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는 봄
양석일 지음, 김응교 옮김 / 산책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역사를 돌이킬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역사를 되새김해야 한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는 아무리 아픈 생채기라 해도 칼로 도려낼 수 없는 역사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결코 없어지지 않는 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관심이 없다.

 

 특히 한국 정부차원에서 그렇다. 박정희는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오는 조건으로 일제의 만행을 없는 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이 두고두고 일본 정부의 공식 핑계거리가 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위안부 할머니]가 아직도 살아계셔서 외국에서 수많은 증언을 하고 인터뷰를 하고 있으면 그 할머니들의 모국이라면 아무리 그들보다 힘이 약하고 이전 사람들의 무식과 자만의 소치로 돈 몇 푼에 눈을 감았다 치더라도 제대로 덤벼봐야 하는 거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도 한 번 해봐야 하는 거다. 가장 친한 친구가 [위안부 할머니]관련된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한 번씩 장례식에 간다고 하면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신 거다. 일본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기만을 바라고 있다. 어쩌면 한국 정부도 그런지 모르겠다. 정말 짜증나고 화가 솟구친다.

 

 

“작가 양석일이 상정한 이 책의 독자는 일본인이다. 즉 이 소설은 ‘위안부를 소재로 해서 일본어로 쓰인 최초의 소설’이다.” (p.517)

 

재일 조선인 양석일씨의 용기에 먼저 박수를 보낸다. 어쨌든 일본 사회에서 여전한 마이너리티로 살아가는 재일 조선인이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소설을 썼다는 것 자체가 용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 「다시 오는 봄」은 참 읽기가 힘이 들었다. 책이나 언론을 통해 그리고 단체에서 일하는 친구를 통해 보고 들었던 할머니들에 대한 기록과 뉴스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설 속에 묘사된 폭력이 너무 아팠다.

리뷰에 옮길 수도 없다. 손끝이 떨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할머니들이 겪으셨던 실상이라 생각하니 더욱 힘들었다.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면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이 없어진다. 희망이 절망을 절망하게 하는 것이었다.” (p.253)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무작정 끌려왔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는 받아내기 힘든 일을 겪어야 했다.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는 없었다. 내선일체를 강조한 일본의 제국주의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친 황군의 성적 욕망 해소를 위해 조선인이든 중국인이든 침공한 지역의 현지인이든 여성이면 무조건 징발했다. 그리고 배설의 도구로 썼다.

이것은 어떠한 논리와 전쟁의 광기에 빠져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로도 설명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서도 안 된다.

 

 

“넌 무슨 생각인 거냐! 넌 천황폐하의 백성이다. 네 목숨은 천황폐하에게 바친 것이야ㅣ 멋대로 죽는 건 허락되지 않아. 이런 병신 같은 년!” (p.337)

“길어지는 전쟁의 실체를 구현하고 있는 위안부들은 일본군이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하는 건지 몰랐기 때문에 무엇 하나도 자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p.408)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10대의 꽃다운 나이에 끌려와 중국으로 남방 아시아로 끌려 다니다 보니 몇 살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일본이 누구와 싸우는지도 몰랐다. 그냥 도구로 철저히 쓰일 뿐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순화처럼 많은 위안부들이 임신을 하고 출산을 했지만 자신의 배로 낳은 아이에게 젖 한번 물릴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는 거야. 살아나가는 거야. 그게 우리들의 단 한 가지 희망이야.” (p.211)

“이런 몸이 되어버려 이젠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어.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p.238)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밭은 사드리고 싶어. 우리 집은 계속 소작농이었으니까 아무리 일해도 땅을 살 수 없었어. 그래서 나를 내보내 일을 시킨 거야.” (p.389)

 

생과 사를 오가는 하루하루를 견디고 말도 안 되는 학대와 성적 착취를 견디다 못해 정신착란에 까지 이르는 경우도 많았다. 도덕적 잣대와 인간성은 말살 당했다. 적과 동지의 개념도 모호해지고 매일 밤 찾아오는 수십, 수백 명의 일본병사들에 대한 증오와 동정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최소한의 인간 대접조차 받지 못한 그녀들은 오로지 한 가지 소망밖에 없었다.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엄마·아버지·형제들이 있는 그 곳으로 가는 것. 실개천이 흐르고 아름다운 나무와 꽃이 있는 흙비린내 나는 그 곳으로 가는 것.

 

 

“이제부터 너희 한 사람당 여비 천오백 원을 나눠준다. 우리 한국광복군은 너희를 서울로 돌려보낸다. 모레 아침식사 후 광장에 집합해 오전 여덟 시에 출발한다.” (p.497)

 

소설 속 순화는 결국 고향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록 아버지는 삼년 전 돌아가셔서 뵐 수 없었지만 어머니와 동생들과는 기적 같은 해후를 나눈다.

 

사실, 이 소설에서는 그 뒷이야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테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 거야. ‘그 여자는 위안부였대’라고. ‘더러운 여자다, 많은 일본 병사와 잔 여자다. 갈보년.’ 그렇게 욕을 퍼부을 거야. 나는 갈 곳이 없어. 여기서 나가도 자유롭게 살 수 없어.” (p.479)

 

그녀들은 돌아온 모국, 고향땅에서도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일본군의 위안부였다는 것이 주홍글씨가 되어 평생을 따라 다녔다.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모국은 그녀들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 또 한 번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고 모두가 잘살아보자 외칠 때 그녀들의 한(恨)은 돈 몇 푼에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모국이 발전하고 점점 잘사는 나라가 되어가면서 힘이 강해져도 그녀들을 모른 체 했다. 없는 듯 했다.

 

그녀들도 얼마나 잊고 싶었겠나. 칼로 깨끗이 도려낼 수만 있다면 피를 쏟아내면서 도려낼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에서 일을 하며 연명해야 했다. 모두가 쉬쉬 하고 알아주지 않는 위안부 문제를 꺼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세상에 알려진 후 부랴부랴 모국에서 설레발을 치고 이곳저곳에서 취재하고 난리를 쳤다. 바뀔 것 같았다. 할머니들은 처음으로 기대라는 것을 가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40년 50년 시간은 지나갔고 어느새 꽃다운 소녀에서 흰머리와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가 되어 갔다. 한명 한명 손잡아주던 친구, 언니, 동생들이 죽어갔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햇볕이 내려쬐나 매주 수요일이면 철옹성 같은 일본 대사관 앞에 할머니 들이 모였다. 그것이 1000차를 넘어섰다. 목소리를 내지르지만 들리지 않는다.

 

결코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 없는 문제다. 허구한 날 제 밥그릇 챙기기에 바쁜 정치인들과 위정자들은 할머니문제에 관심이 없다. TV카메라가 따라와 취재해 주지 않으면 할머니들의 손을 맞잡아주지 않는다.

내가 모르고 있으면 좋겠지만 이런 위안부문제에 대한 소설이 한국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재일조선인 작가의 작품을 먼저 읽게 된 것이 낯부끄럽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봐야겠다.

 

 

“일본 정부는 전쟁범죄 인정, 진상 규명,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역사교과서에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p.525)

 

할머니들의 외침은 이번 주 수요일에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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