마, 그때 말했던 그 코나 원두야, 하고 죽고 없는 사람을 웃게 하고 싶었다. / 123p

 

 

그렇게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한 행동은 그 이후 지수의 삶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으니 예외적인 노력이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야 태연히 즐거워 보이던 지수가 사실은 공들여 본인의 성격답지 않은 일을 해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린 우윤은 지수를 기다리며 고통을 잊었고, 둘이서 써나간 계획 노트는 지수가 없을 때도 우윤을 머물게 했다. 놓고 싶을 때도 놓지 않을 수 있게 해주었다. / 150p

 

 

 

 

 

 

 

   소설을 읽다보면 때로는 사람일 수도 있고, 때로는 작품이나 글일 수도 있고, 때로는 무심한 듯 강한 목소리일 수도 있는 심시선 여사의 유산들이 내내 가슴을 두드린다. 자신을 쓰고 써내느라 닳아 없어지게 하지 말라던 그녀의 메시지가, 눈치 보지 말고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라는 뻔뻔한 부추김이 마음을 울린다. 덕분에 소설 속의 ‘그녀들’처럼, 나 역시 시선으로 상징되는 수많은 여성들로부터 뻗어나온 존재들 중에 하나라는 사실에 안심이 되기도 하고, 내가 누군가의 시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몽글몽글 설레기도 한다. 이게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좋다고 평하던, 정세랑의 언어가 지닌 힘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나도 정세랑 월드에 빠져들게 되는 것인가, 참 오랜만에 긴 여운을 주는 작가를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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