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 - 르완다에서 강정까지 송강호의 평화 이야기
송강호 지음 / IVP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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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고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나는 지난 5년 동안 참 답답하고 부끄러웠다. 개인적인 신앙이야 죽을 때까지 지켜가야 할 신념이기에 늘 일상에 부딪치며 몸부림치고 있다. 또한 푯대를 향한 기나긴 항해라 여기기에 늘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신앙하고자 애쓴다. 대학에 와서야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질 수 있었기에 더 치열하고 살 떨리게 고민하고 공부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상한 놈 취급을 받기도 하고 너무 리버럴한 거 아니냐,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냐, 민중신학은 이미 죽었다. 등 많은 말을 듣기도 하고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포지션에 놓이기도 했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대단한 민중신학자들이 많았던 한국 기독교였지만 교회가 권력·자본에 굴복하고 굴종하게 되면서부터 교회 내 모든 이데올로기는 개발과 성장에 맞춰졌다. 민중·민생을 중시하고 그것에 포커스를 맞추던 신학의 풍토가 완전히 미국의 그것으로 바뀐 것이다. 든든한 토양을 다지기도 전에 우람한 교회 건물이 들어서고 수천, 수만의 성도가 몰려들고 돈이 집중되고 힘이 집중되는 곳이 교회가 되었다.

지금은 교회가 “개독교”라 불린다. 어린 아이들조차 웹상에서는 “개독”이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한다. 고유명사화 되어 버렸다. 하지만 교회만 모르는 것 같다. 왜 개독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하는지, 왜 사람들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지 교회만 모른다.

자본과 권력과 결탁하여 제 몸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한국교회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졌고 더 이상 교회 내 설교단에서는 죄에 대한 회개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울부짖음, 사회의 불의에 대한 탄식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한다는 소리는 그저 “예수 잘 믿으면 복 받습니다.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헌금하면 축복 받습니다.” 말쑥하게 차려들 입고 어색한 웃음 띠며 인사하고 아멘 한다.

지난 5년은 이것을 더욱 증폭시켰다. 서울의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장로 대통령을 만들었다. 어느 한 교회에서는 장관이 속속 배출되었지만 청문회의 그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장로님, 권사님들이 속속 떨어져 나갔다. 여전히 세습을 하는 대형교회가 많으며 유명한 어떤 목사는 여자신도를 성추행하기도 했다. 수백억을 들여 교회를 짓는다.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언제부터인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신앙인으로, 한명의 양심을 가진 젊은이로 가보고 싶었으나 가지 못했다. 대신 꼴통 목사 하나가 사람들을 모아 카톨릭을 분쇄하자며 미친 춤을 추었다. 부끄러웠다. 노구를 이끌고 강정마을을 지키기 위해 길바닥에 쓰러진 문정현 신부 같은 분들에게 오히려 내가 죄송했다. 그 미친 춤을 추는 목사와 같은 종교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시간을 흘렀고 나도 강정마을을 잊어갔다.

 

이 책 「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를 읽기 전까지.

문정현 신부보다 더 이전에, 정의구현사제단보다 더 이전에, 다른 시민 활동가들보다 더 이전에 강정을 위해 헌신하고 몸을 깨뜨린 기독교인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송강호라는 사람이다. 신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지만 많은 신학생들처럼 목사가 되지 않고 [개척자들] 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개척자들’ 특유의 정신은 이렇게 현장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졌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갈등과 분쟁, 재난과 기아 사태에 응답하고 동참하는 것. 그들은 지체 없이 현장으로 달려갔고, 그 나라에서 그 땅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끝내 평화의 씨앗을 심었다. 평화캠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p.60)

 

[개척자들]이라는 단체를 처음 들어봤다. 일반적인 구호단체와는 성격이 달랐다. 하나님이 모든 세계의 신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지금 당장 일어나는 분쟁과 재난·재해, 갈등에 눈 돌리지 말고 그곳으로 바로 날아가야 한다는 것이 모토다. 그래서 실제로 아프리카 수단과 동티모르 등지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때 가장 먼저 투입된 단체가 [개척자들]이라고 했다. 구호활동 뿐만 아니라 실제로 현지인들의 삶에 밀착해 함께 생활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하며 근본적인 갈등의 씨앗을 양 주체가 직면해 갈등을 해결하는 데 까지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놀라웠다실제로 가장 위험한 분쟁지역에서 평화학교를 세우고 평화캠프를 세워 교육하고 첨예한 갈등의 접점에 있던 양 부족을 화해 시켜주기도 했던 그들이었는데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 더 놀라웠다. TV에서 하는 구호단체 관련 프로그램을 보며 ARS성금을 하고 또는 후원자가 되는 것도 너무 의미 있는 일이지만 직접 그 현장으로 날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일정 기간 갔다가 바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완전히 동화될 수 있도록 언제까지인지 모른 채 함께 그곳에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목숨을 내어놓은 일이다.

송강호씨는 그런 일을 해온 사람이다. 독일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면 내가 알기로 한국에 와서 교회에 이력서를 내면 좋은 곳에서 목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먼 땅의 아픈 곳으로 날아갔고 강정마을을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갔던 사람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등한시하는 평화를 주제로 한 책을 출간하도록 결정해 준 IVP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p.11)

 

 

이 책 「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는 송강호씨의 [개척자들]에 대한 소개와 활동, 강정마을에서 투쟁하게 된 계기와 과정, 그리고 구속된 후 수감된 상태에서 외부로 보내 온 편지와 자필 일기 등이 수록된 책이다.

책을 출간한 IVP라는 출판사는 내가 대학 시절 몸담았던 IVF라는 단체의 출판사다. 기독교 출판사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다. 놀라기 이전에 너무 반가웠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독교 인 중에서 강정마을에 이렇게까지 깊게 관여해서 실제적인 투쟁을 하고 그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어 싸웠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웠다.

 

 

“진리는 오랜 숙고와 성찰을 통해 이를 수 있지만, 진리에 대한 신실함은 가장 단순하고도 간결한 실천으로 담보된다.” (p.28)

 

나도 그와 동일한 진리를 믿고 있는 신앙을 가졌는데, 송강호씨의 말대로라면 라는 내가 믿고 있는 진리에 대한 담보를 실천으로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일언반구도 보탤 수 없다. 책을 읽고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고 고민을 하고 일상에서 살아내는 것으로 진리를 알 수는 있지만 그 진리에 대한 신실함을 담보할 그 어떤 실천도 하고 있지 못하다면 나의 신앙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것이 맞다. 적확하다.

나름 생각 있는 기독교인이고 진보적인 가치를 신앙에 접목하고 있다고 자위하지만 이 책을 통한 송강호씨의 삶에 반추해보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진리에 대한 신실함은 가장 단순하고도 간결한 실천으로 담보된다.

 

 

“안보라는 가치 앞에서는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우리의 기본적인 신앙조차도 내려놓죠. 국가가 있어야 신앙도 있고 교회도 있는 게 아니냐고 하는데, 그건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교회조차도 그런 국가 안보 논리가 이데올로기로 깊이 뿌리박혀 있어요. 그리고 경제적 가치가 신아의 가치를 상회하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과 가치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기독교적으로 채색해서 수용해 버리는 거예요.” (p.88)

 

강정마을에 군사기지가 들어선다는 발표가 있고 강정마을에서 반대 투쟁을 시작한 후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강정마을 주민은 물론 육지의 시민단체와 종교계, 문화예술인, 일반시민들이 제주의 작은 마을 강정으로 날아갔다. 제주에 있는 많은 교회들은 침묵했다. 육지의 교회들도 침묵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성명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나는 공식적으로 교회 이름을 걸고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천명한 대형교회는 단 한군데도 보지 못했다. 해군기지 문제로 정치적 갈등을 조장하고 종교전쟁으로까지 물고 가려는 천박한 싸움꾼의 모습만 보였다. 송강호씨의 분석은 날카롭고 정확하다. 자신들이 믿는 신보다 국가의 안보 이데올로기와 대형 재벌 건설사를 배불리는 자본 이데올로기가 상위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은 그 일에 수많은 교회가 그토록 일제히 침묵할 수 있었던 것은 암묵적인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다.

 

 

“경찰과 법관들은 작은 마을 강정에서만 이미 600명이 넘는 시민을 체포 연행했고 300명 이상을 처벌했습니다.” (p.153)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결국 밀어붙였다. TV를 통해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활동가들과 종교인들이 끌려 나가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염기념물의 가치가 있는 구럼비바위가 폭파되는 것도 함께 방영되었다.

 

 

“신념이 없는 학자들은 시류에 편승하고 철학이 없는 정치가들은 권력자들에게 휘둘리는 법입니다. 제주도는 이런 학자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이들의 비틀거리는 행보를 방조하는 법관들에 의해 표류하는 섬이 되어 버렸습니다.” (p.152)

 

강정마을 뿐만 아니라 4대강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분명히 잘못된 방향이고 잘못된 방법이라 모두가 반대하는데 아니란다. 일단 삽부터 뜨고 본다. 대다수의 반대를 일부의 반대로 희석해 논란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명확한 잘못과 한계가 설정되어 있음에도 장악된 언론을 이용해 논란거리로 물 타기 해 버린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후다닥 해치운다. 중간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건·사고는 쉬쉬하면 그만이다.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 몇몇과 전문가라는 이들 몇몇 인터뷰해서 문제없다 하면 그만이다. 계속 반대하는 놈들은 잡아 가두고 나중에 무죄가 나더라도 수개월, 수년 동안 괴롭히면 그것으로 목표달성이다. 힘을 가진 자들이 편승하고 휘둘리고 방조하면서 표류하게 되었다.

 

지난 9월 송강호씨는 수감된 지 181일 만에 직권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지금은 강정마을에 대한 뉴스가 전혀 나오고 있지 않아서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수가 없다. 바위가 폭파되고 큰 포크레인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화면이 마지막 기억의 전부다. 하지만 여전히 강정마을은 싸우고 있다고 한다. 언론의 관심이 없고 국민들의 관심이 적고 특히, 기독교의 관심이 전무해도 여전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송강호씨는 석방 후에도 여러 인터뷰와 기고를 통해 강정마을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도록 여전히 해군기지 건설을 백지화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무엇이 진짜 기독교인가?’ 첫째, 탐욕을 버리는 신앙이다. 둘째, 거만하지 않은 신앙이다. 셋째,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 마음이다.” (p.162)

 

[개척자들]활동과 강정마을에서의 활동을 통해 그는 전사로 거듭났고 그가 수감된 이후에도 강정마을의 만장에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그의 그림이 그려지고 티셔츠에도 그의 얼굴이 그려졌다. 하지만 그는 전사가 아니라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주장한다.

탐욕을 버리고, 거만하지 않으며,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 신앙. 그런 신앙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서는 전사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이러니 하지만 당연한 결론이기 하다.

같은 종교를 가졌지만 송강호씨의 신앙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물론 신앙을 두고 니가 낫니, 내가 낫니 구별하고 차별을 둘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신앙보다는 훨씬 진정성이 있고 신실하다. 나도 그런 신앙인이 되고 싶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책을 보는 것으로, 교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자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간결한 실천과 실행으로 내 신앙의 신실과 진정을 담보하는 그것.

그것을 찾는 것이 내 신앙의 2막이다.

 

“평화의 꿈은 평화를 향한 항해에 오르는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단지 꿈일 뿐이다. 배에 올라타라. 깊고 푸른 평화의 바다를 항해하자!”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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