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에 묻히다 - 독립영웅, 혹은 전범이 된 조선인들 이야기
우쓰미 아이코.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김종익 옮김 / 역사비평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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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가끔 되지도 않는 농담을 한다.

“야! 일본이 다시 우리를 식민지로 삼으면 너는 독립운동 할 거야?”

아무도 묻지도 않고, 그런 사명감 끄트머리조차도 없는 우리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지만

“아니! 나는 바로 일본어를 배우고, 그 쪽에 붙을 거야”

야이 XX야! 그러면 돼! 너는 애국심도 없어? 라고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나지막이 읊조릴 뿐이다.

“나는 풀보다 빨리 누울 거야.”

 

 

고재윤, 이억관, 김철수, 양칠성, 김동해, 박윤상, 박창원, 임헌근, 김현재, 문학선, 신경철,

 

이 분들은 독립운동가다. 20대부터 30대까지 나이도, 고향도, 멀리 적도 인근의 섬과 인도네시아로 오게 된 경위도 제각각 다르다. 하지만 명백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고려독립청년당>의 당원들이다. 이분들의 이름을 적어 내려가면서 나와 친구들이 나누는 되지도 않는 농담이 부끄럽지 그지없다. 하지만 그 농담에 진담이 반쯤 섞여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 보니, 마냥 부끄럽고 썩소를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본 정부가 양칠성과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참가하여 독립 영웅이 된 두 명의 일본인 병사에 대해서는 기념식에 맞춰 유족을 찾아내 그들의 희망에 따라 분골의식까지 행하게 했으면서, 조선인 양칠성의 유족에게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는” (p.28)

 

일본이 패망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야 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적도의 어떤 곳에 끌려와 일본군의 군무원으로 일해야 했던 끔찍한 과거를 한 번에 씻어 버리고 눈물로 그리고 고대했던 고국,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조선인 군무원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네덜란드의 ‘보복적’전쟁 재판으로 전범이 되었고, 심지어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p.21)

“결국 일본이 네덜란드령 인도 지역의 포로수용소 감시원을 조선인에게 맡겼던 것이, 조선인 전범자가 양산된 주요 원인이다.” (p.302)

 

이들은 갑자기 전범이 되었다. 전범. 전쟁범죄자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극악한 마지막 발악에 넘어가 버렸다. 돈을 벌기 위해, 보다 나은 형편을 위해 일본의 군무원이 되었다. 처음 군무원을 모집하기 위해 내건 약속들은 모조리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이들은 태평양 작은 섬 곳곳에 산재한 포로수용소 감시원 일을 해야 했다. 일본이 벌인 태평양 전쟁에 대한 동의도, 그것에 대한 사명감도 전혀 없는 조선의 청년들이었지만 일본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딘 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온 터라 조선 땅으로 돌아갈 길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전범이 되어 사형을 당한 ‘고려청년독립당’의 당원들도 있었고, 일부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가담한 양칠성씨의 행방에 대한 일본인 학자의 궁금증이 이 책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일본인 학자들의 눈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얼마나 골 때리고 이상했을까?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다. 제대로 된 참회와 사죄가 없는 채로 또 다른 대동아공영의 야욕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만, 패망 후 인도네시아에 남아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가담했던 일본인들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개최한 기념식에는 일본인밖에 오지 않았다. 양칠성이라는 조선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만약 이 책의 저자가 그 기념식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양칠성과 ‘고려독립청년단’의 존재는 아직도 역사 속에 파묻혀 있었을 것이다.

 

 

“군인·군무원 신분으로 약 36만 4천 명의 조선인이 직접 전쟁터로 내몰렸음을” (p.49)

“군무원 용인은 군대 계급으로 치면 가장 말단 지위였기 때문에 모든 군인에게 경례를 해야 했다. 설사 상대가 이등병이라도 말이다.” (p.168)

“야전 포로수용소로부터 같은 부대 안에 개설된 제16군 포로수용소로 이관되었는데, 그들 포로의 관리가 조선인 군무원들이 담당할 주요 업무였다.” (p.96)

 

 

36만 4천 명의 조선인이 일본이 벌인 전쟁에 끌려갔다. 3만 명도 아니고 36만 명이다. 인도네시아와 적도 인근 섬으로 끌려간 조신인 대다수의 신분은 군무원이었다. 말단 일본인 이등병에게도 경계를 해야 하는 신분이었으니 그 고통과 한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들이 하는 일이 더 큰 고통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온 영국군, 네덜란드 군이 대부분인 포로수용소를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아무런 사명감도 없고, 당위성도 없는 일에 동원되어야 했다.

 

 

“도조 육군대신은 ‘미군은 비행장을 일주일 만에 건설한다. 그렇다면 일본은 3일 만에 만들어낼 수 있도록 연구하라.’고 했다고 한다.” (p.132)

“포로들은 잇달아 적리에 걸리고, 영양실조 상태에 빠졌다. 곡괭이로 산호석을 내리찍으면 곡괭이가 도로 튀어 올랐고, 야자나무 한 그루를 넘어뜨리고 뿌리까지 제거하자면 열 명이 일주일 이상 매달려야 했다. 그 야자나무가 포로들의 관이 되었다. 포로들은 제때 관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죽어갔다.” (p.139)

 

전쟁 말기, 이미 패색이 짙고 그들이 벌인 전쟁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전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던 일본은 마지막 발악을 한다. 남태평양에 흩어진 수많은 섬과 열도에 숨어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쳤고, 아주 작은 섬에도 비행장을 건설해 호주 대륙으로의 침공을 계획한다. 마지막으로 향할수록 제정신을 못 차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일본은 더 잔인했다. 자신들이 벌인 전쟁에 일본인들만 징용하면 아무도 할 말 없다. 그런데 일본은 조신인, 대만인을 징용했다. 돈을 주고, 전쟁 후 좋은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달콤한 말로 청년들을 유혹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군인이 있는 학교에서 일본어로 교육을 받은 조선 청년들에게 군무원 지원은 그다지 부끄럽거나 힘든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3.1 운동 이후 조선 안에서의 독립 운동이 발본색원 된 후 조선 청년들은 엘도라도를 꿈꾸며 만주로 향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돈 벌기 위해 만주로 향했던 청년들과 군무원으로 지원한 청년들의 맥락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군인이 아니니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본군이 시키는 일을 해야만 했다. ‘미군이 비행장을 일주일 만에 건설한다면 일본은 3일 만에 건설해야 한다’고 했다.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조선 군무원들은 포로들에게 노역도 시켜야 했다. 되지도 않는 노역 말이다. 최신 기계와 장비로 건설해도 1주일이 걸리는 비행장을 포로들의 손발로 3일 만에 건설해야 했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는 포로들은 수없이 죽어갔다. 어쩌면 일본이 원하던 바 이었던 것일 수도 있다. 포로는 많고 전선은 예상치도 못하게 확장되다 보니 관리할 수 있는 인력도 없고 여건도 불비했다. 포로라고 마냥 잡아놓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죽으면 뭐 어쩔 수 없으니 죽기 전까지 일이나 시켜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잔인하고 악마 같은 새끼들.

돈 벌고,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적도까지 온 조선인 군무원들에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1944년 12월 29일 밤 11시, 연병장 한쪽 구석의 취사장에 혈맹의 언약을 맺는 열 명의 조선인 군무원이 모였다.” (p.193)

 

조선인 군무원은 그런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오히려 독립의식을 싹 틔운다. 명분 없는 전쟁에 가담한 자신들의 처지를 개탄하고 ‘고려독립청년당’을 창당한다.

 

 

당 강령 1. 아시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어라.

당 강령 1호가 ‘폭탄아가 되어라’

눈물 난다.

총 한 자루, 칼 하나 없는 조선 청년들이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태평양 한 가운데서 일본 제국주의를 향한 ‘폭탄아’가 되기를 결의한다. 제대로 된 폭탄이 될지 알 수도 없는 청년들이 말이다.

이 청년들은 결국 ‘폭탄’이 되지 못했다. 갑자기 일본이 패망하고 이들은 전범이 되었다. 일본인과 일본군에 의해 끌려 온 조선인 군무원들이 전범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실제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포로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조선인 군무원들이었고, 포로들의 눈에 그들은 일본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서류상으로도 일본인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일본이 벌인 전쟁의 전범이 되고 적도에 묻혔다.

책의 저자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고려독립청년당원 양칠성의 고향과 가족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고려독립청년당원으로 생존해 있던 이상문 선생을 만나게 된다.

 

 

“지난 30여 년 동안 열여섯 번의 청원을 했지만, 국가보훈처는 증거 자료가 부족하다며 사실 인정을 유보했다. 그때마다 나는 동지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깊은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내게 저자들은 세계 방방곡곡을 다녀서라도 반드시 증거 자료를 찾아낼 테니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들은 인도네시아로, 네덜란드로, 타이로, 한국으로 발걸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중략)

2011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고려독립청년단 혈맹 당원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루어졌다.” (p.371)

 

 

고려독립청년당의 생존자 이상문씨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이들 일본인들이 해낸 것이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문씨는 30여 년 동안 열여섯 번 청원을 했다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증거 자료가 부족하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 고려독립청년당 깃발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어야 하고, 카메라 하나 없는 그들에게서 흑백 사진 한 장 정도 가지고 있어야 하나. 어떻게 더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걸까. 고려독립청년당의 당원이었던 당사자가 생존해 증언하는데 뭘 더 얼마나 강력한 증거를 제시해야 할까. 저자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찾고 수집했다. 고려독립청년당이 실재했던 단체고 일본 패망 이후 전범재판을 통해 남겨진 자료도 모았다. 그래서 이상문씨는 독립유공자로 비로소 서훈되었다.

아름다운 나라.

 

 

“독립, 모든 분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염원했던 조국의 독립, 반드시 완수해주십시오. 저는 저세상에서나마 지켜보겠습니다.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상관없습니다. 다만,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p.291)

 

연합군의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후 마지막 진술을 하는 박정근 선생의 말이다. 적도에 묻힌 조선 청년들의 한을 여전히 풀어주지 못한 나라가 이 나라다.

얼마 전 한국의 수도 서울 한 복판에서 일본왕 생일파티를 여는 나라다. 주요 공직자로 추천된 명망있다고 판단되던 지도자급 인사들의 친일 발언은 이제 경악스럽지도 않다.

이런 나라다.

적도에 묻혀 계신 고려독립청년당 당원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편히 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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