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확률 높이기 프로젝트 - 지옥에 가기 싫은 한 남자의 요절복통 종교체험기
위르겐 슈미더 지음, 배명자 옮김 / 펜타그램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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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의 모 대형교회 목사가 설교 도중 교인들에게 사과를 하고 눈물을 보였다고 했다. 그 모 대형교회는 워낙 기세가 등등한 교회라 지하철역의 용도까지 변경하고 으리으리한 규모로 교회를 신축하고 있던 교회였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목사의 학위 논문이 표절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부인하다가 공신력을 가진 곳에서 검증을 받아 표절이라는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교인들에게 사과한 것 같았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표절의혹은 제기한 사람들이 바로 그 교회 교인들이라는 것이었다. 교회 신축에 대해 반대하는 교인들 중 일부가 자신들의 담임목사의 학위논문 표절의혹을 제기하고 밝혀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한국의 교회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할 것 같다. 이유는 엄청나게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교회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제 배 채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지난 5년 동안 그나마 가려져 있던 기독교인들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났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교회에 다닙니다.’라고 떳떳하게 밝히는 것이 쉽지 않다. 술·담배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를 넘어서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뭔가 이상하게 쳐다보고 ‘아직도 교회에 다녀?’ 라며 구리게 인식하기도 한다. 그 사람들을 탓할 수 없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 다닌다. 중3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때 함께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 중 지금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꽤 많다. 직업 특성상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교회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일부 있지만 대부분 본인의 의지로 교회 발길을 끊었다. 나 또한 대학시절을 거치며 내 신앙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거듭했다. 성경을 여러 번 읽고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고민했다. 나는 내 나름의 신앙관을 정립할 수 있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사실 ‘교회 발길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내 신앙을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 신앙을 유지할 것 같다.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다.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p.19)

 

기독교인은 무신론자, 진화론자를 싫어한다. 불쌍하게 여기다가 혐오하기에 이른다. 기독교인들이, 특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욕먹는 것이 배타적인 태도다. 자신들 편이 아니면 모두 나쁜 놈이 되는 것이다.

이 책 「구원 확률 높이기 프로젝트」의 저자 위르겐 슈미더씨 또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딱 싫어할 타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이니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불가지론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나 역시 기독교인이라 무신론자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나 보다.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뭐 물론 한국 교회는 둘 다 싫어할 것은 뻔하다.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좋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편이 좋을 것이다.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나는 여러 종교를 좀 더 자세히 연구하고 직접 조사하고 체험해 봄으로써 칩을 걸 숫자를 정확히 맞추고 싶다. 지금까지 나는 다른 종교에 대해 뜬구름 잡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p.27)

 

나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앞서도 말했지만 대학 시절 내 신앙에 대한 진지한 공부와 치열한 고민을 했었다. 그리고 그것의 일환으로 다른 종교의 경전 몇 권을 읽었다. 그때 생각으로는 ‘다른 종교의 경전을 읽고 그것이 더 성경보다 내게 설득력이 있으면 나는 그 종교를 믿을 것이다.’ 라는 객기로 가득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종교의 경전들은 너무 어려웠다. 이해도 잘 되지 않았다. 그나마 「화엄경」은 조금 읽을 만했다.

나는 내 신앙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점검을 위해 다른 종교를 알아보고자 했다. 당시 내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여차하면 종교를 바꿀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

그런데 불가지론자인 저자에게는 여러 종교를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저자는 자신의 ‘구원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라고 했다. 재미있는 접근이다. 불가지론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접근이다. 현세가 너무 지독하고 힘들어서 내세만을 기다리고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내세(내세가 있다면)에도 행복한 삶을 살고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지내고 싶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누구의 강요가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범신앙론자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준비로, 여러 성물들 외에 대략 150권의 책과 100편의 영화를 구입했다.” (p.67)

 

불가지론자이던 저자는 범신앙론자가 되기로 한다. 범신앙론자란 모든 종교를 포용하고 각 종교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배우고 차용할 점은 차용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 같다. 책에서 저자는 달라이 라마의 말을 인용하면서 분명 모든 종교에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선한 의도가 있으리라 믿는다고 말한다. 그것을 찾아가기 위해서 저자는 예배·제사 의식에 필요한 성물과 책, 영화를 구입했다. 나는 겨우 책 몇 권을 사서 생색냈을 뿐인데 저자는 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스케일이 컸다. 책에서는 구원 확률 높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몇 편의 영화를 봤고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자신의 집 방 하나에 수많은 종교의 성물을 함께 진열해 놓고 노트에는 수많은 종교의 성일과 축일을 메모해 그것을 기리는 등 진짜 그의 프로젝트 범위에 들어간 종교에 온전히 심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면모가 책에서 많이 보인다.

 

 

“심판대 앞에서 처음 받는 질문은 ‘신을 믿었느냐?’ 혹은 ‘기도와 예배를 열심히 했느냐?’가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 친절했고 그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는가?’이다. 나는 이 문장을 내 프로젝트의 기본 규칙으로 삼기로 했다.” (p.62)

 

저자는 비교종교학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여러 종교를 비교하고 분석해서 장·단점을 파악해 자신의 블로그나 SNS에 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모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지금보다 더 착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단면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지금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인들이 가지지 못한 ‘착함’이다. 단순히 자신의 종교를 포교하고 끌어들이기 위한 ‘착함’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웃들에게, 내 가족들에게 ‘착한 사람’이다. 당장 몇 주 뒤 교회에서 있을 [전도 대 축제]에 데려가기 위해 몇 주 동안 갖은 친절을 베풀고 호의를 베푸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 ‘지금보다 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한국 교회는 더욱 그렇다. 교회에서만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지 일주일의 나머지 6일 동안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불의하고 부정의한 일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5년 동안의 고위공직자 청문회만 돌이켜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박근혜 정권의 인사들만 봐도 그렇다. 교회에서는 존경받는 장로님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간단한 인사 검증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지만 기본적인 국가의 의무조차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

저자의 프로젝트 범위에 한국 교회와 한국 교회 사람들이 들어가 있지 않아 다행이다. 만약 한국 교회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봤다면 그는 불가지론자에서 철저한 무신론자 내지는 한국 교회 혐오주의자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런 순간이 왔는지도 모른다. 다시 이런 순간을 맞으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일어났고 어쩌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p.133)

“나는 잠든 아내 곁에 누워 있었고 내 배 위에는 아들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우리 가족의 지난날들을 잠시 회상했고 우리가 함께 했던 좋은 추억들을 떠올렸다. 그것이 전부였다.”

 

저자의 프로젝트는 사실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다. 자신의 직장에 몇 개월간 휴가를 내어야 했고 많은 종교를 알아간다는 것도 말이 쉽지 이상한 오해와 불필요한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출산휴가가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휴가를 내 줄 직장도 없을뿐더러 당장 교회에서는 내 이름을 부르며 ‘회개하라’ 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삽시간에 온 교회에 내 이름이 퍼지고 ‘그렇다더라, 아이고, 어쩌나, 불쌍해, 이상해, 미쳤어’(알고 계신가? 뒷담화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 한국의 교회다. 흐흐) 등등 모든 교인들의 기도제목에 내 이름이 올라갈 것이 뻔하다.

다행스럽게도 저자는 독일 사람이기에 이런 프로젝트가 가능했고 다행스럽게 저자는 자신만의 종교적인 체험을 한 것 같다. 책에서도 밝힌바 구체적으로 그 순간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순간을 경험했다.

나도 대학 때 그런 경험을 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분명 저자와 비슷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스리랑카에 있는 부처님의 거룩한 송곳니 사원을 방문한 것보다 뮌헨 공항의 ‘기도와 명상의 방’에 갔던 일이 훨씬 영적인 경험이었다.” (p.339)

 

갑작스레 자신의 침실에서 경험한 그 순간 이후 저자는 훨씬 더 깊고 세밀한 영적인 경험을 의도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요가나 명상일수도 있고 기도일수도 있는 그 영적인 행위가 그를 달라지게 했다. 물론, 그의 일상과 주변의 환경은 그 전과 동일하다. 자신이 바뀐 것이다. 일부러 부처님의 송곳니가 모셔진 사원을 방문하거나 주요한 종교적인 유적지나 문화재를 방문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상 한 가운데서 영적인 경험을 맛본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신이나 절대자의 존재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있든 없든 크게 상관하지 않고 불가지론자로서 편히 살다가 사후에 무슨 일이 생길지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나는 이런 느긋한 생각에서 한 단계 발전했다. 느긋함 대신에 기대와 기쁨이 자리했다.” (p.385)

 

무신론자인 저자에게는 별 상관이 없던 종교가 이제는 그의 삶을 조금 더 재미있게 하고 의욕적으로 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종교이거나 지금에 와서야 종교를 버리기도 애매해서 그냥 그렇게 자신의 종교를 유지하고 있는 수많은 종교인들은 저자만큼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종교를 제대로 돌아보는 프로젝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 교회 교인들은 더욱 그렇다. 그냥 일요일에 교회 와서 귀에 들리지도 않는 설교를 들은 후 친목 모임 하듯이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자신의 종교 행위의 전부라면 분명 신 혹은 절대자는 그런 종교 행위를 받지 않을 것 같다. 아무런 생각과 고민, 치열한 삶의 자세도 없이 꾸역꾸역 예배당으로 기어 들어오기만 하는 사람들은 예수시대 위선의 표상이던 바리새인들에 다름없다.

내가 한국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이기에 자꾸만 한국 교회를 트집 잡는 데, 뭐 어쩔 수 없다.

 

저자의 구원 확률이 얼마나 높아졌을지 알 수는 없지만 얼마만큼 확률을 높이겠다는 목표가 애초에 없었기 때문에 그 시도 자체로 그는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나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 오륜이 적힌 티셔츠를 입고 [모세오경], [코란], [도덕경]을 읽은 다음, 명상을 하고 요가를 했다.” (p.370)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

내가 다니는 교회 사람들 모르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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