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9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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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 다잉 시대, 노인 혐오와 배제라는 사회적 문제를 날카롭게 포착한 소설!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교묘히 파고들어 발칙한 상상력과 신선한 감각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작품!

 

 

 

   여덟 개의 계곡 사이에 푹 파묻혀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곳을 팔곡마을이라 부른다. 지도나 내비게이션 없이 그쪽을 지난다면 거기 마을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지나칠 만한 그런 곳, 마을이 있다는 걸 안다 해도 막상 배에서 내리면 잘못 온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을 느낄 만큼 어둡고 축축한, 바로 그런 곳이다. 누군가는 팔곡마을 하면 우울한 풍광을 떠올리며 소위 시체 같은 느낌을 떠올리기도 한다. 거기선 만약 길을 걷다가 유령을 마주쳐도 그게 유령인 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마을 노인들이 이미 유령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유령처럼 회색지대를 떠도는 노인들

 

 

 

   월상파출소의 소장 박 경위는 우체부가 하도 팔곡마을의 노인들이 사라졌다고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선착장으로 향한다. 해질녘이 다 되어가는 데다 몸은 피곤했지만 우체부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있으려니 차마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체부는 여느 때처럼 팔곡마을에 우편물을 배달하러 갔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손수 페인트를 칠해서 나사못으로 바닥에 고정해둔 우편함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비워지지 않은 적이 없던 그 우편함이 지난번에 넣어둔 우편물과 함께 그대로 남아 있더라는 것이다. 우체부는 뭔가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났을 것 같은 이상한 징조를 느꼈다고 한다. 마을에 살고 있는 여덟 집 앞으로 동시에 배달된 웰다잉협회라는 이름의 우편물 역시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쓱 훑어보니 연명치료 거부에 대한 사전의향서 작성을 안내하는 건조한 내용의 우편물에 불과했지만, 다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네들이 서류에 사인하는 광경을 떠올리려니 어딘지 꺼림칙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우체부는 약간 두려워진 마음을 안고서 마을 이장인 피 노인의 집과 마을회관을 차례로 둘러본다. 하지만 거기엔 피 노인의 흔적은커녕 마을의 노인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게 분명하다는 선뜩한 예감만이 감돌뿐이다.

 

 

 

“물론이죠. 있어요. 내가 알아요. 그 노인네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을을 비운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왜 갑자기 다들 사라져버렸겠어요? 무슨 사달이 나지 않고서야 그럴 일이 없지 않겠느냐고요.” / 49p  

 

 

 

 

  보나마나 팔곡마을 노인 전원이 조그만 봉고차를 대절해서 어디 관광이라도 갔으려니 하면서도 박 경위는 팔곡마을로 향하는 배에 우체부와 함께 올라탄다. 이미 사위는 컴컴해지고,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는 걸 보니 곧 폭풍우라도 몰아칠 듯한 분위기다. 살집이 있고 퉁퉁한 선장은 가는 길에 심심하니 홍보 영상용 비디오나 보라고 틀어주는데, 그 영상의 내용이 어쩐지 기묘하다. ‘웰다잉-죽음을 이기는 법’이라는 제목의 영상은 죽음을 능동적으로 맞이하라는 심오한 메시지와 함께 영상을 보는 이로 하여금 기이한 최면에 빠져들게 하는 데가 있다. 잿빛 거리, 죽음을 이긴다는 사람들, 박 경위는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호수에 뛰어들어 그것과 하나가 되어 완전히 사라지는 환영에 사로잡힌다. 다행히 우체부가 자신을 깨우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갑자기 호수에 들어가겠다며 영원히 쉬고 싶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는 우체부의 말이 찝찝할 따름이다.

 

 

 

제길. 대체 노인들은 왜 한곳에 가만히 있지 않는 걸까. 힘도 없고 관절도 안좋다면서 툭하면 그들은 여기저길 돌아다녔고 길을 잃거나 버스에서 굴러떨어지고 계단에서 다쳤다. 다친 노인네들이야 병원에 들어가 누우면 그만이다. 그러나 남은 가족들은? 그들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존재들, 살아 있되 살아 있다고 하기도 애매한, 삶과 죽음의 중간인 회색지대를 맴도는 이들에게 발목을 잡혀야 하는가 말이다. / 53p

 

 

죽음이 다가왔을 때 굴복한다면 그건 죽음에 압도당하는 겁니다. 그러나 먼저 죽음을 택한다면 그거야말로 죽음에 대한 승리가 되는 거니까요- 곁에서 지켜봐주는 겁니다. 놀라운 건, 이 나라에선 늙거나 병든 사람만이 이런 죽음을 택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젊고 건강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그저 삶을 지속하기 싫어지면, 의사를 불러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겁니다. / 58p

 

 

 

 

 

 

   그러고 보니, 그 많던 노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곳 팔곡마을에는 이제 열 명의 노인만이 살고 있을 뿐이고, 월상댐까지 들어가는 뱃길에 있던 다섯 개의 마을 중 벌써 세 개는 완전히 사라졌다. 박 경위는 우체부의 말대로 노인들이 사라진, 텅 비어있는 스산한 풍경의 팔곡마을을 둘러보며 알 수 없는 기시감과 실체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의문에 사로잡힌다. 설마, 이건 정말로 희대의 노인 단체 실종극일지도 몰라. 노인들은 대체로 한 명씩 사라졌고 한 명씩 죽어갔다. 그래선지 그들의 죽음은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고 아무도 그 행방을 궁금히 여기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노인이 한꺼번에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박 경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내내 보이지 않았던 우체부가 누군가에 의해 사로잡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선장 역시 뜻밖의 습격을 받고 쓰러진다.

 

 

 

“내 말은, 이 세계가 공정하고 온전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같이 보이느냐, 이거야. 하긴, 지금 이런 얘길 한들 누가 이해하기나 할까. 여하간 아까 내 손목을 보고 당신이 우리 조직의 정체를 어느 정도 눈치챘다는 건 알았어. 그래 맞아. 우린 ‘뉴 제너레이션’의 일원이야. 뉴 제너레이션. 세계를 구할 사람들. 새로운 세대, 미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우린 세상 곳곳에 숨어 그림자처럼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 나가고 있다고.” / 107p

 

 

“세계 각지에서 그건 이미 골칫거리였지. 그래, 세상이 점점 늙어가고 있다는 것. 노인들의 지구 전체를 뒤덮어서 결국은 모두를 쇠락과 소멸로 내몰고 말 거라는 것. 늙은 자들은 탐욕스럽고 오만하고 꼰대에다 자기들만 옳다고 믿지. 그것만으로도 심판받아 마땅한데, 거기에 더해서 늙어 죽어가면서까지 오직 살겠다는 욕망으로 발버둥 치며 국가 의료 재정에 구멍을 내고, 그렇게 연명한 목숨 덕분에 연금 시스템까지 갉아먹어. 돈이 있는 노인이라고 더 나은 것도 아니야. 그것들은 끝가지 재산을 틀어쥐고 새로운 세대에겐 한 푼도 내놓지 않아. 살날도 얼마 안 남은 주제에 악착같이 다 늙은 몸을 이끌고 투표장에 가서는, 앞날이 새파란 젊은이들을 골로 보낼 궁리나 하면서 말이야.” / 107p

 

 

 

 

 

 

   처음 보았을 때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을 주었던 남자, 우체부와 박 경위를 습격한 건 선장이었다. 선장은 두 사람을 포박한 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한다. 바로 웰다잉협회 즉, ‘뉴 제너레이션’이라는 이름의 비밀 조직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자신이 이 비밀 조직의 요원으로 인류, 나아가 지구 전체에 있어서 쓸모없는 노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다시 말해 노인들이 스스로를 혐오하게 만들고 마침내 삶을 비관하여 자신의 비루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조직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리고 조직의 배후에는 가장 거대한 조직인 국가가 있다며 차마 믿기 힘든 말을 거침없이 떠벌린다. 아무래도 선장의 말은 미치광이의 헛소리에 불과해보이지만, 독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끔찍하고도 불편한, 섬뜩하지만 굉장히 낯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늙음이 혐오가 되고, 부양이 자식의 짐이 되어버린 현실, 스스로를 실버타운과 요양원에 내맡겨야 하는 노인의 미래. 어쩌면 뉴 제너레이션의 음모론은 한 정신병자의 망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간과할 수 없는 진실의 당연한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최종 목표는 다른 데 있지. 그건 바로…… 노인들 스스로가 자신을 혐오하게 만드는 것. 스스로를 무용지물로 여기게끔 몰아가는 것. 그리고 잘 알겠지만, 자기에 대한 혐오의 귀결은…….”

“……설마, 자살?”

선장이 담배꽁초를 폐가 바닥에 던지더니 발로 비벼 껐다.

“역시 소장님은 영리하다니까. 그래, 우린 노인들이 스스로 자신의 비루한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야. 그게 다라고. 그러니 마을 노인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야. 다만 그들이 차차 한 명씩 세상을 등지도록 도와주는 게, 내 임무인 거지. 어때, 놀랍지 않아? 엄청난 아이디어 아니냐고.” / 116p

 

 

  명절 날, 시어머니는 나에게 연명치료를 거부하겠다는 내용의 신청서를 작성하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노년의 삶이 짐이 되지 않기 위한 결심들을 나는 종종 부모님 세대로부터 자주 듣곤 한다. 그것은 머지않아 나에게도 찾아올 숙명이기에 뼈아프다. 늙음이, 죽음이, 세대와 세대를 갈라놓는 주요한 기준이 되어버린다면 그건 곧 그 자체로 죽음이며 두려움이 된다. 아침부터 바지런히 나와 지하철 상가에서 공허하게 떠도는 저 수많은 어르신들, 오육남이라는 이름의 꼰대들, 정말이지 웰빙이 아닌 웰다잉이 더욱 중요해진 이 시대에 우리가 깊이 숙고해볼 문제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백만 명을 죽이면 혁명이 된다.” / 10p

 

 

 

   이렇듯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교묘히 파고들어 웰 다잉 시대, 노인 혐오와 배제라는 사회적 문제를 의미심장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심플한 스토리라인과 극적 긴장감, 간결한 필치만으로도 극의 마지막까지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는 작가의 신박함이 돋보인다. 정말 오랜만에 앞선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작가라 참 반갑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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