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바꾸려면
오구마 에이지 지음, 전형배 옮김 / 동아시아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대의민주주의제도는 현대 국가의 근간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의민주주의제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혁명과 전쟁과 살상과 암투와 결탁을 이어오며 만들어 낸 최종 결과물이다. 현대 정치의 골격이기도 한 대의민주주의제도를 한국은 수십 년 만에 응축했다. 한국전쟁 이후 오랜 독재 시기에는 제대로 이것을 구현하지 못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비로소 조금 맛보게 되었다. 대의민주주의제도를 결정하고 대표하는 것은 ‘선거와 투표’이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처럼 직접민주주의제도를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근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선거와 투표’는 민심과 민의를 국가 정책과 운영에 반영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방법이었다. 한국의 정치와 선거가 세계 그 어떤 국가보다 질이 떨어지고 수준이 낮은 것은 일견 이해가 된다. 87년 이후 제대로 된 선거와 투표를 해 본 것이 불과 30년도 되지 않는 것이다. 독재정권 아래 선거는 선거가 아니었고, 투표도 투표가 아니었다. 짧은 기간 동안 선거와 투표를 하며 한국 사람들은 두 번의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정치적인 방향성의 차이를 논하기 전에 나는 이것만으로도 한국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자민당이 수십 년 동안 해먹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물론, 두 번째 정권교체 이후 이 대의민주주의제도의 골격인 선거와 투표가 공정하게 치러졌는지 말이 많고 의심이 많아 졌지만.

 

나는 적어도 정치적 의제와 정치 구조에 대해서 비판과 음모와 공격이 오가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발전 동력이라 생각한다. 지금보다 더 선거제도나 투표제도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은 암울해 보이고 도무지 달성될 것 같지 않은 정권교체도 언젠가는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대의민주주의제도가 최상의 제도나 방법이 아님을 주장한다. 선거와 투표도 오롯이 민심과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 「사회를 바꾸려면」은 도발한다. 현대 국가를 구성하고 운영하고 유지하는 근간을 흔드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 이었다.(책을 다 읽고 나니 그런 걱정은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고 여기며 입시경쟁을 뚫고 올라왔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고 나니 진리탐구의 전당은커녕, 학생들만 엄청 뽑아놓고 볼품없는 강의를 억지로 듣게 하고 수업료 올리기에 바쁘다.” (p.320)

 

이 부분만 읽으면 한국의 사회학자가 한국 사회를 진단하면서 쓴 문장으로 보인다. IMF이후 한국사회, 특히 대학과 대학생이 겪고 있는 사회적 진통을 표현한 듯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60년대 후반 일본의 대학에서 전공투 운동이 벌어지게 된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무려 50년 전 일본의 대학과 대학생들이 겪었던 일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일부 의도적으로, 일부 어쩔 수 없이 한국은 일본의 제도와 풍습, 사회체제와 학문, 문화와 의식을 답습했다. 일본이 80년대 겪었던 부동산 버블붕괴와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지금 한국이 겪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일본을 가리켜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자꾸만 한국의 미래를 미리 보는 것 같았다.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앞으로 한국은 이렇게 될 거야.’라고 예언하는 것 같았다.

 

저자인 오구마 에이지는 젊은 사회학자다. 책의 전반부에는 지금의 민주주의가 정착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이론적 배경을 자세하게 언급하는 데, 사회학·철학책 몇 권 읽는 것 같이 짜임새 있고 내밀하게 분석한 것이 돋보였다. 특히, 나치스의 집권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후 방법론적으로 ‘전위당’으로의 방향성과 ‘사회민주주의’로의 방향성에 따라 어떻게 진보·좌파가 형성되고 실패했는지에 대한 분석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나치스가 정권을 쥔 것은 결코 폭력혁명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보통선거권에 의한 대의제 민주주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p.168)

 

흔히 히틀러의 나치스가 정권을 잡게 된 것은 불법적인 방법이나 폭력혁명을 통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끔찍한 2차 대전의 원인이 되었고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아우슈비츠 학살, 유대인에 대한 정신병적인 공격 등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히 히틀러와 나치스는 정상적인 인간과 인간들의 집합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히이만을 통해 악의 평범함과 편재성을 악몽처럼 경험한 현대인들은 아히이만의 얼굴에 히틀러와 나치스의 얼굴을 오버랩해야 한다. 1차 대전 이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는 극우 폭력 단체를 양산했고, 지독한 실업난과 구직난에 허덕이던 청년들은 너도나도 이곳에 몰려들었다. 결코 폭력을 동원하거나 강제로 끌어 낸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 선출된 권력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대의민주주의제도가 현대국가를 운영하고 유지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될 수 있지만 그 제도로 인해 선출된 권력에 대해 무한대로 부여한 정통성은 한순간에 괴물 내지는 악마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법만 정상적이고 이후 과정과 결과가 비정상이라면 선거와 투표는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2차 대전 이후 전범들에 대한 체포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고 그들에 대한 처벌도 이뤄지고 있는 유럽에서, 신나치주의와 인종주의가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가 정상적인 선거와 투표로 또다시 나치스와 같은 괴물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생각에 이르니 끔찍하다.

 

대중문화 평론가인 강헌씨가 진행한 팟캐스트 방송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서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순간」이라는 책을 읽은 소감을 이야기 하면서 대의민주주의제도의 한계를 지적한 적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선거라는 것을 통해 선출된 자들이 결국 똑같은 자들이다. 뽑아놓은 저놈이 제대로 안 해서 다시 다른 놈을 뽑아도 결국 그들은 움직이고 지배하는 것은 그 위에 있는 다른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정치상황과 묘하게 맞물리면서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아 맞다! 결국 한국이라는 사회를 움직이는 이들은 저들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보이지 않는 자들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이르자 더욱 정치에 대한 혐오가 강해지는 역효과가 나기는 했지만, 선거와 투표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제도가 가장 이상적이고 훌륭하고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라는 것에 강헌씨와 오구마 에이지와 내가 비로소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과 내가 같은 반열에…….

 

“같은 마르크스주의라 해도 노동정당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여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소수 정예멤버의 전위당을 조직하여 혁명으로 정권을 잡는다는 레닌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p.282)

 

일본과 한국은 레닌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나는 현재 한국 진보정치의 괴멸의 시작은 레닌주의가 득세한 과거 7,80년대 대학운동권의 선택에 있다고 생각한다. 6.4지방선거에서 통진당 사태를 일으킨 통합민주당과는 다른 정의당과 노동당, 녹색당마저 괴멸한 것은 길지 않은 진보정당의 정치적 실험이 실패했다는 방증이다. 책에서도 언급하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50년대 이후 대학운동권에서는 레닌주의에 입각한 ‘전위당’조직 활동이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50년대와 한국의 70년대는 ‘전위’가 필요했다. 당시 일본과 한국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극소수였고, 이들은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추구하지 않고 대중을 계몽하고 영도해 보다 나은 사회를 이끌어 간다는 소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이 일반화 되고 사회 전체적으로 문맹의 비율이 낮아지면서 자연스레 ‘사회민주주의’형태로 변모해야 했는데, 여전히 ‘앞서서 나가니 따르라’라는 식의 객기만 남게 되었다. 이석기씨가 같은 정당 사람들과 모임을 하면서 전혀 실정에 맞지도 않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 한 것을 보면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전위의식’의 폐해가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이것은 이석기씨와 통진당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전체 좌파조직과 정당에 치명타를 입혔고 앞으로 좌파정당이 원내에 진입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을 심어주게 되었다. 이제 아무리 노동당, 녹색당 간판을 들고 나와도 “저런 저..저.. 저 놈들 통진당하고 똑같은 패 아니야! 빨갱이 놈들!”이라고 하면 끝이다. 게임 끝.

 

“사회운동에 있어서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frame)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론이 프레이밍(framing)이다. 현상학적인 사고를 통해 말하자면 단지 사회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은 현실세계의 복잡성을 감축시켜 도식화하여 이해한다. 그러므로 인식의 틀을 바꾸는 것이 운동에서 중요한 경우가 많다고 파악한다.” (p.387)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괴멸한 한국 좌파정치의 마지막 희망이 될 것 같아 언급한다. 사회운동에 있어서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여론조작이나 정치적 선전과 선동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국의 선거 당일 밤 TV에서 지도에 양당색깔을 입혀 표시한 선거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네거티브가 판을 치고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도 선거결과 지도는 바뀌지 않는다. 동서의 구별이 확실하다. 그만큼 프레임을 바꾸는 것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면 이것에 올인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여론전에서도 밀리고 가지고 있는 돈과 정보와 힘도 없고 대중들에게도 완전히 비호감으로 낙인찍힌 상태다. 그렇다면 물러설 곳도 없는 것이다. 방법도 없고. 지난 지방선거를 앞두고 팟캐스트 방송 중 하나가 <지방선거 데이터 센트럴>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말 그대로 지방선거 후보자들에 대한 데이터를 나열한 방송인데, 경악했다. 일단 제대로 된 공약을 가진 후보자가 거의 없었고, 음주운전쯤은 기본 장착 옵션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탈했던 것은 새누리당, 새정치연합, 진보당, 녹색당, 정의당, 노동당 후보들의 공약이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공약 같은 것이야 유권자들이 보지 않으니까 대충 해놓고 시장에 가서 인사나 더 하고 악수나 더 하자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정치의 이런 구태와 낮은 수준의 선거행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책에서 언급하는 사례가 도움이 될 듯하다.

 

“‘풍요로움보다 자연을 지켜야 한다.’라는 프레이밍만으로는 좀처럼 사람들을 사회운동의 장으로 이끌어낼 수 없다. ‘만들고 안 만들고는 주민투표로 결정해야 한다.’라는 프레이밍을 제시하면,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는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저 쪽은 나쁜 놈들이야! 저 쪽을 뽑으면 다 망해!” 라는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삼척시장에 당선된 김양호 시장은 선거 기간 내내 <핵발전소 전면 백지화>를 내세웠다. 상대편 후보가 <핵발전소 유치>를 내세운 것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김양호 시장이 당선되었다는 것은 삼척시민들의 민심과 민의를 제대로 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극히 일부다.

 

“독일 녹색당 ‘당신들은 우인가, 좌인가?’ ‘우리는 우도 좌도 아니다. 앞이다!’” (p.388)

 

“우리는 우도 좌도 아니다. 앞이다!”라고 재치 있게 받아칠 만한 녹색당원은 한국 녹색당에는 없는 걸까? “당신 빨갱이요?”라고 하면 화를 내거나 무시하는 정도에 불구하면 대중의 관심은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앞이다!”라고 말해 논점을 전환하고 전혀 다른 판국으로 사안을 주도할 수 있는 프레임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의 진보정치·좌파세력들은 그럼에도 끊임없이 대중과의 소통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들만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소수지만 <기본소득>같은 개념은 새로운 것이다. 전혀 한국 사회에서는 적용될 수 없을 것 같지만 끊임없이 이런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설득해야 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일본에서는 거리에서 벌이는 데모가 거의 잊힌 것이나 다름없어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운동수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오히려 데모의 의의를 강조했습니다.” (p.7)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에서는 대규모 데모가 장기간 지속되었다. 월스트리트 아큐파이와 재스민 혁명, 이라크와 우크라이나의 대규모 데모와 시위. 저자는 선거와 투표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데모를 통해 한국 사회가 변화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대의민주주의제도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지난 시간이 아깝거나 다른 묘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알제리와 한국의 브라질 월드컵 조별 예선 2차전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광화문광장에 모인 사람의 숫자가 8만 명이라는 뉴스를 보고 나는 절망했다. 왜냐하면 세월호 시위에 참석한 가장 많은 숫자가 그것에 반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뭐,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월드컵 응원은 즐기는 것이고 세월호 시위는 뭔가 불법적이거나 위험한 일, 내지는 잡혀갈지도 모를 일로 생각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회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꾸어야 한다. 아니 이미 바뀌고 있다. 그 길을 피해갈 수는 없다. 침묵을 지키다가 서서히 침몰하든가, 어느 시점에선가 대파국을 맞이하든가, 명백하게 좋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든가 어느 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p.278)

 

저자는 여러 번 울리히 벡의 「리스크 사회」를 언급하면서 사회 어떤 계층이든 원전사고와 같은 국가적 재앙이 닥쳤을 때, 자신의 계층을 이용해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냥 관심 끄고 혐오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파국은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명백하게 좋은 방향”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지만 가만히 앉아서 파국을 맞고 싶은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움직여야 하는데, 원전사고를 겪은 일본인들보다 한국인들은 전 사회적 리스크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는 게 아닌가 싶다. 거리로 나가 조금만 인도로 진출하면 집시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끌려가야 하고 한여름이나 한겨울 상관없이 물대포를 맞아야 하는 두려움과 귀찮음을 벗어던지면서까지 데모를 하러 나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당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 당신이 바뀌기 위해서는 당신이 나설 것, 낡아빠진 말 같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말의 의미가 새롭게 재활용되어야 할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p.428)

 

책에서 아쉬웠던 것은 용두사미다. 결론이 애매모호하다. 저자 스스로도 “낡아빠진 말 같지만”이라고 언급했듯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제 당신 스스로 나서라. 거리로 나가라.” 이게 얼마나 한국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모르겠다. 「88만원 세대」와 「분노하라」를 읽고 몇 사람이나 짱돌을 들고 거리로 나갔는지 모르겠다.

 

책이 용두사미이다 보니 리뷰도 용두사미다. 이건 핑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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