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사 깊이 읽기 - 역사 속 말없는 여성들에게 말 걸기
주진오 외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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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은 절반가량의 사람들은 여성에 대해 잘 모른다. 당연하다.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으로 살 수 없고, 여성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을 잘 알 수 없다. 그래서 윗입술 언저리에 거뭇거뭇 수염이 나는 시절부터 줄곧 여성을 상상하고 여성과 어떻게 하면 잘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맹렬하게 탐구한다. 잘 될 때도 있고 잘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여성이 아닌 사람들의 타고난 운명이라 할 수도 있다. 여성이 아님에도 여성을 잘 안다고 하는 치들의 이야기는 거의가 추정 내지는 판타지다. 내지는 여성들이 자신들과 다른 성의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과 패턴의 차이에 따라 홀로 이미지는 만들어 내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생각은 결혼 후 완벽하게 확고해 졌다. 아내와는 대학 때부터 10년간을 연애했다. 연애 전에는 친한 친구 사이였다. 서로의 집안 얘기까지 스스럼없이 나눌 정도의 친구.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 전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물론, 내가 3년 6개월가량 군 생활을 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연애 기간은 6년 정도이다. 어쨌든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그만큼 서로 잘 알고 다른 점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은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부부 생활은 또 다른 세계였다. 나는 정말 놀랐다. 10년 간 한 여성과 연애를 하고나니 웬만한 여성이나 커플들의 상태나 심리를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결혼은 완전히 달랐다. 10년간의 연애 기간은 완전히 삭제되고 또 다른 관계를 만들어가야 했다.

 

 

“왜 명절 때 꼭 시집부터 먼저 가야해?”

“...”

 

나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다. 어린 시절 명절이나 방학 때 항상 먼저 가는 곳은 어머니의 시집이었다. 단 한 번도 어머니의 친정부터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집이 그랬다. 당연히 엄마의 시집부터 간 다음 친정에 갔다. 그렇게라도 가면 다행이었다. 시집과 친정의 거리가 멀거나 꼬장꼬장한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라면 명절에 친정에 가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서 시집온 지 몇 해가 지나도 친정에 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었다.

그런 관습도 있고 나는 남성이니 그런 문제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아내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러네, 왜 시집부터 먼저 가지? 유교적인 관습 때문인가?”

“몰라~! 어쨌든 억울해.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건 정말 억울해.”

“...”

 

정말 억울할 것 같았다. 내가 만약 여성으로 태어나 결혼해 매 명절 때마다 시집부터 찾아간다면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았다.

 

 

“우선 여성은 혼인 뒤 꼭 시집에 갈 필요가 없고 친정 부모를 모실 수도 있었으니 ‘출가외인’이라는 관념이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도 시집에 들어가 살 때에 비해서는 덜 일방적이었을 것이다.” (p.96)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너무나도 많이 들었던 말인데, TV에서 보거나 주변에서 들을 때에는 당연히 오랜 관습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 책 「한국 여성사 깊이 읽기」에서는 그것이 오랜 전통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고려시절에는 오히려 혼인 한 뒤에는 일정 기간 동안 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어와 살면서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세종대왕께서 옛 제도를 흠모하여 왕자와 왕녀의 혼인을 모두 친영으로 하고 사대부들에게도 본받게 하였는데, 근래 들으니 구습을 그대로 쫓아 여전히 ‘남귀여가’하니 천도에 역행하는 것이다.” (p.148)

 

이러한 관례를 가리켜 ‘남귀여가’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남귀여가’ 관습이 고려시절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중엽 이후 까지 줄곧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중종이 한 위의 말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초기에는 고려의 관습이던 ‘남귀여가’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것은 말소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세종 이후 중종 무렵까지 횡행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이 무렵까지도 딸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남귀여가(혼인 후 남성이 여자 집에서 생활하는 것)라는 혼인 풍속에 따라 여자들이 혼인을 해도 친정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여자들은 자신이 남의 집의 며느리이기보다는 그저 자기가 살던 집의 딸이라는 의식이 더 강했다.” (p.141)

 

국가가 귀족 계층은 물론 평민들에게까지 이런 ‘남귀여가’현상을 금지시켰다는 것은 조선의 지배이념이던 성리학적 세계관에 다소 배치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 내내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더군다나 조선 말기 횡행했던 외척에 의한 부정과 부패 현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볼 수 있다. 결혼한 후에도 ‘출가외인’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살던 집의 딸이라는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궁이나 빈에 오르면 당연히 외척들을 살피고 좋은 자리에 등용하고자 했을 것이다.

 

 

“모두 열두 개의 주제로 구성된 이 책은 대학교 여성사 수업의 교재로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특히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기존의 역사 해석을 뒤집거나 문제제기한 것은 토론 수업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p.8)

 

이 책 「한국 여성사 깊이 읽기」는 여성 학자들이 쓴 논문을 엮을 책이다. 내가 10년 동안 연애를 하고도 결혼한 후 아내의 모습이 완전히 생소했던 경험을 한 것처럼 남성은 여성을 모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니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완전히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알 수 없다. 서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을 읽었다. 다소 학구적인 냄새가 나는 책이라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 내 나름의 방식대로 읽으니 지루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며 ‘여성인 아내를 조금 더 이해해보자.’ 싶었다.

각 주제에 따라 심도 깊게 논의가 펼쳐진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출가외인’ 경향이 굳어지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명절 때는 시집부터 가는 경향이 형성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유교적 전통이나 조선조 관습이 그대로 답습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발견한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17세기에 접어들자 단순히 재가하지 않았다고 해서 열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점차 열녀는 남편을 따라 죽는 여자를 의미하게 됐다.” (p.177)

 

한국에서 살아 온 여성들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오해하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알게 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재미였다. ‘열녀’에 대해서도 다분히 남성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고 기록했다는 것을 책에서는 지적한다.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된 채로 정절을 지키는 것이 ‘열녀’라고 흔히 알고 있다. 그러면서 시부모를 잘 봉양하고 시댁의 가세를 일으켰다면 ‘열녀문’이 내려지고 임금으로부터 큰 칭찬과 인정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열녀’현상이 17세기에 들어서는 남편을 따라 죽는 여자를 의미했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잔인하고 무서운 행위다. 지금보다 일찍 혼인을 했지만 그만큼 수명이 짧았다. 아주 잠깐 부부의 정도 나누기 전에 남편이 죽은 채 청상과부로 남은 아내는 다른 선택권이 없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기억과 기념은 열녀 행위를 부추겼음이 틀림없다. 즉 이데올로기적인 강요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당시 이 강요는 도덕성이라는 이름하에 자발성에 기초를 두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그것을 강요라기보다는 자신의 도덕적 실천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p.189)

 

여성의 시각으로 이런 17세이 이후 ‘열녀’에 대한 풀이가 설득력이 있었다. 흡사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서 만들어 낸 ‘카미카제’ 현상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되었다. 분명 ‘카미카제’는 자살 폭격기에 타고 장렬하게 전사한 조종사들의 사후에 만들어진 단어다. 전쟁과 제국주의, 황제에 대한 충성이 버무려져 기꺼이 목숨을 내어던지는 자발적 자살이 미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 ‘열녀’는 조금 다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그 이전 왕조인 고려시대보다 여성의 사회적 입지가 좁았다. 시집을 와서 남편이 죽어버리면 재가를 하지 않는 이상 학문에 정진하거나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불비했다. 자식이라도 있다면 자식을 보고 견디며 살겠지만 자식도 없이 남편이 죽었다면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구차하고 의미 없이 사느니 이름을 남기는 열녀가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가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50여 년이 흐른 뒤였다. 1988년 일본 남성들이 한국에서 성매매 관광을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한 세미나에서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p.287)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가 처음 제기된 것이 일본의 한국내 성매매 관광이었다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친일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채 역사가 이어졌으니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굴욕적인 대일청구권협상으로 아직까지 공식 사과조차 받지 못하고 있으니 말해 무엇 할까 싶다. 수요 집회가 1000차가 넘어서고 국회에서 증언을 해도 꿈쩍도 없다.

 

 

“1991년 8월 14일, ‘위안부’문제가 다시 잊힐 것만 같은 막막한 상황에서 김학순(1922-1997)은 본인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p.288)

“‘위안부’ 피해여성들이 피해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커밍아웃’행위에 비유되고는 한다.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세상의 편견과 차별을 각오해야 하듯이, ‘위안부’피해여성 또한 자신의 피해를 밝히기까지 많은 것을 고민하고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p.289)

 

늘 직접적인 피해를 겪은 할머니들에 의해 알려지고 퍼져 나갔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런 오욕의 역사를 제대로 조명하고 제 나라의 국민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임무인데 국가가 위안부 피해여성들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미국에 가서 증언을 하고 유수의 외신들과 인터뷰를 해도 이놈의 나라에서는 도무지 이슈가 되지 않는다. 평생을 오욕과 수치의 역사를 작은 몸뚱어리로 신음하며 살아 온 할머니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것이 이놈의 나라다.

 

 

“한국전쟁 중 국군을 특별하게 ‘위안’한다는 명목 하에 조직된 특수위안대는 공식 역사가 기억되지 않는, 망각된 역사이다.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던 이야기이니 만큼 그 전모를 밝히기가 쉽지 않다.” (p.308)

 

책의 말미에 한국전쟁 중 있었던 ‘특수위안대’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이것은 예전에 다른 책에서 잠깐 봤던 내용인데 그 책에서도 아직 전모가 밝혀지거나 직접적인 증언이나 증거가 부족해 이슈가 되지 않고 있을 뿐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라고 했는데 이 책에도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한마디로 국군 병사의 성욕 해소를 위한 공식 사창가를 만든 것이다.

 

 

“특수위안대의 문제는 첫째, 남성 병사의 성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전제하고 여성을 성욕 해소의 수단으로 대상화했으며 둘째, 강간 사건을 사전에 막는다는 구실로 일부 여성들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셋째, ‘위안부’를 군의 직접적 통제를 받는 비정규군으로 규정함으로써 성적 ‘위안’을 국가를 위한 공무로 포장해 여성의 성 동원을 합리화했다는 점이다.” (p.311)

 

특수위안대의 문제에 대해서 세 가지로 압축해 설명하는데 굉장히 설득력이 있는 논리다. 이것이 법률적으로 문화적으로 시대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있고 불법성을 다툴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정할 수 없지만 여성의 시각에서 보는 문제점에는 확실하게 동의한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이런 저런 비밀스러운 문서나 증언이 확보가 되면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되리라 짐작 된다.

 

그나저나 명절 때 당연히 시집부터 가는 것은 언제부터 만들어진 관습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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