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 세계를 전복하는 사상 입문
히로세 준 지음, 김경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국정원 선거 개입 논란에 대한 여론이 뜨겁다. 물론 여론을 형성하고 유통하는 채널에 따라 뜨거움의 정도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무래도 가장 뜨거운 곳은 SNS이고 가장 미지근하고 소극적인 곳은 지상파TV와 조중동이다. 종편은 말할 가치도 없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니거나 젊은 직장인으로 87년 서울의 봄을 겪은 세대는 말 그대로 ‘혁명’을 경험한 세대다. 자신들의 힘과 목소리로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6.29 선언’으로 상징되는 일련의 정치 혁명의 이면에는 정치적인 노림수와 음모론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지만 어쨌든 그 전까지는 꿈도 꾸지 못했던 혁명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들은 386세대로 현재 한국이라는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많은 386이 정치권으로 뛰어 들었고 그들의 치기와 혁명 쟁취 경험이 한국의 정치와 사회 전체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2013년 7월 현재, 87년 이전의 상황에서 얼마나 발전하고 진보되었는가를 생각할 때 암담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한국의 정치는 후진적이고 국민들의 수준 또한 후진적이다. 아직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관 중 하나인 국정원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선거인 대통령 선거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인들이 후진국이라고 생각하는 국가들에서조차 일어나지 않을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여당은 그들의 수십 년 동안 존재해 온 생존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본질을 흐리고 물타기를 하고 역공세를 펼치는 전술. 야당은 수십 년 동안 그래왔듯이 늘 국민들보다 더 늦게 움직이고 더 작은 목소리를 낸다. 멍청하게 넋 놓고 있다가 여당에 의해 수세에 몰린다. 이런 짓거리를 수십 년 동안 지켜봐 온 국민들은 그저 ‘그러려니’하고 만다. ‘그러려니’라니…….

 

19세기 초 유명한 정치철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한국의 정치 구조 자체가 기생적으로 탄생했고 몇 번의 군부독재를 겪으며 잘못된 역사와 그것에 편승한 기회주의자들을 단죄하지 못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지역주의 프레임에 국민들은 여지없이 속아 넘어갔다.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수십 년 전에는 막 가난을 탈출한 국민들이 아직 정치적 의의에 대해 미숙하고 잘 알지 못해서라고 핑계 댈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386세대가 각계각층, 정치권까지 들어가 있는 상황인데도 바뀌지 않는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괴물에 온 몸을 내던진다.

그렇다.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는 표현이 한국의 상황에 가장 딱 들어맞는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은 80년대와 같이 혜성처럼 나타난 히어로 한 명이 수많은 군중을, 국민을 선도해서 이끌어 갈 수 없는 구조다. 그렇다면 수십 년 전의 방법을 고수해서는 가능성이 없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정치인들에게 헛된 희망을 걸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 카리스마가 넘치는 시대의 영웅을 갈망해서도 안 된다.

 

 

이 책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를 읽을 무렵 터키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에 대한 뉴스 하나를 보게 되었다. 수많은 군중이 시위대를 형성한 광장 한 복판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나는 전율했다. 그런 시위는 들어본 적도 책에서 읽은 적도 없는 형태였다. 대학 1학년 때 잠시 경험한 시위와 데모, 책에서 읽거나 한국의 TV뉴스에서 보도되는 시위와 데모의 모습은 100% 과격하고 폭력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시위의 한복판에서 청아하고 순결한 피아노 소리가 광장을 가득채운 시위대와 그들과 대치한 경찰들을 한 아귀에 감싸 안은 모습은 그곳으로부터 수천km 떨어진 한국의 한 가정집 컴퓨터 화면에서도 감동으로 전해 졌다. 제대로 된 ‘혁명’을 겪어본 적이 없고 이제는 그에 대한 희미한 기억과 냄새조차 사멸해 가는 지금, 혁명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갈구하는 나와 당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터키의 피아노 연주 시위와 같은 참신하고 기발한 그것에 대한 하나의 이론적·방법론적 접근을 이 책을 통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확증편향

 

한국의 언론 상황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어떤 쪽은 ‘완전히 정부 편향적이고 보수적’이라고 평가하고 또 다른 쪽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평가한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 이러한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난 대선 전 SNS상에서는 박근혜보다 문재인 후보의 지지가 우세했다. 댓글 부대가 SNS에 전면적으로 투입되면서 부터는 그 속에서도 극명하게 의견이 나뉘는 경향을 보이기는 했지만 일정한 패턴을 유지했다. 대통령 후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도 극명하게 의견과 평가가 나뉘었다. 어쨌든 야당의 문재인 후보는 지역주의 고착에 의한 ‘묻지 마 투표’와 50대 이상의 절대적인 박근혜 지지에 의해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그를 지지한 수많은 48% 사람들은 집단 멘붕에 빠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또한 그것이 ‘참’이고 ‘옳다’라고 믿는다. ‘확증편향’은 광범위하고 유연하게 우리들의 사고 속으로 침투한다. 어느 한쪽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양쪽 모두가 자신들만의 ‘확증편향’ 속에서 사회를 규정하고 이해하며 인식하고 행동한다. 도무지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속으로 인정하면서 ‘확증편향’이 가져다주는 안정성에 기생한다. 그것이 편한 길이고 안전한 길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난 이명박 정권 초기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범국민적인 반대 의견이 수렴되어 대규모의 촛불 집회가 열렸다. 수만 명이 거리를 가득 채울 때 맞은편에서는 반드시 어버이연합 노인들이 등장 했다. 수만 명의 촛불 시민들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숫자였고 대부분 동원된 사람들로 구성된 그들을 무겁게 보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 시절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통과시킨 방송법으로 인해 종편이 탄생했다. 종편 또한 별 의미가 없을 것이라 코웃음 치며 그들의 몰락을 관전할 날만을 키득거리며 기다렸다. 그런데 어쨌든 그들은 그들만의 ‘확증편향’으로 또 다른 여론을 만들어 냈고 48%보다 더 많은 51%를 한 데 모았다. 그들의 ‘확증편향’으로는 그들의 승리다. 어려운 싸움에서 힘을 모아 승리한 것이다.

 

 

 

봉기, beyond 혁명

 

“현재를 혁명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는 ‘혁명 불가능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것은 혁명이 아닌 봉기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봉기는 언제 어디서 누구나 부당한 모든 것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다. 체제를 바꾸는 것이 아닌 뒤흔드는 것이다. 해박한 지식이 없어도 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해도 좋다. 엄숙할 필요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삶 그 자체가 즐거운 투쟁이 되는 것이 바로봉기다.”

 

터키 시위에서 벌어진 피아노 연주, 지난 이명박 정권에서 축제처럼 벌어진 촛불 집회, 지금 국정원 선거개입 논란에 대한 반대 시위에서 보이는 시민들의 자발성. 이것은 분명 수십 년 전에 일어났던 ‘혁명’과는 다른 것이다. 깃발을 들고 스크럼을 짜서 누군가의 희생을 수혈 받아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간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다른 형태이다.

누군가 선봉에 서서 주도하는 시위가 아니라 너도 나도 나와서 각자 하고 싶은 말 하고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무리나 조직에 의해 끌려가는 형태가 아닌 것이 ‘봉기’라는 것이다. ‘혁명’을 위해 젊음을 투사했던 지금의 기성세대에게는 퍽 낯선 형태일 것이다. 자연스럽고 무겁기만 한 것이 아닌 시위. 점성이 강한 페인트로 글자체만으로도 공격적이고 투쟁적인 깃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걸그룹, 보이그룹 내지는 운동선수 응원하듯이 자신만의 피켓을 만들거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실제로 15M은 튀니지나 이집트에서 일어난 운동과 공통점이 많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을 비롯한 청년들이 운동의 주역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기존의 정당이나 노조가 조직하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정한 리더나 중심 그룹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운동의 형성이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이다.”

 

15M은 2011년 5월15일에 시작되었다고 하여 이름 붙인 대규모의 민중 봉기인데, 스페인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스페인 각 도시에서 이어진 민중 봉기다. 5월 23일 치러질 지방 선거를 앞두고 선거전이 한창인 스페인 전국을 뒤흔들었다.

 

 

“기존 시스템에 대해 전반적인 ‘NO’를 들이미는 것이지 새로운 시스템이나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실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문제를 제기하는 운동, 문제를 공유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봉기’이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 답을 공유하는 운동인 ‘혁명’이 아닌 것이다.” (p.175∼176)

 

저자는 이 15M 운동에서 그가 말하는 ‘봉기’에 대한 전형을 찾는다. 이전의 ‘혁명’이 짊어졌던 것.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답을 공유해야 하는 절차적 혼탁함을 넘어서는 것이 ‘봉기’라는 것이다. 특정한 사안과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탈피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혁명’이 가지지 못한 확장성과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다. 뭔가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나하나 무슨 일인지, 그 이면의 의도는 무엇인지 조사하고 연구할 수 없는 대중은 기존 시스템에 대해 전반적인 ‘NO'를 들이미는 것이 더 몸에 와 닿는 것이다.

 

 

“이것을 시대착오적인 ‘독재 체제’를 이제야 타도했다는 식으로 아랍의 봄을 마치 아랍 여러 국가의 특수한 사정인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애당초 ‘독재 체제’는 아랍을 비롯한 제3세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스페인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이 보여 주는 양당 정당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선거제도 역시 독재적이고 과두적이지 않은가(‘놈들은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지만,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iLo llaman democracia y no lo es!]). 아랍의 봄은 기존의 시스템 전체에 대해 ‘No'를 들이미는 민중 봉기다.” (p.176)

 

한국의 기성세대가 그들이 젊은 시절 군부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벌였던 혁명을 위한 시위와 목소리의 기준으로 ‘봉기’를 이해하고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아무리 정치적 선진성을 답보한 국가라 하더라도 그들의 정치구조는 여전히 양당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저들과 우리가 나눠먹기 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정치 지형과 구조에서 가장 극명하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6공화국 이후 줄기차게 헌법 개정과 정치구조 개편에 대해 떠드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정치인들은 선거만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줄어들게 만들 수 있는 법 개정에 대해 모른 체했다.

그런 구리고 오래된 사고로 아랍의 봄 이후 유럽을 뒤흔들고 작년 월스트리트를 물들인 ‘봉기’의 물결을 이해할 수 없다. 지금 몇 주째 한국에서 벌어지는 국정원에 대한 시위도 마찬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콘크리트화 된 한국의 정치적 구조와 과두적 샴쌍둥이 양당구조로는 바꿀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도 한국의 국민들은 국정원 사건과 그것에 대한 이후 여당과 야당의 반응과 대책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하지 않는다. 어떤 변명을 하고 합리화를 해도 지난 쇠고기 수입에 대한 촛불집회의 열기만큼 뜨겁지 않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풀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

 

미해병 신병훈련소에 입소한 로렌스는 교관 하트만 상사에게 수료 전날 밤 총을 발사한다. 입소 때부터 고문관이던 로렌스에게 하트만은 가차 없는 욕설과 비인격적인 대우를 선사한다.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로렌스는 급기야 동기 훈련병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에 이른다. 로렌스를 제외한 다른 훈련병들도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베트남전에 참전시킬 군대의 무기 하나로 만들어 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명한 영화 『풀 메탈 자켓』의 전반부 내용이다. 획일적인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인 신병훈련소에서 로렌스는 삐죽 튀어나온 작은 돌기 하나일 뿐이다. 날카로운 도구로 툭 쳐내버리면 깔끔해 진다. ‘다른’것이 아니라 ‘틀린’것이 되어 버린 로렌스는 하트만 상사가 그토록 만들어 내고 싶어 하던 살기를 띤 눈빛을 죽기 직전 그가 그토록 괴롭히던 로렌스의 눈에서 딱 한 번 확인한다.

 

첨단의 문명을 만들어 낸 인간은 어쩐 일인지 문명의 발전과 비례해 소외되어 갔다. 일부러 소외시키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벌어졌다. 자기 스스로 소외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것보다 좋은 것이다. 몇 년 간 수도 없이 벌어진 묻지마 범죄는 그것의 가장 참담한 결과물이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가둔 채 그 속에서 만들어 낸 관계에만 천착하게 된다.

영화『풀 메탈 자켓』에서 나는 로렌스와 함께 훈련 받던 동기 훈련병들에게 주목 한다. 똑같은 옷, 똑같은 군가, 똑같은 훈련을 받지만 그들은 결국 이층 침대 안에서 서로에게 소외 되었다. 소외가 지속되면 참견하는 것이 귀찮아진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왜 국정원 규탄 집회에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는가? 특히 젊은이들이?

지금의 젊은이, 특히 20대는 어린 시절부터 소외를 경험했다. 부모는 맞벌이로 눈코를 뜰 새 없이 바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경쟁을 강요받고 급기야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해’, ‘배려’, ‘이웃’ 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회인으로 자라난 것이다. 부모의 손에서 모든 것을 충당 하고 모든 궁금증을 해결했으며 대학에 진학해서도 사회적인 의미에 대해 관심을 두기보다 스펙을 쌓거나 공무원이 되기 위해 도서관과 열람실에 틀어 박혀야만 했다. 이것이 그들의 잘못인가? 누가 이런 20대를 만들어 냈나?

그런 면에서 고등학생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눈물겨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생각 없는 벌거숭이들이라 여기는 어른들에게 시원한 어퍼컷을 날리는 것 같아 한 대 맞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분명 ‘혁명’의 세대와는 다른 ‘봉기’의 세대에게 맞는 적용이 탄생해야 한다. 어른들이 주도하거나 특정 세력과 조직이 선동하는 ‘봉기’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구리고 꼰대적인 냄새가 나면 한순간에 빠져 나갈 것이다.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을 더 이상 괴물 같은 사회 구조 속에서 소외시키지 않아야 한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봉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아랍의 봄은 청년 운동, 프레카리아트precariat (‘precarious(불안정한)’와 ‘proletariat(무산계급)’를 합성한 조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불안정한 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 실업자, 노숙자 등을 총칭한다. 2003년에 이탈리아에서 사용하기 시작해 2006년 프랑스의 최초고용계약법 반대 시위에서도 쓰였다)의 운동이며, ‘불안정’, 더 정확하게 말하면 ‘준(準)안정’ 위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이 기존의 정치 경제 시스템 전체를 거부하는 운동인 것이다.” (p.177)

 

아랍의 봄에 대해서도 한국의 언론은 기울어진 잣대로 보도 했다. 그 아랍의 봄으로 촉발된 유럽 국가들의 ‘민중 봉기’ 또한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300원 남짓 최저임금을 인상해 놓고 온갖 생색을 내는 저들을 향해서 짱돌을 던지기는커녕 분노조차 하지 않는다.

 

 

“역사 속 수많은 혁명은 실패했다. 혁명은 특정 지도자와 당이 있고, 대다수가 동의해야 하는 사상이나 규칙이 필요하다. 혁명은 문제를 ‘해결’하고 이상을 ‘실현’하는 ‘성공’을 통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그대로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세대다. 우리는 ‘혁명 불가능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희망은 봉기에 있다. 봉기는 특정 지도자와 당이 필요 없다. 언제 어디서 누구나 모든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봉기다. 봉기는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제어’하는 것이다. 해결책이나 정답은 필요 없다. 나로부터, 너로부터, 우리 모두로부터 봉기는 가능하다.”

 

한 번도 ‘봉기’를 해보지 않아 두렵다. 막연하게 두렵다. 사문화된 법으로 경찰서에 끌려가거나 고소·고발을 당하는 꼴을 지난 5년 동안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의탁해 구조를 바꿀 수 없는 곳이 나와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이다. 한국은 그만큼 미성숙한 사회다.

이 책을 읽으며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새로운 희망의 방법 하나를 찾은 것 같기도 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얼마만큼 이 책에서 말하는 ‘봉기’가 한국 땅에서 펼쳐질 수 있을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국정원 규탄 집회가 ‘봉기’의 형태로 발전될 수 있을까? 솔직한 마음으로는 큰 기대가 없다. 맥이 탁 풀리지만 솔직히 그렇다. 그들의 수준에 딱 맞는 지도자를 뽑은 한국의 국민들에게 어떤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싶다. 정치구조, 정당형태, 지역주의 고착, 세대별 갈등, 계층별 갈등, 세대 간 갈등 등 산적한 문제들을 생각하면 ‘아랍의 봄’으로 촉발된 ‘봉기’의 물결이 이곳 한국까지는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신나게 책 읽고 희망차게 리뷰를 작성했는데 결국 결론은 암울하니 나 스스로 복장이 터진다. 답답할 노릇이다.

 

그래도 이 책은 추천하고 싶다. 나와 같은 세대는 물론 더 어린 세대들에게는 낯설고 불편하며 부담되는 ‘혁명’이 아니라 우리도 기꺼이 몸한번 내던지고 싶은 ‘봉기’를 얘기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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