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안녕 - 도시의 힘없는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위로!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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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키득거리며 책을 읽었다. 과장된 웃음을 조장하는 글이 아니라 더 좋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전적으로 고종석 작가 때문이다. 그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그의 책 「고종석의 문장」을 읽고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오해를 풀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싫어하지 않을 뿐이다) 그의 트위터를 팔로우하고 있는 내 오지랖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손에 꼽는 문장가, 작가인 고종석씨가 추천한 젊은 작가라는 짧은 트위터 내용을 보고 바로 그녀의 책 「뜨겁게 안녕」을 구입했다. 고종석씨가 그냥 좋아하는 후배 홍보해주기 위해서 날린 공수표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은 책의 첫부분을 읽으면서 부터였다.

 

“나는 기억하기 위하여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 기억이 죄다 휘발되기 전에, 글씨를 쓴다. 이 모든 비속하고 정답고 지겨운 것들을, 하찮고 애절하고 시시하고 또 시시해서 끝도 없이 사랑스럽고 그리운 것들을.” (p.7)

 

글씨를 쓰는, 문장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솔직하게 내뱉는 작가를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솔직하게 보이려고 부러 미사여구를 빼거나 감정을 과잉 투여하는 것과는 달랐다. 기억하기 위해 태어났고, 그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글씨를 쓴다는 그의 고백이 애절하고 솔직하게 느껴졌다. 이어진 고백도 절절하기 짝이 없다.

‘이 모든 비속하고 정답고 지겨운 것들, 하찮고 애절하고 시시하고 또 시시해서 끝도 없이 사랑스럽고 그리운 것들’

삶은 그렇다. 내가 삽십 여 년을 살면서 느끼게 되는 가장 큰 삶의 민낯이다. 구질구질하고 구차하기 짝이 없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김현진의 고백은 반가웠다. ‘젠’ 체하고 ‘난’ 체하는 일부(?) 작가들의 삐까번쩍한 글과 글씨, 문장들과는 달라 보인다.

이 책은 그런 작가의 고백이자 일기장이다. 대단한 삶의 목표도, 방향도, 움직임도 없는 그저 가난하고 가난한 젊은 작가의 기록이다. 한글 문서창 안에서 가볍게 ctrl+c 하고 ctrl+v 하듯이 되는 대로 흘러가는 삶은 물로 아니다. 책의 처음과 끝까지 술에 쪄든 고백을 서슴치 않고 하지만 분명한 삶의 방향과 가치를 가진 젊은이라는 것을 안타깝게 확인할 수 있다. 앞서 표현한 대로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 무표정한 체념, 그리고 때론 체념 그 자체가 강철 같은 의지가 된다는 것을. 구불구불한 털을 뽑히든 냄새 나는 물을 퍼내든, 무엇을 하든 그걸 무심한 얼굴로 견뎌내는 것이야말로 용기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p.83)

 

어릴때부터 줄곧 이어진 가난은 그녀를 강하게도 약하게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반지하 셋방에 역류해 들어오는 구정물을 수차례 만나도 보니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속에서 물을 퍼내는 자신을 그려내는 글에서는 그 누구냐, 대통령을 했었던 사람의 그 유명한 유체이탈 화법이 생각났다. 젊은 여자가 구정물 한가운데서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는 역류하는 구정물을 퍼내는 장면을 제3의 관찰자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다시 그 기억으로 감정이입하기에는 너무 구질하고 불쌍할 것 같아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게 더 애처롭다.

 

“친구들이 마카롱이 어쩌고 레어치즈케이크가 어쩌고 할 때마다 나는 돼지곱창 생각만 했다.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 하나를 켜면서 칠면조 통구이를 망상하듯 학자금 대출을 거칠게 갚아내면서 곱창골목의 보도블록 한 개마다 곱창 한 점을 꿈꾸었다.” (p.93)

 

그녀의 고백과 기록은 절절하다. 가난을 피하지 않고 구조적인 이유에 근거해 비판하지도 않는다. 그냥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체념하거나 수긍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 나이, 그 젊은 아가씨들이 그러하듯 그녀도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가난하고, 마카롱이고 레어치즈케잌이고 뭐고 간에 돼지곱창 한 점을 꿈꾼다. 이것은 유머다. 그녀의 첫문장에서부터 마음을 빼앗긴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 그녀의 고백은 유머다. ‘어머 불쌍해서 어째~ 참 힘들었겠다.’ 따위의 값싼 동정은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나는 유머로 그녀의 가난에 대한 기록을 읽었다. 그것도 키득거리면서 말이다. 가난과 불행도, 재수없음도 과하게 자기비하 하지 않으면서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냥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퍼붓는 술자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문장이고 글씨다. 정제되고 압축된 이야기다. 작가가 이 책을 출간하기 전 얼마나 오랜 시간 퇴고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쉽게 끄적인 글은 아닌 것 같았다. 현재에 과하게 만족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자꾸만 그녀의 글이 멋있어 보이는 것 같다.

 

“그가 다녀간 날이면 그때 유행하던 노래 <그 여자 그 남자>를 지하방에 앉아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니가 뭘 알아 세입자의 마음을... 그러다 지나가던 취객이 방에 딸린 잡지 한 권만 한 창문을 하수구로 착각했는지 소변을 보는 쏴아, 하는 소리... 비가 오나 싶어 돌아보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p.122)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웃었던 장면이다. 지하 셋방에서 유행가를 부르는 작가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처럼 그려졌고, 술에 취해 지하 셋방 유리창을 향해 소변을 발사하는 취객의 모습도 영화의 한 장면 처럼 그려졌다. ‘비가 오나 싶어 돌아보았다가’에서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비가 오면 많이 올 것을 걱정해야 한다. 비가 많이 오면 또 다시 하수구가 역류해 구정물 속에 갇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비에 민감해 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살고 있던 지하 셋방의 주인이 시도때도 없이 술에 취해 세입자들에게 주사를 부리는 통에 유행가를 개사해 신세한탄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신세한탄 쯤은 개나 줘 버려!!’라는 시츄에이션으로 취객의 소변 발사! 정말 많이 웃었다.

 

“일단 미친 듯이 달려가 보니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사이에 삼십대 중반 정도의 여자가 태아처럼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다.” (p.133)

“그때 사장님은 기름 묻은 목장갑으로 오토바이를 쓱쓱 만지며 말했다.”

“원래 그런 거여. 강만 건너가면, 집이고 차고 밥이고 뭐고 뭐든지 일단 두 배로 뛰는 겨.” (p.195)

 

그녀는 오지랖이 넓다. 달동네 골목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아내에게 달려 든다. 아내를 두드리는 남편을 달래고 그의 신세한탄을 모조리 들어 준다. 만나는 사람과 골목과 장면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꼴에 참견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 참 나쁜 사람이다. 언제 한 번 제 앞가림 잘 하고 잘 나고 잘 살고 힘 있는 사람들이 나와 당신을 도와준 적이 있나? 힘 없고 앞가림 잘 못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어깨를 내주며 사는 것이 더 현실에 가깝다. 그렇게 삶은 이어지는 것이고. 아무튼 작가의 오지랖은 책에 표현된 이상으로 넓고 깊은 것으로 보인다. 장기간 데모를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찾아가는 것에서부터 히스테리로 가득한 지하 셋방 앞 집 아주머니의 사연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오지랖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 보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이제 죄다 사라져버릴 골목 갈피마다 어떤 사람과 사연을 품고 있었는지 당신도 당신의 골목을 기억해준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을 것이다.” (p.303)

 

옥수동, 남창동.. 나는 서울에서 산 적이 없지만 동네 이름만 들어도 뭔가 강남스럽지 않고 잘사는 동네 스럽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녀는 그런 동네만 전전했다. 동네 꼭대기 집에서부터 지하셋방까지 다양하게 오르내렸다. 그녀의 시선과 발자국에 닿는 동네와 골목과 그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정겹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그려내는 마천루와 빌딩숲, 강남대로와 남산의 전망에서는 골목에 닿을 수 없다. 용산이 그랬고 옥수동이 그랬다. 그녀가 그 골목에 다시 찾아갔을 때는 모조리 허물어져 있었다. 그녀의 기억과 기록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그녀의 글씨와 문장을 조합하면 한 편의 르포르타주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없어진 그 동네와 그 골목과 그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것이니까 말이다.

이 책을 읽고 김현진의 팬이 되었다. 솔직하고 하찮으며 애절한 그녀의 글이 매력적이다. 추천하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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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6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lmicah 2014-07-18 18:07   좋아요 0 | URL
곰발님이 대단한 분이시군요. 야무님까지 이렇게 방문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시니까요. 감사해요. 무엇보다 리뷰 칭찬!! 너무 감사드려요. 성실하고 정성있다는 칭찬에 힘이 납니다. 보신한 것 같아요^^
또 들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