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변하기로 했다 - 사회 생활에 지친 당신을 위한 선배의 코칭
허은아 지음 / 이지북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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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부터 너무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직장의 신」이다. 일본 원작을 각색한 작품인데 김혜수씨의 열연에 배꼽을 잡았다. 아직 방영 초기라 호불호가 분명한 것 같은데 이 시대 직장인이 겪는 애환을 과장된 코믹적 소재로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직장의 모습을 CCTV에 기록된 그대로 본 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숨 막히고 식은땀이 난다. 더 애잔하고 불쌍하게 보일 것이다. 그런데 과장된 연기와 만화적 소재를 사용해 이러한 적나라한 현실을 비꼬듯이 묘사하니까 웃음이 난다. 이제까지 일본의 원작을 들여와 우리식으로 해석해 방영한 작품들 대부분이 일본 원작 보다 더 나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드라마도 성공했으면 한다. 동일한 시간대에 타 방송사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는 엄청난 스타들이 나오는 사극이던데 지구 반대편 이야기보다 더 먼 이야기인 옛날이야기보다 나와 당신의 일상을 만화처럼 그려내는 이런 드라마가 더 잘돼야 한다.

내가 무슨 드라마 홍보하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 길어졌다.

 

아무튼 직장 생활은 쉽지 않다. 시쳇말로 ‘남의 돈 버는 게 쉬운 줄 아나?’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정말 쉽지 않다. 너무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직장의 신」드라마에 나오는 것보다 더 치졸하고 악랄하고 음흉하고 무서운 곳이 나와 당신들이 오늘도 들어갔다 나오는 직장, 그 곳이다. 드라마에서 장규직 팀장으로 나오는 오지호씨가 대놓고 계약직인 미스김 김혜수씨를 무시하고 삿대질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사실 현실은 이것보다 더 잔인하다. 드라마처럼 대놓고 하면 차라리 어떤 놈이 나를 싫어하는지 나와 다른 사람들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친절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이 책 「나는 변하기로 했다」는 여성 직장인들을 위해 쓴 책이다.

 

 

“나는 내 경험과 그 안에서 깨달은 것들 그리고 내가 만난 사람들의 분투기를 모아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한때 나처럼 멘토가 필요한 이들을 응원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쓴 동기다.” (p.6)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계약직 문제가 공론화되기 훨씬 전부터 직장 내 여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한 처우는 관습처럼 내려 온 고질적 병폐였다. 아무리 이해하고 알아보려 해도 남자인 나는 여성들이 겪었던, 겪고 있는, 겪을 직장 내 차별일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21세기 첨단을 달리는 오늘에도 직장 내 여성 차별은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물론 예전처럼 드러내 놓고 차별을 하거나 드라마에서처럼 김양, 이양, 최양 이렇게 호칭부터 ‘나는 너를 차별한다.’라는 전제를 깔아놓은 후 여성을 대하지는 않지만 동일한 직급의 남자 동료와 여자 동료를 대하는 직장 내 상사들과 타 동료들의 업무적·사적 태도를 되돌아보면 차별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저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이나 대책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책을 읽을 때에는 ‘뭐야~ 여성들을 위하는 척 하면서 아무런 말도 없고 차라리 이런 사람들이 더 여성들을 위축시키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자가 오히려 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미 수십 년간, 아니 역사적으로 보면 수백·수천 년간 이 땅에 상존해 온 남·여차별을 책 한권으로 불식시키고 금방 고치고 두드려 엎을 수 있을 것처럼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희망고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이여 일어나라~ 여성들이여 각성하라~ 여성들이여 모여라~ 힘을 모으자~ 하는 선전·선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도 직장에서 업무를 제외한 차별적 언사와 처사에 굴복하거나 지쳐있거나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선배로서 팁을 제시한다. 책을 덮고 나니 이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되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 하는 사람은 지금도 충분히 넘쳐 난다. 방향을 제시하고 목청껏 떠들어 대는 사람도 충분하다. 하지만 말단 직장인으로 출발 해 치열한 적응 과정과 경쟁을 뚫고 승진 하고 결혼 해 아이를 낳고 키우며 육아와 가사에 대한 중압과 스트레스를 겪어 본 선배 여성 직장인의 솔직한 한마디가 그 무엇보다 필요하고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더 많은 여성 직장인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많은 남성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반나절 넘게 함께 일하는 직장 내 여성 동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심부름만으로도 됨됨이를 평가받는다. (p.16)

“인사만 잘해도 전화만 잘 받아도 평판이 달라진다. (p.31)

“인사는 부족한 것보다 지나친 게 낫다” (p.32)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호의를 살 수 있다” (p.109)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저자의 사소한 팁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처음 읽을 때에는 ‘뭐야~ 당연한 것들 가지고~ 이런 얘기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소한 심부름 하나로, 매일 하는 인사 한 번으로, 수도 없이 하고 받는 전화 한 통화로 직장인들이, 특히 그런 직장인 들 중 여성들이 차별을 당하고 격이 맞지 않는 처사를 당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나니 다르게 보였다. 심부름 하나도, 인사 한 번도, 전화 한 통도 비장하고 심각하게 해야 한다. 맡은 업무만 잘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괴물 같은 직장이다. 언제든지 잘릴 수 있다는 공포가 상존하는 곳이며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어떤 칼을 숨겨놓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곳이 이 시대 직장이다. 그렇지 않은 곳이 있나? 있다면 날 좀 소개시켜 주기를 바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런 직장에 들어가고 싶으니까. IMF 이후 신자유주의가 고밀도로 농축되어 발현된 한국에서, 직장인들은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회사가 한 순간에 부도가 나고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실직 해 실업자가 되고 가정이 파괴되고 해체되는 일을 직·간접적으로 체감했다. 그래서 그 공포 속에 공부하고 취업을 준비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늘어난 것은 눈치뿐이요 줄어든 것은 월급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해야 했다. 사랑과 정이 넘치는 학교는 이미 호랑이 담배 물던 시절보다 더 오랜 이야기가 되었다. 학문과 낭만을 배운다는 대학은 이미 사장된 지 오래다. MT, 동아리, 잔디밭 막걸리는 개뿔. 대학문을 들어서자마자 취업준비생으로 4년에서 6-7년을 보낸다. 그렇게 어렵게 졸업 해 어렵게 직장이라는 문턱에 올라서는 학생들도 소수다. 대부분은 비정규직, 계약직이라는 무저갱으로 낙엽처럼 떨어진다. 차라리 중력가속도 그 것 만큼 빨리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잔인도 하지, 바람 없는 늦가을 을씨년스럽게 떨어지는 고목의 낙엽처럼 이리 휘청 저리 휘청 떨어질 듯 올라갈 듯 위태롭게 나부낀다.

 

 

“한 여성 팀장은 회의에만 들어가면 침묵하는 팀원들 때문에 늘 고민이 되었다. 도대체 이 친구들이 왜 그러는지 그녀는 늘 궁금했다. 어느 날 그녀는 회의 내용을 녹음해 들어보고 깜짝 놀랐다. 회의시간의 절반 이상을 자신이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p.172)

“부하직원을 다룰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못을 지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p.201)

 

책은 입사 직 후부터 임원 승진을 하는 과정을 가정하고 있다. 실제로 여성 직장인 중 몇 퍼센트가 임원이 되는지 정확한 통계가 삽입되었다면 더 절망적일 거라 짐작해서 일부러 넣지 않은 것은 아닌가 생각 했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직장에 진입한(물론 이 책에서는 정규직 여성 직장인을 설정하고 있다. 비정규직은 취급조차 하지 않는 현실 흐흐…….) 여성 직장인이 직장 내에서 겪을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팁을 제시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남성이기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가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을 읽은 실제 여성 직장인들에게는 어떻게 다가왔는지 궁금했다. 이 책에 대한 다른 리뷰도 하나하나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결론은 결국 ‘남의 돈 벌기 쉽지 않다’는 거다. 예전에는 대학 졸업 전에 취업이 거의 결정 나기도 했었다고 하는데 꿈같은 얘기다. 어린이집에서부터 화장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무한 경쟁 속에 살아야 하는 현실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짜 모습이다. 이 치열하고도 고독한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살아남기 위해 능력을 기를 것인지 인내력을 기를 것인지 뻔뻔함을 기를 것인지는 각자가 판단 할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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