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취미들
김도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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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의 신경과 근육, 세포까지도 완전히 이완되어 마치 구름 저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껴본 적이 있다.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이 찌릿찌릿 해지며 머리털 끝까지 따뜻하고 짜릿하며 흥분되는 감각이 전해지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다. 일부러 연출하기 위해 짜낸 상황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경험했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이후에도 그 찰나의 쾌감을 다시 설명할 수 없다. 상황을 재연해 볼 수도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어떤 말과 상황으로도 설명할 없고 묘사할 수 없는 그 순간을 나는 경험했다는 것이다.

힘든 일을 끝내고 늦은 시간 귀가하여 따뜻한 물로 씻은 후 나만의 공간에서 편안하게 大자로 누워 있을 때의 그 기분, 그 느낌.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하고 있는 편안함이다. 혹은 남들과는 다르게 나만의 편안한 공간 내지는 시간,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나도 그런 것이 있다. 일상에 찌들어 힘들 때 그 곳(상황)을 찾는다. 다른 것은 다 내려놓고 온전히 그 곳(상황)에 집중한다. 마치 나를 제외 한 모든 것이 암흑인 것처럼 상황이 조성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편안하고 싶어 한다. 상황도, 기분도, 몸도, 마음도, 미래도……. 하지만 편안할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 이다. 당장 해야 할 업무가 쌓여 있고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사람을 오늘도 마주해야 한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심지어 나 스스로에게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더군다나 나를 둘러싼 세상이라는 존재는 이것을 더욱 심화시킨다. 일어나는 일들이란 모조리 편안하지 않은 것들 투성이다. 아침 뉴스와 저녁 뉴스에서는 온통 불편한 것들로 가득 채워진다. 요즘은 하루 종일 뉴스를 내보내는 곳도 있는데 그 채널만 고정시켜 놓고 있다가는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을 것이다. 도무지 불편한 것들 투성이다. 언짢은 것들 투성이다.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오늘과 내일로 점철될 삶이라는 것도 알지만 때로는 편안함, 내 몸과 영혼이 완전히 편안해지는 상태를 경험해 보고 싶다. 그 보석과 같았던 경험이 언제 또 한 번 나를 부지불식간에 찾아올지 모르지만 지쳐 있는 요즘과 같은 때가 적절한 타이밍 인 듯싶다.

 


이 책 「악취미들」의 저자는 작가 김도언이다. 다른 사람의 서평을 통해서 알게 된 작가인데 그의 책은 처음이다. 일단 제목과 책의 표지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가득 담고 있는 책이다 싶었는데, 내용은 더 불편했다. 전혀 편안하게 볼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 찬 소설집이다. 지난 주 업무가 과다하여 밤10시가 넘어서 퇴근하는 날이 많았는데 이상하게 천근만근 같은 몸을 추슬러 이 책을 읽고 싶었다. 동시에 읽고 있는 책이 두 권이 더 있고 내가 평소 더 선호하고 좋아하는 내용이 담긴 책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거무튀튀하고 기괴한 표지의 이 책에 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힘들고 지친 몸과 마음에 더 심한 채찍질을 가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싶었다. 그리고 책에 실린 10편의 악취미를 단숨에 읽었다. 이른 더위로 온 몸은 찐득찐득하고 밤공기는 불쾌했다. 책상 건너편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아파트가 나를 덮칠 듯 웅웅거렸다. 이렇게 불편한 책을 단번에 읽어 내리고 나서 속이 매스꺼웠다. 맛있게 먹은 된장찌개를 모조리 게워내고 싶었다. 온 몸에 찬물을 끼얹고 다시 책상에 앉아도 불편하고 섬뜩하고 매스꺼웠다.

김도언 작가의 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김훈의 글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듯 했다. 두 사람의 글은 공통적으로 불편하다. 읽기도 버겁다. 두 사람의 글이 완전히 다르기는 한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하게 글의 색깔과 무게, 냄새가 다른데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냥 두 작가의 글을 읽어봐야 한다.

 


“청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의 시는 단정하고 순정한데, 그는 순정한 시인인데,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다. 그가 만진 자리는 모두 폐허다.” (p.31)

“‘더러운 변태들. 더러운 시인들.’ 라는 미친 사람처럼 킬킬거리며 웃었다. 수는 순결한 시인의 더러운 정부였다. 아니 더러운 시인의 깨끗한 정부였다.” (p.33)

 

<권태>에 나오는 청은 주인공의 동생이다. 요절한 천재 시인에게 세상과 대중은 찬사와 안타까움을 함께 보낸다. 어려서부터 동생의 그늘에서 질투와 시기를 동시에 품어 왔던 주인공은 동생의 요절에 대해서도 명확한 선을 긋지 못한다. 홀로 남겨진 아름다운 제수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한 갈무리를 하지 않는다.

세상의 칭송과 사랑을 받는 천재 시인에게도 불편한 진실이 있었다. ‘더러운 시인의 깨끗한 정부’ [수]가 남긴 일기를 통해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인이던 동생 청의 악취미를 들여다보게 된다. 청산하지 못한 동생에 대한 질투와 시기를 그대로 마음속에 가두고 짐짓 놀란 척 하는 모습이 경악스럽지 않았다. 김도언의 글로 표현된 주인공과 순결한 듯 보인 시인 청의 작태는 더럽기 짝이 없지만 손가락질 할 수 없다.

 


“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있다. 그의 어깨엔 별이 두 개. 그는 사령관이고, 나는 그의 전담 당번병이다.” (p.46)

“운행을 나가는 나를 뒤쫓아 나와서 뒷좌석에 타고는 합승을 하는 남자 손님을 꼬드겨 매춘을 하는 행위를, 아내는 스스로에 대한 학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p.73)

 

<B시 오후, 비 오고 흐림>에서 나는 군 복무 시절 나를 성노리개로 전락시킨 사령관을 찾아 B시로 향한다. 그를 죽이기 위해 편의점을 털고 칼을 준비하고 켜켜이 묵혀 둔 분노를 끄집어낸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나는 갑작스런 아이의 죽음으로 이상해진 아내를 뒷좌석에 태우고 매춘을 하는 택시 드라이버다. 어딘지 모르는 목적지를 향해 괴물과 같은 도시의 어둠속을 질주한다.

두 작품 모두 ‘나’는 방향이 없다. 방향성도 없고 지향하는 바도 불분명하다. 군 복무 시절 내내 그의 성노리개가 되었다고 하지만 동시에 ‘나’를 향한 사령관 그자의 사랑에 탐닉하기도 한다. 전역해 B시의 시장 선거에 출마한 그를 죽이기 위해 B시로 향하는 ‘나’의 심리적 상태 또한 다면적이고 불확실하다. 정말 주인공이 당한 것인지 그와 사랑을 나눈 것인지도 불명확하고 시장에 당선된 그를 죽인 것인지 죽였다고 상상한 채 자살한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또한 주인공이 직접 운전하는 택시에 아내를 태운 채 매춘을 감행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빠진 ‘나’는 판단을 포기한다. 그저 아내가 시키는 대로 아내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향한다. 물론, 최소한 아내를 위협하고 해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외모의 남자 승객을 고르는 최소한의 책임은 행사하지만 그것으로 엉망진창인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다.

불편하고 불편하다.

 


<나쁜 교육>. <너의 형에게 말해야겠다>, <지붕위의 날들>, <잔혹>, <밤하늘은 호수다>

<톱스타 살인사건 전말기>

6편 모두 불편한 내용이다.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내용들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고통의 관리>였다.

주인공은 소설가다. 이름은 박성호.

 

“십사 년 전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네 권의 소설집과 다섯 권의 장편소설을 펴낸 올해 삼십 구세의 중견 소설가” (p.99)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온 직후 주변 지인들과 가진 전화 통화 내역이 이 작품의 전부다. 23:06분을 시작으로 03:11분까지 스무 번의 전화를 걸고 계속해서 술을 마신다. 마지막 발신 전화 이후 잠이 들었고 이후 04:52분에 처음이자 마지막 단 한통의 수신 음성메시지를 받게 된다.

스무 전의 발신 전화 내용을 보면 주인공 박성호는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술에 취해 있지 않을 때는 중견 소설가로서 품위를 유지한 채 예술가적 자세를 보여 주려 애쓰는 모습일 텐데 술에 취해 전화기를 통해 내뱉는 주인공 박성호는 소설가고 예술인이고 필요 없이 출세와 성적 욕망,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가득찬 성인아이일 뿐이다. 동생과 누가 어머니에게 전화해 밑도 끝도 없는 얘기를 늘어놓고 이혼한 자신의 처지를 개탄하면서도 그런 중에도 다달이 어머니께 용돈을 드리고 있는 자신을 알아주기를 구걸한다.

또 자신보다 더 출세한 친구를 질투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 친구 뒷담화를 한다. 그리고 직접 그 친구에게 전화까지 해서 진상을 부린다.

나이는 먹고 장편소설과 소설집을 냈음에도 속된 말로 더 이상 뜨지 않고 책도 팔리지 않는 평범하고 곧 한물 갈 소설가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의 무능함과 무관심으로 투영 한다. 출판사 사장에게 전화하고 문단 원로에게 전화해 또 진상, 진상을 떤다.

그러면서도 여자에 대한 속물적 근성은 버리지 못한다. 이제 갓 등단한 어린 여작가에게 전화해 추파를 던지고 이미 이혼한 전처에게 전화해 추억을 게워내며 구걸에 구걸을 한다. 전처와 전화를 끊자마자 자신이 이혼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된 정부(아내와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사랑은 순수했느니, 진심이었다느니 지랄을 한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욕을 누르며 읽은 작품이었지만 뭐 내 본심과도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았다. 누구나 ‘안 그런 척하지만 속내는 속물적이다. 원초적인 욕망과 욕구를 아슬아슬하게 다스리며 살지만 언제 어떻게 발현될지 알 수 없는 미약한 존재들이다. 박성호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당신은 아닌 것 같나?

주인공 박성호는 분명 늦은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밤새도록 한 진상과 지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전화하는 내내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통화 하는 사람마다 술을 줄일 것을 끊을 것을 주문했지만 그 충고가 끝나자마자 또 한 잔 꼴깍!

 


“선성님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선생님 깊이 존경해요. 그럼 편히 주무세요.” (p.125)

 

시원한 물 한 잔 들이키고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쥔 채 배터리가 나가 버린 핸드폰을 충전하며 쭈그린다. 핸드폰 전원을 켜고 발신 전화 목록을 보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며 욕을 내뱉지만 주워 담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젠장, 선생님(문단 원로), 희수씨(갓 등단한 어린 여 작가), 정태(출세한 친구), 윤희씨(바람피웠던 아내의 친구)한테까지 전화했네. 씨발 내가 미쳤지 미쳤어. 에이~! 어... 근데 이건 뭐야? 뭔 메시지지?’

지끈거리는 머리에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진상에 후회할 틈도 없이 음성 메시지를 듣는다. 엥? 어린 여자 목소리?

 

그의 작품을 읽고 팬이 된 젊은 여자 독자가 새벽에 문자를 남겼다. 너무 감명 깊게 박성호의 책을 읽고 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작가의 아픔과 상처를 읽어 내 오지랖 넓게도 작가의 아픔과 상처를 껴안아 주고 싶어 만나고 싶단다.

박성호의 숙취에서 단번에 깼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자신을 동경하는 어린 여자 독자를 만나 위세를 떨고 허세를 부릴 것이다. 한 번 안아보려고 안간힘을 쓰겠지. 흐흐...

 

재밌었다. 그나마 다른 9편의 작품들 보다 덜 불편했다. 그렇다고 편하지는 않았다. 인간이 가진 속내를 너무 질펀하게 펼쳐 놔서 내가 옷을 다 벗고 오장육부를 꺼내 놓고 있는 느낌이었다. 피식 웃으면서도 살벌했다.

앞서 말한 대로 김훈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김도언이란 작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마음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조속히 읽어 볼 요량이다.

 

 

“어쩌면 내 소설은, 내가 시로 쓰지 못한 것들의 장황한 알리바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막역한 표현이지만 시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치명적인 소설을 쓰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이다.”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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