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개의 별
김광호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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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 영화를 보면 CIA요원들은 참 멋있게 나온다. 반대로 FBI나 경찰은 야비하고 거만하게 그려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보요원, 스파이, 이중간첩 따위는 말초신경을 자극하고도 남는다.

 

한국의 국정원은 군사독재시절 독재자와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강압적·폭압적인 고문과 의문사 등으로 점철되어 온 역사가 있기에 국내에서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다. 중앙정보부, 안기부는 단어만으로도 굉장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몇 개의 신분과, 직업을 가지고 극비의 임무를 수행하는 그들 내부의 모습을 알고 싶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예전 독재시절 만큼은 아니지만 개혁진영의 정부10년이 흐른 지금의 정부에서는 또 다르게 국정원의 모습이 바뀌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52개의 별」을 쓴 작가는 고(故) 김대중 대통령 정권 시절 국정원에서 일했던 요원이다. 반 세기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정권은 북한과의 갈등 해소와 위기 제거를 위해 힘썼기 때문에 이전과는 크게 달랐다고 한다. 물론, 지금의 정권에서는 예전의 그 국정원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을 테지만.

실제로 국정원에서 근무를 했었고 주요 모티브가 되는 남북장관급 회담도 역사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인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민주정권이 들어서고 그 정권의 임기말에 그간 해 놓은 대북정책의 마침표를 찍는 것이 남북장관급 회담이었다. 9.11테러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이 강경노선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당시 남북기류는 좋지 않았었다. 하지만 정권의 가장 중요한 정책이기도 한 대북화해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닌 중국에서 남북장관급 회담을 하기에 이른다. 국정원 내에서도 촉망받는 요원이었던 주인공은 이 회담의 전반적인 안전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게 된다. 이 회담만 잘 마무리 지으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 터였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회담에서 북측회담 인사로 참석한 고위급 인사 김만길의 갑작스런 망명요청을 듣게 된다.

 

“나는 국정원 요원으로서가 아니라 양심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판단을 내렸다.” (p.243)

“정말로 나 때문에 잰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고... 하지만 내게도 명분은 있었다. 한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김만길을 끝까지 지켜내야 했다.” (p.252)

 

남북장관급 회담 중 북측인사의 망명요청은 자칫 회담파기는 물론 남북화해 무드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중대사안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상관과 국정원, 청와대의 지시를 기다리지만 결국 망명요청을 미루고 회담의 성공적인 마무리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국정원 정예 요원이던 주인공은 여기서 국정원과 청와대의 지시를 무시하고 김만길의 망명을 돕는다.

회담 전 북경 시내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생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결국 그 동창생은 CIA요원임이 밝혀지고 이 모든 과정이 미국측의 철저한 계산과 계획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나는 매너 좋은 미국인 지점장의 사심 없는 호의라는 말을 믿기도 했다. 그것이 내 인생 최대의 실수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p.191)

“김만길 국장의 망명을 유도해서 전쟁을 발발시키려는 것이 CIA의 전략이었던 건가요?”

“대답할 수 없습니다.” (p.283)

 

아프간을 침공하고 공식적으로 북한을 적대국가·불량국가라고 떠들어 댄 미국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제외한 채 남과북이 물밑에서 회담을 진행하고 제3국이자 유일한 자신들의 라이벌인 중국의 도움을 받아 성과를 꾀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국정원 정예요원이기 이전에 뜨거운 인간애를 가진 한 인간으로서 도움과 호의를 베풀려 했던 주인공의 용기와 희생은 결국 뉴스 한 줄 나지 않고 끝나 버린다.

자신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CIA가 모든 것을 백지화 시켜 버리고 삭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한국에 돌아와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게 되고 결국 국정원에서 사임하게 된다.

CIA의 계획에 넘어가 한국으로 망명하려 했던 김만길은 중국에서 북한 보위부에 의해 압송된다.

 

“나는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혼자 싸웠던 것인가. 그냥 돈키호테 같은 기행을 벌였을 뿐인가...” (p.303)

 

가장 소중한 존재인 아내에게조차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살았던 주인공에게 아내는 이별을 통보하게 된다.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국가를 위해 일하는 국정원 요원이기에 가족에게조차 자신을 숨기며 희생하고 헌신 봉사했지만 한 순간의 돈키호테 같은 기행으로 인해 국가에게도 버림 받은 것이다. 가족에게도 마찬가지.

 

소설은 여기까지다.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난픽션인지 알수는 없지만 정보기관 특유의 날선 긴장감과 복잡미묘한 사건 전개 등을 기대했다가는 실망할 것 같다. 하지만 국정원 요원이라는 작가의 전직 자체가 주는 호기심이 크고 실제 했던 역사를 소재로 하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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